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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장. 성년식
고급 레스토랑에 왔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한결 편했다. 어차피 체칠리아는 여기서 운명의 상대를 만날 거란 기대감 따위는 손톱만큼도 하지 않았다.
“초콜릿 스테이크?”
대충 다 담았다 싶을 무렵 그녀의 눈에 들어온 건 그 이름도 생소한 초콜릿 스테이크였다.
다크 초콜릿을 고기 위에 얹어 익힌 요리였는데 까무잡잡한 색상하며 특이한 향내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헤에. 수도에서 열리는 파티에는 신기한 요리도 많구나. 도전해 볼까?’
호기심이 많은 체칠리아는 생전 처음 보는 스테이크를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하지만 그건 별로 좋지 못한 선택이었다. 그녀가 막 요리를 담으려던 찰나 공교롭게도 누군가 그녀의 팔을 치고 지나간 것이 화근이었다.
툭!
불길한 효과음과 함께 미끄러진 스테이크가 소스를 튀기며 제자리로 돌아갔다.
딱히 음식을 흘리거나 그릇을 깬 건 아니라 이목이 집중될 일은 아니었으나 문제는 그녀의 옷에 있었다.
“아.”
하필 소스가 튄 곳이 그녀의 소중한 드레스 앞섶이었다. 하얗던 옷자락에 거무튀튀한 초콜릿 소스가 묻은 걸 본 체칠리아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버리고 말았다.
그냥 낡은 드레스를 입고 온 것과 음식물을 묻혀 더러워진 옷을 입고 있는 건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이소타가 아니라 다른 누가 보더라도 크게 망신을 당할 수 있다. 심지어 그녀는 갈아입을 옷도 준비해 오지 못했다.
체칠리아는 이쯤에서 쥐도 새도 모르게 파티장을 빠져나가야 하는 건지 일단 자리로 돌아가 일행에게 양해를 구해야 하는 건지 판단하지 못하고 우물쭈물 망설였다.
‘하아, 난 왜 항상 이 모양일까.’
절로 자괴감이 들었다. 애써 태연한 척 서 있긴 했으나 머릿속이 다 하얘지는 기분이었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돌처럼 굳은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가 있었다.
“체리 님?”
“……!”
가면파티에선 신상을 숨기는 규칙이었기 때문에 참석자들은 사이에선 서로의 본명 대신 가명을 사용했다.
그리고 ‘체리’라는 건 체칠리아가 사용하고 있는 가명이었다. 가명을 불린 그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러나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자신을 부른 이를 향해 돌아섰다.
“……네. 쥬드 님.”
“음, 오래 자리를 비우신다 싶었는데 여기 계셨군요.”
파티자리에선 자신을 ‘쥬드’라 소개한 쥬다스였다. 분명 옷에 묻은 소스 자국을 보았을 텐데도 그의 목소리엔 놀람이나 조롱기가 없었다.
“저, 죄송합니다.”
“……?”
“제가 자리를 오래 비워서. 이렇게 찾으러 오실 정도라면 혹……. 분위기가 많이 안 좋나요?”
우울함에 땅을 파고 들어갈 듯이 보이는 체칠리아를 향해 쥬다스가 멀뚱히 시선을 주었다. 이내 곧 의문점을 알아낸 그가 조그맣게 아 하는 소리를 냈다.
“그건 아닙니다. 저도 어쩌다 보니 오늘 하루 종일 속이 비어서.”
“에?”
“배가 고파 식사를 좀 가지러 온 겁니다. 체리 님처럼.”
빙긋이 웃는 입매에 체칠리아의 얼굴이 뒤늦게 달아올랐다. 당연히 그가 자신을 찾으러 왔다고 여겼는데 혼자만의 착각이었다.
우울하게 초콜릿이 묻은 자국으로 시선을 떨어뜨리는 체칠리아를 가만 쳐다보던 쥬다스가 쌓여 있던 접시를 하나 집어 올리며 그녀의 귓가에 살짝 속삭였다.
“그 자국 때문에 곤란하신 겁니까?”
체칠리아는 입술을 깨물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상한 목소리에 어쩐지 애처럼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하면 잠시 실례를.”
“어, 네. 네?”
파아앗!
그의 손끝에서 은은한 푸른 기운이 일렁이나 싶더니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다.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 손끝만 바라보고 있던 체칠리아는 문득 자신의 드레스에서 음식물 자국이 깔끔하게 사라져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 이게 어떻게 된.”
쉿, 하고 조용히 해달라는 사인을 보내는 쥬다스를 보며 그녀는 합 입을 다물었다.
‘마법인가? 아님 정령술?’
아무리 이능에 대해서 무지한 체칠리아라도 알 수 있었다.
순식간에 옷에 스며든 음식자국을 깨끗이 지워내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 정체가 무엇이 되었든 상대가 밝히고 싶지 않은 능력을 큰 소리로 감탄하며 떠벌릴 생각은 없었다. 그녀는 작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감사합니다.”
솔직하게 감사를 표해오는 소녀에게 쥬다스는 대수롭지 않은 태도로 응수했다.
“별말씀을.”
“하마터면 이대로 집에 돌아가야 할 뻔했어요.”
안심이 되자 자연스레 뒷말이 더 흘러나왔다.
“여벌의 드레스는 챙겨오지 못했거든요. 파티를 시작하자마자 그냥 집에 돌아갔더라면 부모님께서 크게 실망하셨을 거예요.”
“실망이라. 체리 님 스스로는 어떠셨을 것 같습니까?”
“저는…….”
늘 가족을 위해 살아온 체칠리아는 이번 파티도 역시 부모님의 뜻에 따라 나왔을 뿐이다. 미처 생각지도 못한 자기 자신의 감정을 처음으로 돌아본 그녀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러게요? 저도 속상했을 것 같아요. 이상하네요, 별로 즐겁지 않았는데.”
“파티를 싫어하십니까?”
“핫. 아니요, 그게 아니라.”
주책없이 오늘 처음 본 남자 앞에서 파티가 즐겁지 않다는 속내를 꺼내 보이고 만 체칠리아의 표정이 꼭 조금 전 음식물을 드레스에 흘렸을 때만큼 굳어버렸다.
“할 일이.”
“흠?”
“해야 할 일이 많아서요. 집에 가면 또 밀린 일이 잔뜩 있어서…….”
“그렇군요. 확실히 일이 많으면 머릿속이 복잡해지죠.”
“네, 정말 그래요. 쥬드 님도 할 일이 많으신 편인가요?”
그는 체칠리아의 이야기를 들어주며 차곡차곡 그릇을 채웠다. 하루 종일 끼니를 챙기지 못한 바람에 배가 고팠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성년식이라고 해서 할 일이 줄어든 것은 아니니까.’
오히려 할 일은 늘었다. 행사는 행사대로, 군주의 후계자로서 해야 할 업무는 업무대로 쌓여 있어 주야장창 바쁘기만 했다. 황제는 쥬다스가 성인이 되자 본격적으로 그를 실무에 가담케 함으로써 교육시키고 있었다.
아예 식사 시간까지 없는 건 아니었지만 워낙 바쁘다 보니 입맛이 돌지 않아 끼니를 거르고 있던 와중이었다.
「팍팍 좀 담아. 팍팍 좀.」
「맞아요. 요즘 바쁘다고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있잖아요? 걱정되게.」
「맛있는 거 많이 먹으라요.」
다른 사람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그의 주변에선 정령들이 야근하는 아들을 본 엄마처럼 잔소리해 대고 있었다.
그들의 성화에 못 이겨 몇 스푼 더 음식을 담은 쥬다스가 태연한 얼굴로 체칠리아의 질문에 답해주었다.
“할 일이야 많지요. 지금도 일차원에서 나와 있는 거기도 하고.”
“일이요? 저어, 파티는 놀려고 나오는 거 아니었나요?”
“그렇습니까?”
“그럼요. 사람도 만나고, 맛있는 것도 잔뜩 먹고. 즐거운 마음으로 일 생각 없이…… 어음.”
말을 할수록 자기 자신도 영 즐기고 있지 못하단 생각에 목소리가 우물우물 작아졌다.
그 나잇대 소녀다운 귀여운 어수룩함에 쥬다스는 작게 웃고 말았다. 아주 작은 웃음소리였는데도 무척 듣기가 좋아 체칠리아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파티에 참석한 누구나와 마찬가지로 가면에 가려진 얼굴이 조금 아쉽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두 사람이 테이블로 돌아오자 담소를 나누고 있던 일행의 시선이 그들에게로 쏠렸다. 에단과 바이칼이야 모시는 주군의 거동이니 반사적이다시피 쳐다본 거지만 이소타와 그녀의 친구들은 의도가 있었다.
‘뭐야. 왜 둘이 같이 돌아와?’
그녀들이 체칠리아를 일행 안에 포함시킨 건 폭탄으로 쓰기 위해서였다.
남자들의 관심을 받는 건 체칠리아가 아니라 그녀들이어야 했다. 게다가 쥬다스는 이소타가 가장 눈여겨보고 있던 대상이었다.
‘하여간 옛날부터 얄미운 계집애.’
파티 자리에서 굳이 음식을 가지러 떠난 체칠리아를 격식 없다는 뉘앙스로 내리깔려고 했는데, 하필 그가 그녀를 따라 자리를 비웠다. 보란 듯 사이좋게 자리에 앉는 체칠리아를 노려보던 이소타의 귓가에 쥬다스가 묻는 소리가 들렸다.
“다른 분들은 식사를 하지 않아도 괜찮으십니까? 이거 참, 저희끼리만 먹으려니 조금 면구스럽습니다.”
‘저희끼리…….’
별 뜻 없이 한 표현이었지만 두 사람의 표정이 달라졌다. 체칠리아는 어쩐지 부끄러워져 후다닥 고개를 숙였고 이소타는 가면 너머로 인상을 찡그렸다.
그러나 이내 아무렇지 않은 듯 생긋이 웃으며 답했다.
“레이디들은 원래 저녁을 일찍 먹는 경우가 많지요. 미리 먹고 왔으니 신경 쓰지 마시고 편히 드세요.”
“…….”
마치 지금 식사를 하고 있는 체칠리아는 레이디의 교양도 모르는 무식한 여자라는 뜻과도 같았다.
그러한 교묘한 비하 발언을 알아본 쥬다스는 흔들림 없이 대꾸했다.
“배려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만찬 시간이 지나면 곧 댄스홀도 개방될 터인데 움직이다 보면 허기가 질 수도 있을 겁니다.”
파티에는 엄연히 순서가 있었다. 초대받은 손님들이 다 입장할 때까지는 가벼이 배를 채우며 담소를 나누는 만찬 시간이 주어진다.
뒤이어 남녀가 어우러져 파티를 즐길 수 있는 메인이벤트, 댄스타임이 시작되면서 파티 분위기는 본격적으로 무르익게 된다. 쥬다스는 이 댄스타임을 언급하며 날선 분위기를 다듬어주었다.
“그러니 레이디들께서도 타인의 시선을 불편하게 여기지 마시고 마음이 동하신다면 언제든지 즐기시길 바랍니다.”
어느 누구도 탓하지 않고 편안하게 들을 수 있도록 해주는 그의 언변에 이소타는 물론이고 고개 숙인 체칠리아까지 미소 지었다.
“파티란 그런 자리니까요.”
그리 말을 맺고 나니 더없이 안락한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가면에 얼굴이 가려지긴 했지만 합석한 여성 넷의 시선이 모조리 쥬다스에게로 향한 걸 깨달은 바이칼이 뒤통수를 긁적였다.
‘그나저나 전하께선 목석처럼 계실 줄 알았더니, 의외로 능숙하시잖아?’
내내 속으로 어떻게 도와드려야 하나 고민했던 게 무색할 정도로 쥬다스는 능숙하게 그녀들을 대하고 있었다.
‘아니지. 어쩌면 능숙한 게 당연하신 걸지도.’
그랬다. 생각해 보면 쥬다스는 루바흐에 다닐 적에도 절대 인기가 없는 편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를 선망하고 경애하는 학생들이야말로 차고 넘쳤다. 백로황자라 조롱받던 시기에서 벗어나 완벽한 황태자의 모습으로 되돌아왔을 때,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어린 학생부터 선생들까지 전부 그에게 매료되었다.
특히 여성들 가운데선 가히 신드롬에 가까운 인기를 얻었었는데 그게 전부 짝사랑으로 끝났을 뿐 애정공세로 이어지지 않은 까닭은 단 하나였다.
‘‘황태자’니까 가까이 못 가는 게 당연하지.’
아무리 좋아도 감히 범접할 수가 없다. 먼저 말을 거는 자체만으로도 힘든데 평범한 소녀들이 일방적인 감정을 고백하고 강요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루바흐에 다닐 적에는 마치 모두가 지켜줘야 할 보배 같은 느낌으로 바라보기만 했다. 바로 그 장벽이 허물어진 지금은 과감하게 곁으로 다가갈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된 셈이었다.
어쨌든 그가 또래 소녀들과 편하게 대화하는 모습을 본 바이칼은 한 가지 더 깨달음을 얻었다.
‘역시 전하께서는.’
저 허허로운 웃음, 긴장 따위 개미눈물만큼도 엿보이지 않는 의연한 식사장면, 자신을 보며 얼굴을 붉히는 소녀들에게도 전부 똑같이 대하는 자상한 태도까지.
‘……전혀 이성으로 대하고 있질 않잖아!’
딱 어린아이를 대하는 어른의 자세였다. 바이칼은 울고 싶은 얼굴로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쉬어가는 코너 같은 챕터입니다.ㅎ
오늘은 광어회랑 맥주를 먹었습니다. 광어회는 사랑입니다.... 어으으 밤인데 너무 덥네요. ㅠ.ㅠ 눈왔으면 좋겠다!
그럼 다음 편에서 다시 뵙겠습니다.
늘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