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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장. 성년식
새해가 밝았다.
교황이 숨을 거둔 충격으로 움츠러들었던 제국에도 새 햇살이 비추자 슬슬 밝은 분위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새해 첫 달에 있는 가장 큰 행사는 다름 아닌 ‘성년식’이었다. 평민부터 귀족, 황족을 가리지 않고 제국 내 모든 18세 소년소녀가 성인으로 인정받는 시기.
생일과 상관없이 태어난 년도로부터 햇수로 18년째를 맞는 아이들은 모두 축하받을 자격이 주어진다. 그들은 새 옷을 입고 새 신을 신으며 어른이 열어준 파티에 참석한다.
매년 새해를 맞아 성년식을 치르는 시기는 특별했지만 이번 해는 유독 나라 전체가 평소의 갑절은 더 들떠있었다.
바로 제국 군주의 후계자, 쥬다스 E.루바르잔 아르키디온이 18세가 되는 해기 때문이다.
황실의 주도하에 전국적으로 성대한 축제가 열렸다. 평소 아들의 일에 무심하게 굴던 황제였으나 이번만큼은 조금 그 태도가 달랐다. 황제 레위스는 그를 아는 사람이라면 유별나다 싶을 정도로 황태자의 성년식에 신경을 기울였다. 심지어 쥬다스를 불러 직접 축하선물을 하사하기까지 했다.
게다가 많은 사람의 귀를 번쩍 뜨이게 할 만한 명을 내렸다.
“……폐하. 그 명은 거두어주십시오.”
“불허한다.”
황제와 황태자의 각 측근들은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두 부자의 대화를 지켜보았다.
어지간해서는 황제의 명에 토를 달지 않던 황태자가 거부를 표했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황제가 직접 마련한 둘만의 식사 자리였다. 본래대로라면 아버지와 아들이 오붓하게 식사를 하겠거니 싶은 장면에서도 둘 사이는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애초에 황제는 식사를 가족과 함께 한다는 개념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니 성년이 된 아이를 불러 축하한다는 명목으로나마 한 상에 앉혀놓은 자체가 이례적인 상황이었다.
하지만 어색함을 넘어 분위기는 싸하기까지 했다.
안 하던 짓을 하는 황제 앞에서 하필이면 그 유순하고 총명한 황태자 역시 평소라면 하지 않을 반항을 하고 있었다. 또 황제는 황제대로 그런 아들의 반항을 단칼에 쳐 냈다.
‘아니 왜들 이러십니까!’
덕분에 시종들과 호위들만 진땀을 뻘뻘 흘러내렸다.
주변 사람들은 불안해서 위장이 다 떨릴 지경인데 정작 황제와 그의 후계는 태연한 얼굴로 요리를 맛보며 대화를 주고받고 있었다. 이런 면에서 보면 참 닮은 꼴 부자였다.
“앞으로, 이달이 끝날 때까지 성년을 축하하기 위한 파티를 하루도 빠짐없이 진행할 것이다.”
먼저 했던 이야기의 반복이었다. 난처한 기색이 역력한 금안을 힐끗 쳐다본 황제 레위스가 시선을 거두며 툭 내뱉듯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차기 국모가 될 여인을 찾아오라.”
“폐하.”
“명은 번복하지 않는다.”
대화의 창구를 닫아버리는 황제를 보며 쥬다스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매사 여유로운 그에게 있어 가장 어려운 사람이 바로 눈앞에 있는 현생의 부친이었다.
살아온 날로만 따지고 보면 자신보다 어린 사내이긴 하나 동시에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기회를 열어준 ‘아버지’이기도 했다. 지금 그가 이그레트가 아닌 쥬다스로 살아가고 있는 이상 그 앞에서 함부로 굴긴 힘들었다.
거기다가 전생에서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부모와 부대끼며 살아본 적 없는 그는 이런 관계가 숨이 턱 막히도록 낯설었다. 결국 쥬다스는 강하게 의견을 주장하지 못하고 소소한 반박만으로 난색을 표할 수밖에 없었다.
“소자에게는 아직 다른 이를 품을 준비가 되지 않았습니다.”
“핑계가 우습구나. 내 네가 그토록 총명하다 들었거늘.”
말과는 달리 황제의 차가운 얼굴에서는 미소 한 점 찾아볼 수 없었다.
쾌와 불쾌, 그 무엇도 느껴지지 않는 탁한 금안이 자신을 빼닮은 아들에게로 향했다.
“사내가 여인을 품는 일에 어찌 준비를 논한단 말이냐. 이는 팔을 뻗고자 하는 곳에 뻗고 발을 딛고자 하는 곳에 딛는 것과 마찬가지일진대.”
“…….”
“너는 팔과 다리를 움직이는 일에 준비가 필요하더냐.”
“그런 뜻이 아니오라.”
황제의 말에는 틀림이 없었다. 자신에게 닥친 일만 아니라면 쥬다스도 구구절절 옳은 소리라 여겼을 것이다.
실제 황족들은 황권다툼이 오래 이어지거나 급박한 전시상황이 아니라면 성년식을 치르기도 전에 이미 여인을 거느렸다. 지금 같은 태평성대에, 이미 군주의 자리가 약속된 후계자라면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차라리 전생의 기억이 없었더라면 나았겠지만.’
문제라면 쥬다스에겐 백 년 가까이를 살아온 전생의 기억이 고스란히 남아있다는 점이었다.
이걸 곧이곧대로 말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그 알맹이를 빼고 얘기해선 도저히 납득시킬 자신이 서지 않았다. 그가 좀처럼 입을 열지 못하자 황제는 거침없이 상황을 일축했다.
“더 들을 이야기는 없는 것 같군.”
둘 다 입이 짧은 편인지라 이미 식사는 끝난 지 오래였다.
부친이 먼저 일어서자 쥬다스도 따라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미지근하게 식은 찻잔을 식탁에 남겨둔 채 황제가 돌아섰다.
멀어지는 등을 복잡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던 쥬다스가 이마를 짚은 채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곤란한데.”
「헤에. 뭐야뭐야, 지금 너더러 결혼하라는 거야?」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던 유니가 그의 주변을 빙그르르 돌며 물었다.
본인은 복잡할지 몰라도 주변인들에겐 상당히 즐거운 구경거리였다.
「우웅? 결혼? 언제 그런 얘길 했다요?」
여태 듣고 있었으면서도 맥락을 파악하지 못한 토니만이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바보냐. 아까 차기 국모 어쩌고 했잖아.」
「엑! 그게 그 뜻이다요?」
「이그레트가 이 나라의 차기 왕이니까. 당연히 결혼을 하면 그 여자가 국모가 되겠지.」
「신기하다요. 그럼 진짜루 결혼하는 거다요?」
「그을쎄.」
해맑게 물어오는 땅의 정령을 향해 유니는 그저 어깨를 으쓱였다. 그녀가 느끼기에 그들의 계약자는 그다지 결혼을 원하고 있지 않았다.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안 하면 돼요.」
어차피 계약자의 바람을 최우선시하는 정령들의 입장에선 그다지 고민할 일도 아니었다.
유니와 함께 단순한 답을 내어놓은 카니가 방실방실 웃으며 그의 어깨에 매달렸다.
「모든 것은 당신의 바람대로. 이그레트.」
바라기만 한다면 아예 당장 눈앞에 참한 신붓감을 구해다 줄 기세였다.
정령들의 반짝반짝한 눈길에 더욱 난감해지고 만 쥬다스는 고개를 젓고는 걸음을 옮겼다.
황제의 궁에서 나오자 기다리고 있던 에단과 바이칼이 뒤로 따라붙었다.
“크으, 벌써 전하께서 성년이시라니. 감개무량합니다.”
안에서 무슨 대화가 오갔는지 모르는 두 친우는 그저 이번 성년식에 대한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다.
무려 모시는 주군이 성인으로 인정받는 날이다. 다른 어떤 날보다 특별한 감격이 느껴졌다. 이미 재작년에 성년식을 마친 바이칼이 모처럼 선배의 기분을 만끽하며 코를 슥 훔쳤다.
“언제까지나 어린아이로 계실 줄 알았는데, 이거 참 뿌듯…….”
문득 말하고 나니 위화감이 느껴진 바이칼이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어, 이건 아닌가?”
아무리 기억을 되짚어 봐도 쥬다스가 어린애답게 굴었던 적이란 떠오르지 않았다.
어른스럽다 못해 인자한 노인처럼 항상 주변 사람들을 챙기고 다닌 쥬다스는 오래 전부터 어른 취급을 받고 있었다.
어울리는 이미지를 꼽으라면 큰 가지를 드리운 거목이었지 결코 새싹 느낌은 아니다.
성년식을 앞둔 아이를 보며 느낄 법한 보편적인 정서와 쥬다스만의 특별한 감각 사이에서 혼돈을 겪고 있는 바이칼을 보며 에단이 미간을 좁혔다.
“바이칼.”
“예입.”
“말을 할 때는 생각이란 걸 좀 깊이 하고 내뱉도록. 언제까지 그런 식으로 전하를 곤란하게 해드릴 셈인가.”
“예? 전하, 제가 곤란하게 해드렸습니까?”
핀잔을 줬더니 그걸 또 고스란히 본인에게 확인하는 수하로 인해 에단의 표정이 미미하게 구겨졌다.
바이칼이 능청스럽게 물어온 게 정말 몰라서가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는 쥬다스는 피식 웃으며 답해주었다.
“괜찮다. 내가 영 어른스럽지 못했던 건 사실이지.”
“억. 아뇨!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답변을 받게 된 바이칼의 안색이 순식간에 허옇게 떴다.
그야말로 여우 피하려다 호랑이굴에 들어간 꼴이었다.
“흠. 이런, 절대 그렇지 않을 정도라니. 어울리는 동안 내게 아이다운 맛이 없어 고생이 많았겠구나.”
“으아아! 아닙니다, 전하! 제발.”
이제 바이칼이야말로 아이처럼 엉엉 울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시무룩하니 울상 짓는 그를 내버려 둔 채 쥬다스가 에단을 향해 말꼬리를 돌렸다.
“참, 에단.”
에단은 곧장 답하며 고개를 숙였다. 사담을 좋아하고 진지함이라곤 찾기 어려운 바이칼과는 달리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절도를 잃지 않았다.
성향으로 따지면 극과 극인 두 사람이 절친한 친우가 되어 같은 주군을 모시는 상하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신기하게 바라보는 이들도 많았다.
“너는 가문의 독자라 하였지?”
“예, 그렇습니다.”
헤이가 공작가문의 독자로 하나뿐인 후계자인 에단은 올해로 21살이 되었다.
이제 갓 성년식을 맞게 된 쥬다스보다 3년 앞서 성인이 된 그도 아직까지 싱글이었다.
오히려 멋모르는 십 대 초반에는 집안에서 내정해 준 약혼녀가 있었으나 루바흐에 입학하고 나서 파혼을 결정했다.
루바흐에서 충성서약을 맹세하였으니 주군의 위치가 안정될 동안은 당분간 혼약에 집중할 여력이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렇다고 어릴 적 집안끼리의 결정만 믿고 멀쩡한 아가씨를 오랫동안 홀로 버려둘 수는 없으니 자유롭게 다른 기회를 맞으라는 나름의 배려이기도 했다.
‘아, 맞아. 소문으로는 아직 그 아가씨가 마음을 접지 않았다곤 하던데.’
소문을 떠올린 바이칼이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괜히 소리 내어 말했다가 또 어떤 일침을 맞을지 두려워서였다.
‘근데 이상하네. 집안 짱짱하고 인기도 많다면서? 뭐가 아쉬워서 단장 같은 냉혈한을 기다리겠다는 건지. 으휴, 여자들이란.’
에단에 대해 볼꼴 못 볼 꼴 다 본 바이칼로서는 도무지 여자마음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물론 그에게는 기다리겠다는 여자가 없었고 가문끼리 언약을 맺었던 약혼녀 같은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에이, 절대 부러운 건 아니야.’
부러우면 지는 거다. 그는 끊임없이 마음속으로 자신을 세뇌시켰다.
“…….”
문득 진 것 같다는 슬픈 예감이 가슴속에 휘몰아쳤지만 애써 모른 척 입맛만 다셨다.
“삐잉!”
“그래, 나한텐 네가 있었지.”
품안에 폭 파고들어 있던 플루비가 그의 심란함을 눈치채곤 고개를 쏙 내밀었다. 선물 받은 빨간 망토가 귀엽게 어울렸다.
‘그러고 보니 이 녀석도 여자애라며. 용족이긴 하지만 어쨌든 날 잘 따르잖아?’
“삐?”
‘그러니까 난 여자한테 인기 없는 게 아니야!’
엉뚱한 논리였지만 마음이 편해지는 데엔 성공했다. 바이칼은 씩 웃으며 플루비의 머리를 토닥여 주었다.
“어이구, 예쁜 것.”
“삐액?”
“물 마실래?”
수상쩍게 쳐다본 건 언제고 물을 준다니 또 좋다고 품에서 빠져나왔다.
꼬리까지 살랑이고 있는 단순한 와이번을 보고 흐뭇해진 바이칼이 수통을 꺼내 뚜껑에다가 물을 따라주었다.
그사이 주군으로부터 무슨 말이 나올지 기다리던 에단은 쥬다스가 무언가 망설이고 있다는 낌새를 눈치 채고 먼저 입을 열었다.
“제게 따로 하문하실 것이 있으십니까?”
“으음.”
물론 있었지만, 에단과 파혼한 얼굴 모를 영애에게까지 생각이 미치고 나자 차마 그에 관한 질문을 던질 수가 없었다.
결국 쥬다스는 솔직하게 제 고민을 털어놓기로 결단했다.
“실은 내가 조금 전 폐하께 따로 명을 받은 게 있는데 말이다…….”
“주인!”
그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그들 사이로 불쑥 끼어들었다.
최근 이리저리 돌아다니느라 분주한 청룡, 가야였다.
루바르잔이라는 새로운 땅에 어느 정도 적응한 가야는 이제 호기심을 채우기 위해 수도 근처를 탐험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한두 시간만 혼자 내버려 두면 불안해하더니 이젠 쥬다스의 곁에서 제법 오래 떨어져 있곤 했다.
이번에는 무려 한나절씩이나 자리를 비우고 있던 가야는 어딘지 설레는 표정으로 계약자의 곁에 돌아왔다.
“나, 나! 오다가 들었어!”
“응? 뭐를.”
신수 특유의 푸른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을 발했다. 그 눈빛을 보자 쥬다스는 문득 다른 정령왕들이 보내던 호기심 가득한 눈빛을 떠올리고 움찔 뒤로 물러섰다.
아니나 다를까, 청룡은 두 주먹을 움켜쥔 채 들뜬 표정으로 그에게 물었다.
“결혼한다며?”
“푸우웁!”
느닷없는 폭탄선언에 플루비와 나란히 물을 마시고 있던 바이칼이 입에서 분수쇼를 선보이고 말았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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