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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장. 성년식
가야는 울컥한 얼굴로 투덜거렸다.
“망할 흰털고양이 자식. 날 찬밥 취급하다니!”
그러는 본인은 호랑이를 고양이 취급하고 있었다.
5살 먹은 어린아이같이 구는 가야를 보며 에단과 바이칼은 그를 귀찮아하던 백호의 심정이 조금이나마 이해가 갔다.
바이칼은 진정하란 의미로 와인 잔을 하나 더 집어 그에게 건넸다.
“근데 왜 그 자리에선 화를 안 내셨습니까?”
“엉? 에이, 됐어. 뭐 화까지 낼 일인가 그게.”
‘지금 화내고 있잖아!’
대수롭지 않다는 듯 포도주를 홀짝이는 가야를 보며 바이칼이 할 말을 잃고 우두커니 섰다.
“화낼 타이밍에 화를 잘 못 내는 사람들의 특징은 말이다.”
그때 벽에 기대선 채 그들의 이야기를 잠자코 듣고 있던 쥬다스가 넌지시 입을 열었다.
“지독한 겁쟁이란다.”
“예?”
“어?”
듣는 이는 듣는 이대로, 당사자는 당사자대로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하늘의 청룡을 두고 감히 겁쟁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지금껏 아무도 없었다.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발상을 거침없이 입에 담은 쥬다스는 가면 너머로 조용히 웃었다.
“화를 낸 다음 돌아올 상대방의 반응이 무서워서 화낼 수가 없는 거란다. 겁쟁이들은 미움받는 것도, 자기가 화를 내서 상대방이 상처 입는 것도 견디기 힘들거든.”
길게 흘러내린 흑발이 평소보다 차분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은빛이 다정함을 담은 색상이라면 검정빛은 좀 더 무겁고 고요한 느낌을 준다. 그 사이로 맑은 금안이 부드럽게 세 사람을 담았다.
“그러니까 계속 속상한 채로 지내고 싶지 않다면 앞으론 좀 더 용기 내는 편이 좋겠지? 가야.”
“……푸흐, 주인이 그렇게 정곡을 찌를 때면 도저히 모른 척할 수가 없다니까.”
이번에는 부수지 않고 멀쩡히 잔을 비운 가야가 키들거렸다.
쥬다스와 계약하기 전에는 청룡이란 몹시 변덕스럽고 겉과 속을 알 수 없는 의뭉스러운 성격이었다. 좋으면 웃고, 싫으면 찡그린다는 정서 표현의 개념이 그에게는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심지어 마음에 들지 않을 경우 마주 앉아 웃으며 대화하던 사람의 목도 댕강 베어버리곤 했을 정도로 제멋대로였다. 그렇듯 청룡은 기분과 상관없이 늘 미소 지어왔고 때문에 그 웃음 뒤에 감추어진 진짜 의미를 모르는 사람들은 그를 무척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다.
백호가 같은 사방신수 중 청룡만큼은 치를 떨며 기피하던 이유였다.
하얀 털의 호랑이는 그를 향해 늘 속을 알 수 없어 친해지기 싫은 녀석이라며 발톱을 세우곤 했다. 그랬던 것이 쥬다스와 계약하면서 직설적으로 성격 구조가 변해버리긴 했지만 청룡이 가지고 있는 내면적인 특징까지 변화한 건 아니었다.
계약은 그의 겉모습을 바꾸었을 뿐, 그가 필사적으로 가리고 있던 약점은 바꾸지 못했다.
‘미움받기 싫어.’
누군가 자신에게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자체를 견뎌내기 힘들었다. 웃으면서 사람을 베는 이유도 그래서였다.
미움받고 싶지 않으니, 그 전에 먼저 상대를 세상에서 제거해 버린다. 잔혹한 결단이면서도 실상으론 겁에 질린 어린아이나 다를 바 없는 행동이었다.
‘어쩐지 별거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군.’
누구도 꿰뚫어 본 적 없는 나약한 속내를 다독거림받는 기분이 든 가야가 얌전히 입을 다물고 있자 바이칼이 헛기침과 함께 앞으로 나섰다.
“그것보다 지금은!”
여유롭게 서 있던 셋의 시선이 단숨에 그에게로 향했다.
“파티를 즐길 시간입니다. 언제까지 벽에만 붙어 계실 겁니까?”
“응? 아니, 난.”
“나중에 가서 이런저런 노력을 했노라고 말씀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입모양으로만 ‘폐하께’라고 덧붙인 그를 보며 쥬다스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이미 많은 참석자들로 채워진 홀에선 청춘남녀들이 합석하여 하하 호호 즐거운 분위기를 이끌어내고 있었다. 가면으로 정체를 가렸다곤 하나 파티장에는 친구들끼리 온 경우도 많아 서너 명씩 짝을 맞춰 대화하곤 했다.
마침 그들처럼 대화에 끼지 못하고 소심하게 벽에 붙어 있는 여성 무리를 발견한 바이칼이 씩 입꼬리를 올렸다.
“자고로 학교에선 공부를 하는 것이 미덕이며, 바다에 가면 물놀이를 해줘야 제맛. 마찬가지로 파티장에선 사교를 즐겨야 인지상정이죠.”
“자네는 학교에서도 공부를 하지 않은 걸로 아는데.”
“……그래서 제가 덕이 없었죠.”
에단의 따가운 지적에도 바이칼은 찰떡같이 반응했다. 실제 그의 학교성적은 처참했다.
“자, 출발합시다.”
척척 앞장서는 바이칼을 따라 벽에 기대 있던 쥬다스도 한숨을 뱉으며 걸음을 떼었다.
에단은 그를 곧장 뒤따랐고 가야는 와인잔을 든 채 자리에 남아 잘 다녀오라며 손만 휘적휘적 흔들어주었다.
한편, 시무룩한 얼굴로 검게 물든 머리카락만 손가락에 빙글빙글 꼬고 있던 소녀는 슬슬 아파오는 다리를 내려다보았다.
‘역시 괜히 왔어. 이런 파티.’
체칠리아 샬롯트, 그리 부유하지도 내세울 것도 없는 남작가의 무남독녀 외동딸로 올해 열여덟 살이 된 소녀다.
그녀는 학교를 다니지 못했고 매년 헌납할 만한 기부금도 없어 교황청에서 진명조차 받지 못했다.
아버지인 샬롯트 남작이 성년식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힘들게 구해온 초대장을 차마 외면할 수 없어 수도까지 올라오긴 했지만 하나도 즐겁지 않았다.
체칠리아는 얼굴을 덮은 갑갑한 가면을 만지작거리며 생각했다.
‘호화로운 식사를 하고 예쁜 옷을 입으며 멋진 남성과의 만남을 즐거워하는 자리. 나랑 전혀 어울리지 않잖아.’
그녀의 아버지는 하나뿐인 딸에게 황궁 파티 초대장을 구해다 주지 못한 사실만으로도 몹시 미안해했다.
체칠리아가 아무리 파티에 관심 없다고 이야기해 봤자 아버지의 죄책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어릴 적부터 흔한 인형꾸미기 놀이 한번 해보지 못하고 무너져 가는 집안을 일으키기 위해 얼마나 고생을 했던가. 시집이라도 제대로 보내주고 싶은 게 아비의 마음이었다.
하지만 체칠리아는 그런 마음이 부담스럽기만 했다.
‘오늘도 일손이 부족할 텐데.’
최근 들어 소소히 꾸려가던 상단 일이 잘 풀리면서 작업량이 늘었다.
성년식이고 나발이고 얼른 집에 돌아가서 밀린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초조해하던 그녀에게 누군가 다가온 건 그때였다.
“어머나, 이게 얼마 만인지요. 체칠리아 맞죠?”
“……?”
고개를 들자 수수한 드레스 차림의 그녀와는 대조적으로 갓 피어난 봄꽃처럼 화사한 연분홍 드레스를 입은 여성이 눈에 들어왔다.
가면을 써서 얼굴을 가리긴 했지만 그 살랑살랑한 목소리만큼은 낯익었다.
체칠리아는 반신반의한 어조로 물었다.
“이소타?”
“역시! 설마하니 또 누가 그런 구식을 입고 다닐까 싶었는데.”
“저거 작년에 이소타 생일파티에서 입었던 드레스 아니에요? 거기서 사이즈는 더 안 변했나 봐요.”
“색깔은 좀 변한 것 같지 않나요?”
다가온 소녀들 사이에서 꺄 하고 작은 탄성이 터졌다.
얼굴도 가리고 머리색도 바꾼 마당에 후줄근한 의상만으로 정체를 알아봤다는 놀림에 체칠리아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가난한 집 외동딸인 체칠리아와 다르게 지금 다가온 소녀 셋은 각자 한 재력 하는 집안의 영애들이었다. 나이는 전부 동갑으로 열리는 파티 때마다 동년배 무리로 마주쳤기 때문에 친구라 할 수는 없지만 제법 오랫동안 안면을 트고 지내온 사이였다.
그중에서도 가장 집안이 좋은 이소타는 그 무리의 공주님처럼 굴며 지금처럼 사사건건 체칠리아를 걸고넘어지곤 했다. 그 유치한 장난질에는 가난해도 늘 자신감 있게 살아가며 얼굴까지 예쁘장한 체칠리아를 향한 약간의 시기심도 섞여 있었다.
“왜 혼자 그러고 있죠? 우리랑 같이 다녀요, 체칠리아.”
“맞아요. 혼자 있으면 다가오는 남자도 없을걸.”
“여기선 무조건 일행이 있는 편이 유리하답니다.”
하나같이 다정한 목소리였지만 소녀들의 속셈을 뻔히 들여다본 체칠리아는 헛웃음을 지었다.
그나마 예쁜 얼굴을 가면으로 가려놓았으니 낡은 드레스며 빼빼 마른 몸, 굳은 살 박힌 손가락 등 더 보잘 것이라곤 없었다. 그들은 그녀를 데리고 다니면서 비교 대상으로 삼아 소위 ‘폭탄’으로 만들고자 하는 게 뻔했다.
더 못난 존재를 옆에 둠으로써 자신을 더 부각시키기 위한 폭탄. 그게 바로 체칠리아의 역할이었다.
“……그래요.”
하지만 알면서도 제안을 거부하지 못했다.
‘지금처럼 구석에서 시간만 죽이고 서 있느니 얘들을 따라 다니는 편이 낫겠지.’
수도에서 열리는 파티의 초대장을 구해왔다며 기뻐하던 아버지의 얼굴을 떠올리자면 가만히 서 있는 것도 죄스러웠다.
어차피 평생 단 한 번뿐인 성년식이다. 소녀들의 보일 듯 보이지 않는 놀림에는 신경 쓰지 말고 당당하게 파티를 즐기고 돌아가면 될 일이었다.
그리 생각한 체칠리아는 이소타의 곁으로 다가가 섰다. 낡은 드레스를 가지고 놀리면 수치스러워할 줄 알았던 소녀가 끄떡하지 않고 다가오자 이소타의 가면 너머 눈길이 차가워졌다.
“실례합니다, 레이디들.”
그 미묘한 신경전을 끊어낸 건 다름 아닌 바이칼이었다.
그녀들이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끼어들긴 했지만 실로 적절한 타이밍이 아닐 수 없었다.
“오늘은 열여덟 청춘들의 성년식을 축하하는 기쁜 날이지요. 파티는 즐거우십니까?”
“예, 물론. 흑색으로 맞춘 머리색하며 아름다운 실내 장식들이 그간의 식상한 파티들과는 다른 정갈한 느낌을 주는군요.”
당연하다는 듯 이소타가 대표로 나섰다. 고상한 태도의 그녀를 바라본 바이칼이 어깨를 으쓱하며 장난스레 말을 꺼냈다.
“그렇긴 한데 벽에만 붙여 있으려니까 벽걸이 액자가 된 기분입니다. 전부 다 얼굴을 가려놓으니 아는 척하기도 힘들고요.”
얼굴을 가려놨지만 체칠리아를 향해 아는 척한 이소타 일행은 애매한 웃음으로 답하고 말았다.
그 미묘한 흐름을 눈치채지 못한 바이칼은 제 일행을 눈짓하며 말을 이었다.
“보시다시피 이쪽은 남자들끼리만 와서요. 함께 자리를 빛내주시지 않겠습니까?”
“어머.”
소녀들의 시선이 세 남자에게로 향했다. 앞으로 나선 바이칼도 서글서글하니 좋은 인상이었는데 뒤에 선 둘도 느낌이 무척 좋았다.
‘특히 의상과 분위기.’
가면으로 정체는 가렸다지만 파티에 익숙한 소녀들의 예리한 눈썰미로는 그들이 가진 특징을 금방 잡아낼 수 있었다.
일단 연미복 자체가 고급스러웠다. 재력을 자랑하듯 일부러 화려하게 치장하여 눈길을 끄는 자들과 다르게 보석 장식 따위는 보이지 않았지만 쓰인 소재가 좋고 디자인이 깔끔했다.
비어 보이지 않게 깔끔한 디자인이란 어려운 법이다. 그 점에서 벌써 제법 고위 귀족이란 사실이 태가 났다. 정말 높은 사람들은 과한 치장을 하지 않는다.
게다가 앞에 나선 바이칼을 따라 다가오긴 했지만 여자들에게 안달하지 않는 차분한 분위기가 있었다.
그 두 가지 특징만으로도 소녀들은 충분히 세 남자의 대시에 만족했다.
“좋아요.”
이소타가 생긋 웃으며 수락의 뜻을 표하자 다른 소녀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 넷에 남자 셋, 딱 맞는 비율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어울리지 못할 숫자도 아니었다.
곧 그들은 함께 음식이 진열된 파티장 내부로 이동하여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가면파티는 처음이시라고요?”
“네. 후후, 부모님이 이런 쪽에선 엄격하셔서.”
‘엄격하시겠지. 오히려 파티에 참가하지 않으면 혼내실지도.’
가면파티는 물론이고 유명하다 싶은 파티에는 늘 참석해 온 이소타였다.
입술에 침도 바르지 않고 거짓말하는 이소타를 힐끗 쳐다본 체칠리아가 열심히 그릇에 요리만 담았다.
파티 음식은 뷔페식이었다. 돌아다니면서 먹을 음식을 고르고 파티테이블로 가 앉아서 식사를 즐길 수 있다.
‘밥은 맛있네. 이럴 때 많이 먹어야지.’
집에 가면 꿈도 꾸지 못할 식단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그녀는 평소 먹고 싶었던 초콜릿 케이크와 희귀한 과일 위주로 푹푹 퍼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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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y. 공든탑
더웡... 다음편으로 바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