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그레트-232화 (232/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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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장. 성년식

해맑게 물어온 가야 덕에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고민하던 게 무색해지고 만 쥬다스는 그만 실없이 웃어버렸다.

“……라는 명을 받긴 했다만.”

가야 덕분에 황제로부터 받았다는 명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깨닫게 된 에단이 가만히 그를 응시했다.

수하들의 놀람 섞인 시선을 받으며 쥬다스는 태연히 말을 이었다.

“따르겠다고는 안 했어.”

“어엉? 결정된 사항이 아니야? 그거 아쉽네.”

청룡은 아쉬움이 뚝뚝 떨어지는 표정이었지만 더 추궁하지는 않았다.

“주인한테 짝이 생긴다면 어떤 사람일까 엄청 궁금했는데.”

“그러는 가야 님은 따로 짝이 없으십니까?”

“정령은 후손을 남길 필요가 없으니까.”

그 대답에 바이칼은 가야가 정령이란 사실을 새삼스레 되새겼다.

겉모습은 인간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가야는 엄연히 신수, 즉 동물계 정령이었다. 그들은 선대가 소멸함과 동시에 그 자리를 채울 똑같은 능력치의 후대가 눈을 뜬다. 그러니 정령에게 따로 배우자가 필요할 일은 전혀 없었다.

“어쨌든 그런 이유로 이번 달은 좀 바쁠 것 같구나.”

그제야 가야도 장난을 거두고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흐응. 표정을 보니 주인은 별로 안 내키는 것 같네.”

“하지만 내 하고 싶은 대로만 고집 부릴 수는 없으니 말이야.”

“하긴.”

해동의 건국부터 시작하여 왕실대소사를 전부 지켜봐 온 청룡이다.

성질 같아서는 그냥 다 엎어버리고 원하는 대로 하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제국 황제의 후계란 자리가 그리 편안히 살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은 그도 알고 있었다.

‘인간이란 참 복잡하다니까.’

귀찮기만 한 허례허식조차 목숨 걸고 지키려 든다.

자신보다 약한 자에게도 신분에 따라 고개를 조아리며 때론 싫은 일도 기꺼이 받아들여야할 때가 있다.

본능보다는 이성이 앞선 사회. 그러한 인간 세상에는 인간들만의 침범할 수 없는 선이 있다는 걸 알고 있는 가야로서는 그저 떫은 표정으로 뱃가죽만 긁적거릴 뿐이었다.

반면 강제로 배우자감을 구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 쥬다스는 정작 여유로운 태도였다.

“다들 어째 심각한 분위기로구나. 그리 진지하게 생각할 필요 없단다.”

“하지만 전하. 폐하께서 직접 관여하시는 일이라면 어영부영 넘어갈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암, 당연히 어영부영 넘어가서는 아니 되지.”

“그 말씀은.”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을 설득시킬 때에는 언제나 명분이란 게 필요한 법.”

‘……황제폐하를 설득시키실 생각이십니까?!’

바이칼은 차마 입 밖으로 튀어나오지 못한 경악성을 가까스로 삼켰다.

결혼이라는 중대사를 말 한마디로 강요한 황제도 황제지만 거기에 대항하려는 쥬다스의 고집도 어마어마했다. 현 황제가 누구인가. 혈육의 목이 떨어져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으며 군주의 자질을 키우기 위해 자식을 사지로 내몰고 제 알아서 살아 돌아오길 기다린 자다.

그런 자를 말로 온건히 설득하는 일은 도무지 상상조차 가지 않았다.

“그럼 그 명분이란 건 어떻게……?”

“일단은 폐하께서 준비해 두신 파티엔 꾸준히 참석해야겠지.”

본래 파티에는 거의 참석하지 않는 그였다. 시끄러운 장소보다는 차분히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분위기를 선호하기 때문이었는데 이번만큼은 그러한 취향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앞으로 한 달.”

나머지는 그 후에 생각할 일이다.

“그동안은 너희가 나를 좀 도와주어야겠구나.”

그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두 친우에게 빙긋 웃어 보였다.

그것으로 그날 일과를 마친 쥬다스는 피곤하다는 핑계로 평소보다 일찍 방으로 돌아갔다.

쭐래쭐래 따라 들어온 가야가 불쑥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주인.”

“응?”

“주인은 왜 그렇게까지 혼약을 거부하는 거야? 좀 이른 감은 있지만 황제가 시킨 게 나쁜 제안은 아니지 않나?”

다른 이들이 있을 때엔 미처 물어보지 못한 속내였다. 그 물음을 듣자 쥬다스가 답하기도 전에 정령들이 쑥덕거리기 시작했다.

「요즘 애들이랑은 나이 차이가 너무 커서 그런 게 아니다요?」

「그러게. 이그레트는 이미 한 번 노인으로 살았었잖아. 애들은 눈에 안 찰 수 있지.」

「으응, 상대가 너무 아가 같으면 부담스럽지 않을까요?」

다른 정령들의 추측에도 가야는 흔들리지 않고 팔짱을 척 꼈다.

“요 꼬꼬마 정령들아. 니들은 인간을 몰라도 너무 몰라.”

「뭐야?」

“진짜 갓 태어난 응애응애 아기도 아니고 다 큰 처자를 보고서 누가 아가 같다는 생각을 하겠냐?”

「아냐! 인간은 수명이 짧기 때문에 열 살만 어려도 되게 어려 보인다고 그랬단 말이야.」

한심하다는 투에 발끈한 유니가 따져보았지만 가야는 콧방귀만 뀌었다.

“헹. 너희가 지금 뭘 착각하고 있는데. 어려 보이는 거랑 매력을 느끼는 건 다른 문제다?”

「……달라?」

“인간 세상에선 나이 칠팔십이면 노인이지? 그런 노인들도 이십 대 젊은이를 좋아할 수 있다고.”

「정말?!」

“응. 실제로 해동에선 늙은 왕이 십 대 여자아이를 부인으로 삼는 경우도 꽤 많았다?”

「우와아, 대단해. 인간이란 여러 의미로 대단하구나!」

자연계 정령왕들을 앞에 두고 뜬금없는 인간사 교육을 시작한 청룡을 보며 쥬다스는 피식 웃었다.

그는 정령들의 대화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조용히 뒤돌아 침대에 털썩 누웠다.

‘현생의 또래아이들이 어려 보이는 건 사실이지.’

하지만 그의 진짜 속마음은 가야의 주장과는 조금 달랐다.

루바흐에서 거의 여신으로 추앙받던 크리스티나를 보고도 마음이 동하지 않던 이유는 그녀가 정말 어린아이로밖에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건 양 수인족 키리에도, 오십 년을 살았다는 란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들은 그에게 있어 돌봐 줘야 할 대상이었다.

전생에서 노예 출신인 레이야를 구해주어 한 지붕 아래에서 살면서도 딸처럼 아껴주었던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 외에도 그에게 접근하는 여성들에게선 지위나 명예를 노리고 있는 어린 생각이 전부 보였다.

이렇듯 전생을 기억하고 있는 그로서는 심리적인 나이도 문제였지만 실상 더 큰 장벽은 따로 있었다.

‘결혼은 즉 가정을 이루는 일.’

물론 군주가 혼약을 맺는 데엔 더 크고 복잡한 관계가 얽혀 있겠지만 결혼이란 공통적으로 ‘가족’이 된다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나는 더 이상.’

―자신이 없다.

쥬다스는 누운 채로 천장을 향해 손을 뻗어보았다.

처음 12살로 눈을 뜬 이후로 보았던 작은 손바닥은 이제 제법 자라 어른의 손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겉보기만 그럴듯할 뿐 그 손으로 거둔 무엇도 책임지지 못했다. 그는 맥없이 손을 떨구었다. 복잡한 상념을 담은 긴 숨이 입술 새로 흘러나왔다.

가족이 된 아이들을 지켜주기는커녕 직접 그 숨통을 끊고 비참한 말로를 지켜보았다. 마지막으로 살아남은 아이는 사령술사를 쫓는 사냥개로서 존재할 뿐이다. 이제 새롭게 소중한 존재들로 자리매김한 이들 역시 그런 식으로 잃고 싶지는 않았다.

하물며 여기에 새로운 사람을 ‘반려’라는 틀로 받아들여 감당해 낼 자신이 없었다.

‘지금은 내 마음 하나 다스리기도 벅차.’

모든 사람이 그를 대단한 현자, 이제는 완벽한 군주의 후계라 치켜세웠지만 그 안에 깃든 마음은 나약하기 그지없었다.

영토를 다스리는 군주에겐 그 핏줄을 이을 의무 또한 있다. 그 의무를 외면할 셈은 아니었지만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억지로 관계를 만들고 싶진 않았다.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어느샌가 와글와글한 정령들 틈바구니에서 빠져나온 카니가 그의 뺨에 살며시 손을 올리고 있었다. 선한 다홍빛 눈망울이 따뜻한 온기를 품고 휘어졌다.

「이그레트는 너무 걱정이 많아요. 좀 더 하고 싶은 대로 살아도 좋을 텐데.」

그 손길이 무척 포근하게 느껴져서 절로 눈이 감겼다. 피곤하단 말은 거짓 핑계가 아니었다. 잠에 빠져들락 말락 하는 애매한 경계선에서 그가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충분해.”

「뭐가요?」

“걱정할 수 있는 게 많은 지금이…….”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 없이 홀로 살았던 쓸쓸한 시간보다.

‘훨씬 좋아.’

시원한 바람이 그의 이마를 스치고 지나갔다. 동시에 실체화가 풀려 버린 자연계 정령왕들 대신 청룡 가야가 이불을 끌어다 목 끝까지 덮어주었다.

“주인은 왜 모를까?”

하늘을 담은 듯한 푸른 비늘이 가야의 피부 위로 신기루처럼 퍼져 나갔다.

곧 사람 팔뚝만 한 작은 청룡의 모습으로 바뀐 그가 꾸물꾸물 계약자의 발치에 몸을 둥글게 말고 누웠다.

「세상에서 단 한 사람만 걱정하면 된다는 게 얼마나 편한데.」

목소리 대신 정령들이 사용하는 파장으로 변한 청룡의 투덜거림을 들으며 슬금슬금 다가온 푸른 늑대가 조용히 그 곁에 자리를 꿰차고 엎드렸다. 그러자 포로록 날아든 유니도 동조를 표했다.

「역시 그렇지?」

「헤헤, 그렇다요. 완전 편하다요.」

이젠 완전히 한 식구가 되어버린 다섯 정령이 동시에 키득거리고 웃었다.

* * *

며칠 뒤, 하루도 빠짐없이 열리는 황궁 파티에 발길을 끊지 않는 황태자를 두고 암암리에 소문이 퍼졌다.

‘이번 한 달간 치러지는 황태자 전하의 성년식은 사실상 황태자비 간택 기간이다!’

대놓고 공표한 건 아니었지만 누구나 눈치껏 알아차릴 수 있는 상황이었다.

평소 파티라곤 눈길도 주지 않던 그가 특별한 목적도 없이 나흘간 연달아 파티장에 출현한 것만 봐도 그랬다.

덕분에 본래 파티를 즐겨하던 자들은 물론이고 대충 눈도장만 찍고 관심을 거두려던 모든 귀족이 발등에 불 떨어진 듯 안달하기 시작했다.

“자네, 내일 파티 초대장은 구했나?”

“당연하지. 한데 가문당 자녀는 1인까지 동반이 가능하다는군. 후우, 딸내미가 셋이나 되는데 어떤 아이를 보내야할지 통 정할 수가 없어.”

“나도 마찬가지일세. 조카딸이 둘인데 둘 다 빼어난 미녀라…….”

“듣자 하니 황태자 전하께서는 외모보단 지혜를 보신다 하던데.”

“에잉. 모르는 소리! 외모는 베이스고 지혜는 옵션일세.”

이런 대화는 이제 일상적이었다. 어지간한 미녀로는 황태자의 시선조차 사로잡을 수 없다는 걸 귀신같이 알아차린 귀족들은 이제 재색을 겸비한 여아들을 파티장에 들이밀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동안 뛰어난 재주를 가졌으나 레이디로서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 묻혀 있던 여성들이 속속들이 진가를 드러냈다.

황족의 반려로 간택받는 대상에는 일반적인 혼인과는 다르게 나이 제한이 없었으니 아직 성년식도 치르지 못한 어린 소녀에서부터 과년한 처녀에 이르기까지 나이대도 무척 다양했다.

그로 인해 황태자의 성년을 축하하는 파티장에서는 그동안의 파티와는 사뭇 다른 진풍경이 펼쳐졌고 때를 노려 줄을 대기 위해 파티를 찾는 귀족들도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이 모든 현상을 출현만으로 가능하게 만든 쥬다스는 파티가 시작된 지 열흘이 다 되어가도록 누구에게도 이렇다 할 특별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황태자비 후보로 딸과 조카 등을 밀어주는 귀족들의 긴장은 점차 커져만 갔다.

“그래서, 너는 왜 가지 않겠다는 것이야?”

그리고 한 영지에서도 같은 이유로 속 끓이는 사내가 있었다.

“크리스틴.”

가문을 이어받아 젊은 공작으로 자리매김한 신예 델피아 공작. 알시오스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며 자신의 여동생을 바라보았다.

파도치듯 아름다운 바닷빛 머리카락을 하나로 묶어 어깨선을 따라 늘어뜨린 크리스티나 R.델피아가 무표정한 얼굴로 찻잔을 들이켜고 있었다.

그녀는 새해를 맞아 모처럼 학생회 일정을 마치고 돌아와 휴식 기간을 갖는 중이었다.

오라비인 알시오스가 어렵게 구한 파티 초대장을 내밀었더니 단호하게 거절했다.

“전하께선 그런 생각이 아니실 겁니다.”

“그걸 네가 어찌 알고?”

“…….”

우아하게 테이블에 찻잔을 내려놓은 크리스티나가 답했다.

“그냥 감이에요.”

“하.”

어처구니없는 한숨이 끓는 기름처럼 툭 튀어나왔다. 그의 여동생은 감 운운하며 명확한 근거 없는 행동을 할 정도로 어수룩한 소녀가 아니었다.

오히려 철저하기로 치면 공작 위에 오른 알시오스 자신보다 더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예쁘고 똑똑한 여동생에게 부족한 것이라곤 단 하나, 상황을 어우르는 융통성.

철근처럼 딱딱하게만 굴어 혹여 세상 풍파에 부딪혀 부러지기라도 할까 걱정하던 때가 하루 이틀이던가.

알시오스는 억지로 미소 짓느라 경련이 일어나는 입가를 가까스로 진정시켰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다음 편으로 곧장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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