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그레트-233화 (233/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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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장. 성년식

“크리스틴, 내가 모를 줄 알아?”

“뭐를요?”

태연스레 대꾸하는 그녀가 예전의 그 새침데기가 맞나 싶다.

“요사이 뜬금없이 학생회 일을 시작하더니 황태자 전하의 성년식을 축하하는 파티에도 안 가겠다고? 언제는 말도 없이 가출을 하지 않나.”

“‘출가’입니다. 가출은 어린아이들이 허락 없이 집을 나갈 때 쓰는 용어지요.”

‘……결국 가출 맞잖아!’

울컥 목구멍까지 치솟아 오른 반박을 간신히 삼킨 알시오스가 진지한 표정으로 동생을 어르기 시작했다.

“어쨌든 아예 축하조차 드리지 않는다면 전하께서 서운해하시지 않겠니.”

‘서운…… 하실까?’

크리스티나의 푸른 눈동자에는 별달리 기대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녀는 꽃잎이 지듯 시선을 내리깔았다.

우아한 손길로 잔을 매만지곤 있었지만 자색 찻물이 흔들리는 것까진 감출 수 없었다.

무표정하던 얼굴에 이내 쓴 미소가 자리했다.

‘상상하지 말자.’

혼자 멋대로 상상해 봤자 전부 무의미하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마음에 둔 이는 정말이지 예측하기 힘든 남자였다. 어떤 면에서라도.

그간 티 내지 않으려고 노력한 게 무색해질 만큼 크게 동요하는 모습을 보이는 여동생을 보곤 알시오스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라 애매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크리스틴, 네가 처음 학교에 들어갈 때를 기억해?”

“루바흐 말입니까?”

“그 명문 루바흐에 입학하지 않겠냐는 추천서를 보자마자 네가 뭐라고 했게?”

루바흐 정식 입학 시기가 열 살이니 그때가 벌써 지금으로부터 딱 10년 전 일이었다. 크리스티나는 어렵지 않게 당시를 떠올려 냈다.

‘싫어요.’

어릴 적부터 그녀는 호불호가 강했다. 싫은 것은 칼같이 거절했고 좋은 것은 무슨 일이 있어도 해내야만 했다. 그게 바로 바쁜 부모님과 후계자 교육으로 집안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오빠 알시오스 사이에서 어렸던 크리스티나가 택한 생존방법이었다.

무조건 효율적으로, 무조건 뛰어난 모습을 보여야 칭찬받을 수 있다. 그래서 그녀는 더욱 잘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 그녀에게 있어 가족들과 멀어지기만 하고 불필요한 학습 과정으로 가득 찬 학교 따윈 방해였다.

“학교에 가봤자 시시하기만 할 거다, 차라리 집에서 개인교습을 받는 게 훨씬 빠르고 능률적일 거다, 뭐 그랬었던.”

“오라버니! 그땐.”

“맞아. 그땐 어려서 몰랐지?”

알시오스는 살그머니 입꼬리를 올렸다.

“세상은 절대 우리 생각대로만 돌아가지 않아.”

“…….”

“기대를 하든, 좌절을 하든. 당시엔 미처 생각지도 못한 일들이 모래밭에 숨은 조개껍데기처럼 무수히 많다는걸.”

고작 몇 해 앞서 태어난 형제였지만 알시오스에게선 한발 먼저 어른이 된 자로서 그녀에게는 없는 여유가 느껴졌다.

오라비의 웃는 낯에 기가 눌리고 만 크리스티나가 불만스럽게 입을 다물었다.

심통 난 고양이 꼴로 오도카니 앉아 있는 그녀를 두고 알시오스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번 파티가 네게 있어 좋은 기회가 될지도 몰라.”

“기회?”

제 오라비에게서 나오리라 생각지도 못했던 단어였기에 크리스티나의 눈매가 쨍하니 가늘어졌다.

‘무슨 기회? 내가 아는 오라버니는 분명 권력을 탐하는 성향은 아니었는데.’

그녀는 그동안 알시오스가 다른 귀족들과 달리 친족을 황태자비로 앉히는 일에 관심이 없으리라 추측하고 있었다.

이미 막강한 권력을 쥐고 있는 델피아 공작가에선 굳이 황가와 더 얽힐 이유가 없었다.

과한 욕심에는 그에 상응하는 책임이 따르게 마련이다. 현 황제의 첫 정실이었던 하윤 리가 어떻게 죽었는가.

호수 위에 떠있는 백조가 고고하고 아름답지만 물밑을 들여다보면 쉼 없이 허우적거리듯, 호화로운 겉과는 달리 실상 암투가 난무하는 황실이다.

황가에 충성을 바칠지언정 그 일원이 되어 전전긍긍하기엔 위험부담이 너무 컸다.

그래서 알시오스는 처음부터 여동생인 크리스티나가 황태자와 얽히는 일을 꺼려 했다. 적어도 크리스티나 본인이 느끼기엔 그랬다.

‘설마 눈치챈 걸까?’

수년 전부터 단 한 사람을 향한 외사랑에 일희일비하는 그녀를 봤다면 누구라도 알아차릴 수 있는 공공연한 비밀이었지만 연애초짜인 당사자는 그저 조마조마하기만 했다.

여동생의 경계 어린 눈빛을 받으면서도 알시오스는 꿋꿋하게 품에서 하얀 종이를 꺼내 들었다.

“여기 초대장이다.”

“아뇨. 괜찮습니다. 그분께선 제가 가지 않는 편이 더 편하실 겁니다.”

수상쩍긴 했지만 크리스티나는 일단 칼같이 거절하고 봤다.

“아니. 그분 말고.”

알시오스의 입에서 뜬금없는 이름이 튀어나왔다.

“수신자는 바이칼 B.드레이크. 네 절친한 친구가 보낸 초대장이야.”

“하아?”

누가 누구랑 절친하다는 건지. 그녀는 황당함에 저도 모르게 초대장을 손에 건네받고 말았다. 손에서 느껴지는 빳빳한 종이의 촉감에 표정을 굳힌 크리스티나가 초대장을 팔락 펼쳐보았다.

<귀하를 가면파티에 초대합니다.>

첫줄부터 기가 막혔다.

<크리스티나 님, 오기로 약속한 거 잊지 않았죠?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집에 계신 거 다 알아요. 성인식 기념으로 열리는 새해 첫 가면무도회! 엄청 신경 써서 준비해 놨으니까 꼭 오셔야합니다.>

서체를 읽고 있을 뿐인데 어쩐지 그 촐랑거리는 목소리까지 함께 들리는 느낌이었다.

마지막 줄까지 읽고 난 크리스티나는 결국 보호막처럼 얼굴을 장악하고 있던 무표정을 해제하고 푸훗 웃어버리고 말았다.

<추신 : 올 때 파도맛 사탕.>

파도맛 사탕은 바다를 끼고 있는 델피아 령 특산품이었다. 맛이 독특하고 강렬해 현지인이 아니면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이상하게 그녀의 친우들은 군소리 없이 잘 먹었다.

여기엔 여행 다닐 때마다 그 지방의 특산물은 맛보는 게 예의라며 억지로 일행들 손에 쥐어주던 쥬다스의 영향이 컸다.

오랜 친구라곤 하나 건방지기 짝이 없는 바이칼의 요청에 크리스티나는 탁 소리 나게 초대장을 접었다.

“갈게요. 가면파티.”

* * *

새해를 맞은 수도에는 갖가지 행사가 진행 중이었다.

그러던 중 황궁에서 열리는 파티 못지않게 많은 청춘남녀를 설레게 만든 파티가 하나 더 열렸다. 바로 드레이크가의 차남이 주최하는 가면파티였다.

참여자 불명. 참여인원 불명. 초대기준 또한 불명!

오로지 주최자 하나만 공개된 비밀의 파티. 이것이 바로 요즘 귀족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가면파티였다. 이 가면파티는 엄격한 예절을 따라 신분 기준으로 어울려야 하는 여타 파티와는 다르게 아예 신분 노출이 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많은 인기를 끌었다.

물론 작위가 있는 자들에 한해서 초대를 받는다는 일차적인 규칙은 있었지만 자세한 신상정보만큼은 철저히 비밀로 유지한다.

비밀은 신비감을 조성했고 신비감은 곧 기대감으로 변하여 설레면서도 편하게 즐길 수 있는 특수한 상황을 만들어낸 것이다.

“어서 오십시오. 초대장에 게재된 회원 인장을 검사하겠습니다.”

가면을 쓴 손님이 당도하면 입구에서 경비병들이 초대장을 받아 위조가 아닌 정품인가를 검사한다.

정품 여부는 바로 초대장에 찍혀 있는 초대 회원 인장으로 알 수 있다.

미리 인장을 찍을 때 사용한 잉크와 짝을 맞춰놓은 마법석을 가져다 대었을 때 녹색불이 뜨면 통과, 무반응이면 불통이다.

몰래 가짜 초대장을 만들어 난입하려는 자가 많아 입구에서 하는 검사인데 이 검사가 끝나면 추가 검사 없이 온전히 파티를 즐길 수 있게 된다.

포옹!

마법석에서 통과를 알리는 불이 들어오자 경비병들이 고개 숙여 손님을 맞이했다.

“환영합니다, 회원님. 안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마차에서 내린 귀족남성이 땅에 발을 딛자마자 기이한 일이 일어났다.

본래 오렌지에 가까운 노란계열이었던 남자의 머리 색깔이 눈 깜짝할 새 흑단같이 새까맣게 변해버린 것이다. 남자는 조금 놀란 눈으로 자신의 앞머리를 만지작거리다가 성큼성큼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뒤이어 도착하는 손님들도 전부 같은 과정을 겪었다.

“……그런데 왜 하필 흑발이지.”

“어허이, 왜긴 왭니까? 그야 흑발이 제일 간지 나니까요!”

‘재수 없긴 하지만.’

뒷말은 꿀떡 삼킨 바이칼이 간신처럼 헤헤 웃었다.

“아니 뭐, 가면파티라지만 결국 파티잖습니까? 파티에선 어떤 옷이든 잘 어울리는 게 중요한데 검은머리가 옷발이 잘 받더라고요.”

“그런가.”

의상 디자인이나 색깔 매치에 대해서는 일가견이 없는 에단은 영 모르겠다는 얼굴로 무덤덤하게 대꾸했다.

“본래 검은색이나 흰색은 어디에나 잘 어우러지는 기본 색상이니까요.”

따지자면 쥬다스의 은발도 탐나긴 했지만 은발은 황실의 색이니 함부로 놀이에 사용해서는 안 된다. 빨간색은 너무 강렬하고 파란색도 너무 화사해 이번 성년식 축하파티 분위기랑은 맞지 않는다는 의견이 나왔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검은색이 당첨되었다.

“근데 이거, 제가 지정하긴 했지만 사람들 머리가 전부 검은색이니까 꼭 해동에 온 것 같네요.”

바이칼은 검게 물든 머리카락을 어색하게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신분을 감추기 위한 장치 중 하나가 바로 이 변색 마법.

파티가 열리는 저택 전체가 거대한 마법진으로 구성된 최첨단 마법시설로, 저택 입구에 발을 들여놓기만 해도 즉각 머리 색깔이 미리 시전자가 지정해 놓은 검은색으로 변해버린다.

따라서 원래 밤색 머리카락이었던 바이칼은 이곳에서만큼은 흑발이 되었고 속속들이 도착하는 파티 참여자들도 남녀 가릴 것 없이 검은머리에 가면을 쓰고 입장하고 있었다.

머리색이 다 같고 얼굴까지 가면으로 가려 버리니 누가 누군지 전혀 알아볼 수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란이랑 백호님은 잘 지내시려나?”

“응, 잘 지내더라.”

답을 기대하고 중얼거렸던 건 아닌데 예상 외로 즉답이 돌아왔다. 가야였다.

에단과 마찬가지로 원래 검은머리였던 가야는 전혀 위화감 없는 기색으로 파티장에 섞여 있었다.

그는 심지어 지나가는 시종에게서 아이스와인 잔을 하나 집어 들어 시원스레 들이켜기까지 했다.

“며칠 전에 새해인사도 할 겸 안부차원에서 가봤는데.”

“그사이 해동까지 다녀오셨습니까?”

“어엉. 근데 야옹이 그 자식, 떠날 때 가지 말라고 찡찡거릴 땐 언제고 이제 와서 하는 말이…….”

가야의 손아귀에서 우드득 소리와 함께 포도주 잔이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꺼지래!”

주먹을 입에 물고 가련하게 부르짖어봤지만 바이칼은 떨떠름하니 그의 주먹 새로 흘러나오는 유리 가루에 시선을 주었다.

“예에. 그러셨습니까? 뭐 하긴 거기도 한창 바쁠 때이긴 하겠죠.”

계약자를 따라 천 년도 넘게 살아온 해동에서 떠나온 가야는 루바르잔 제국에 적응하는 동안 내내 고향을 그리워했다.

그러다 드디어 이번에 새해를 맞이하여 큰맘 먹고 계약자의 곁에서 떨어져 해동에 다녀왔다. 그러나 두 팔 벌려 환영해 줘도 모자랄 판에 백호는 할 일이 많다며 란과 함께 이리저리 바쁘게 뛰어다니고 있었다.

사령에 의해 망가진 나라를 복구시키고 안정화하는 데에 앞으로도 한참은 걸릴 거라고 했다. 가야는 그 이야기를 전하며 시무룩하게 어깨를 늘어뜨렸다.

“그러면서 도와줄 게 아니면 꺼지라고 했어.”

신수도 정령인지라 계약자와 멀리 떨어진 채로는 힘을 많이 사용할 수 없다.

제국으로 돌아가는 것도 유니의 도움을 받아야만 하는 가야로서는 그야말로 꿔다놓은 보릿자루마냥 시간만 죽이다 털레털레 돌아와야 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즐거운 주말 보내셨나요? ㅎㅎ

드디어 마지막 챕터(아마도), '27장 : 성년식'에 도달하였습니다.

첫 아이(?)가 손을 떠날 날이 얼마 안남았다니! 시원섭섭한 기분이네요. ㅎ

그럼 마침표를 찍는 날까지 잘 부탁드립니다!

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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