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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장. 성년식
“칼 님? 갑자기 왜 그러세요?”
“아뇨. 그냥 좀. 눈에 먼지가 들어가서…….”
크흡, 코를 훌쩍인 바이칼이 손바닥에서 얼굴을 떼고 힘없이 대꾸했다.
과연 주군은 강했다. 이 가면파티에 들인 모든 노력이 허사였음을 깨달은 바이칼은 세상 다 산 노인처럼 공허해졌다.
그의 좌절감과 상관없이 소녀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까르르 웃었다.
“자아! 이 자리에 모여주신 귀한 손님 여러분, 다시 한 번 환영합니다. 저는 파티 진행을 맡은 레이칼 H.드레이크랍니다.”
모인 객들의 식사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었다 싶을 무렵, 갑자기 파티장 단상에서 누군가 마력확성기를 사용해 큰 소리로 인사했다.
청년의 유쾌한 소개를 들은 손님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파도처럼 번졌다.
“레이칼?”
“드레이크가 수장의 후계자로군.”
“하지만 이번 파티 주최자는 차남인 바이칼 경 아니었나?”
그 혼란을 잠시 지켜본 진행자가 박수를 짧게 끊어 쳐서 이목을 모았다.
“주최자는 제 아우인 바이칼이 맞습니다. 다만 그 아이 역시 손님들 사이에서 즐기고 싶다고 떼를 써서 제가 대신 진행자로 나왔죠.”
“……!”
다들 그러려니 고개를 끄덕이는 가운데 바이칼만이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즐기고 싶다고 떼를 썼다 기보단 주인에게 짝을 만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마련해 주고자 하는 중차대한 사명감을 띠고 이 자리에 있는 것뿐이다.
바이칼이 진행자로서 주구장창 옆에 붙어 있다면 쥬다스의 정체를 유추하는 게 몹시 쉬워진다.
그렇기 때문에 진행은 형에게 맡기고 일행으로 합류한 것인데 형제끼린 닮는다고 레이칼은 그걸 또 놀려먹고 있었다.
“아무튼 이제 파티 분위기엔 많이들 적응하신 것 같은데요. 슬슬 본격적으로 진행을 해볼까 합니다.”
웅성거리는 소리는 좀 더 커졌으나 그런 소극적인 태도는 진행자가 원했던 반응이 아니었다.
레이칼 H.드레이크는 대놓고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다시 확성기를 입에 가져다댔다.
“저기요? 여러분, 여기가 어디?”
“……가면파티?”
잠잠한 반응에 다시 실망하려던 찰나 누군가 소심하게 답을 내어놓았다. 레이칼은 손가락을 딱 퉁기며 곧장 반응했다.
“맞습니다. 가면파티장이죠. 여기선 품격을 지킬 필요가 없습니다. 평소 자신을 무장하고 있던 품위 유지! 소심함! 다 집어던지세요.”
이쯤에서 잠시 멈칫한 레이칼은 은밀한 어조로 주의사항을 추가했다.
“아, 물론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주셔야 하겠지만요. 안 그러면 나중에 집안싸움 납니다. 어느 날 갑자기 공작각하께 불려가도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하하하.”
아직 귀족적인 품위를 시원하게 집어던지진 못했어도 진행자의 너스레를 보자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졌다.
레이칼은 과장되게 어깨를 으쓱이며 계속 파티를 진행했다.
“어휴. 이렇게 미적지근해서야 재미 하나도 없는데요. 박수라도 좀 보내주시죠.”
그러자 절도 있는 박수갈채가 터져 나왔다. 귀를 기울이는 동작에 박수 소리는 좀 더 커졌다.
어느 정도 반응이 돌아온다 싶어지자 레이칼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휘저었다.
“그럼 분위기를 좀 더 풀기 위해 퀴즈 몇 개 나갑니다! 정답자에게는 무려 탐나는 상품도 마련되어 있습니다. 정답을 맞히실 땐 ‘정답!’ 하고 크게 외쳐주시면 됩니다.”
퀴즈란 말에 지켜보던 이들의 눈이 흥미롭게 빛났다. 상품이 걸린 퀴즈란 귀천을 가리지 않고 호응을 이끌어내며 즐길 수 있는 좋은 행사 미끼였다.
“첫 번째 문제입니다. 읽다가 지치는 책은?”
‘읽다가 지치는 책?’
사람들은 일제히 골똘해졌다. 누군가 재빠르게 손을 들었다.
“정답!”
“예, 정답은요?”
“세계역사서!”
“아쉽지만 틀렸습니다.”
틀리긴 했지만 한번 도전자가 나타나자 눈치만 살피던 손님들이 슬금슬금 뒤를 이어 손을 들기 시작했다.
“정답! 경제학개론.”
“땡. 틀렸습니다.”
“정답! 제국사 바로알기!”
“아닙니다.”
“마법의 정석?”
“땡, 땡, 땡!”
오답이 속출했다. 쥬다스가 앉아 있던 테이블에서도 소녀들이 답답한 얼굴로 조잘거리기 시작했다.
“아이 참, 문제가 정말 어렵네요.”
“이건 명문 루바흐를 졸업한 분들에게 유리한 문제가 아닐까요? 보통은 읽다 지칠 정도로 책을 읽지 않으니까요.”
‘저 형이 어려운 문제를 낼 리가 없는데.’
정작 파티의 주최자인 바이칼은 의심스러운 눈으로 제 형을 훑어보았다.
레이칼이 엘리트로 루바흐를 졸업한 우등생인 건 맞았지만 대세에 맞지 않게 뜬금없이 아주 어려운 문제를 낼 리는 없다는 확신이 있었다.
게다가 레이칼은 평소에도 그다지 진지한 인간은 아니었다.
그 와중에 진지하게 퀴즈를 풀기 위해 골몰하던 체칠리아가 문득 고개를 돌려 쥬다스를 쳐다보았다.
가면에 가려져 표정은 알아볼 수 없었지만 특유의 차분한 분위기는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였다. 그는 그저 테이블에 손을 얹고 턱을 괸 채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체칠리아는 자기도 모르게 그를 향해 말을 걸었다.
“쥬드 님은.”
“응?”
의아한 음성을 듣고 나서야 아차 싶었지만 이미 말은 입에서 떠난 후였다. 그녀는 기왕 말을 건 것 끝까지 물어보기로 했다.
“퀴즈의 답을 알고 계시는 건가요? 그게, 어쩐지 여유로워 보이셔서.”
정말 궁금하다는 애절함이 묻어나는 어조였기에 쥬다스는 잠시 침묵하다 자세를 바로 했다.
그리고 그녀에게 직접 답해주는 대신 손을 들어올렸다.
“정답.”
“말씀하십시오.”
“지침서.”
순간 침묵이 흘렀다. 사람들은 멍한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다 이윽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잠시 후 진행자가 꼭 바이칼과 닮은 미소를 씨익 지으며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그렸다.
“예잇, 정답입니다! 읽다가 지치는 책은 ‘지침서’였습니다. 당연히 지치니까 지침서죠! 크하핫!”
“우우.”
감탄인지 탄식인지 모를 소리가 군중을 휩쓸었다.
“자자, 진정들 하시고. 첫 정답자께는 상품이 마련되어 있습니다만, 더 도전해 보실 수 있습니다. 다음 퀴즈를 푸는 데에 성공하신다면 훨씬 더 좋은 선물을 드리지요. 대신 실패하시면 보상은 없던 걸로.”
“흠.”
“도전하시겠습니까?”
“그러죠.”
이미 군주의 후계자인 그가 백작 가에서 마련한 상품을 탐낼 이유는 없었지만 그는 기어이 도전을 신청했다.
도전을 받게 된 진행자는 주먹을 콱 움켜쥐며 열띤 목소리로 퀴즈를 계속해나갔다.
“조개가 웃으면?!”
“쪼개.”
정답을 바로 맞혀서인지 정답 자체가 분노를 유발하기 때문인지 분위기는 한층 더 살벌해졌다.
그러나 도전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들깨를 먹으면?”
“술이 들깨.”
“부부가 산에 오르면?”
“쁏.”
그야말로 거침없는 행보였다. 정답 중 몇 가지는 듣는 이로 하여금 해석을 필요로 하기도 했다.
기어코 마지막 퀴즈까지 탈탈 털어버린 쥬다스를 향해 레이칼이 감동의 눈길로 힘차게 박수쳤다.
“크윽! 회심의 난센스 퀴즈를 최종단계까지 클리어하시는 분이 나오시다니! 이거 놀랍습니다. 자, 상품은 테이블로 전달드렸고 이번엔 난센스 말고 진짜 퀴즈입니다. 다들 잘 듣고 방금처럼 정답을 외쳐 주십시오.”
“오오오!”
쥬다스의 활약으로 완전히 파티에 대한 긴장이 풀려 버린 사람들은 훨씬 더 적극적으로 레이칼의 진행에 호응하기 시작했다.
그사이 드레이크가의 하인으로부터 상품을 전달받은 쥬다스를 에단과 바이칼이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쥬…… 드 님.”
“왜들 그러십니까?”
상품은 드레이크 가문 문양과 이번 파티를 상징하는 가면이 함께 찍혀 있는 고급 찻잔세트였다.
모르는 척 컵 하나를 손에 들고 빙글빙글 돌려보는 그를 향해 바이칼이 허탈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런 무시무시한 개그, 아니, 난센스는 어디서 배우신 겁니까?”
“글쎄요, 인생 경험에서?”
“…….”
그렇다는데 더 할 말이 없었다. 감히 주군의 인생까지 논할 수는 없었던 바이칼은 입을 꾹 다물어 버렸고 에단이야 늘 그렇듯 그러려니 싶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들은 몰랐지만 쥬다스의 곁을 지키던 정령들은 하나같이 웃음보따리가 빵 터져 있었다.
「키키키키. 쪼개래, 쪼개.」
「이거 재밌다요! 다른 거 또 없다요?」
「으헤헤, 지금은 사람이 많잖아. 있지, 나중에 우리끼리 있을 때 퀴즈 내달라고 하자.」
「그게 좋겠네요! 완전 기대돼요.」
정령들은 말장난을 무척이나 즐거워했다. 말은 안 했지만 과묵하게 굴던 푸른 늑대도 은근히 기대감 어린 표정으로 계약자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살랑거리는 꼬리를 발견한 쥬다스가 웃음을 참으며 나중을 기약하였다.
어느덧 퀴즈도 막바지에 달하고 있었다. 실컷 농익은 분위기를 눈대중으로 재본 레이칼이 다음 순서로 넘어갔다.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시던 댄스타임이 코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어디 보자. 다들 아까보다 분위기가 훨씬 좋아지셨네요. 어떻습니까, 즐길 준비됐습니까?”
“이예에에!”
이젠 굳이 유도하지 않아도 척척 호응이 터져 나왔다. 레이칼은 들뜬 손님들을 더 기다리게 하지 않고 곧장 댄스홀 개방을 명했다.
“파티는 이제 시작입니다! 저를 따라 밖으로 나와 주세요!”
실내에서 음식과 함께 즐기던 파티와 다르게 댄스홀은 실외 정원에 설치되어 있었다.
날씨는 맑았지만 하늘 높이 설치된 천막과 풀벌레를 방지하기 위한 거대 마법진, 그리고 마법으로 반짝이는 효과를 부여한 색색의 꽃들이 밤의 정원을 수놓았다.
거기에 미리 대기하고 있던 이름 높은 초대악단이 아름다운 연주를 시작했고 빠른 템포의 멜로디를 따라 조명이 파박 하고 터져 나왔다.
“와, 이런 파티는 처음이에요.”
바깥 경취를 둘러본 이소타가 아까 파티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며 내숭 떨었던 건 깜빡 잊고선 감탄했다.
하지만 아무도 그 점에 신경 쓰는 이는 없었다. 얕은 잔디 위로 깔린 꽃밭과 알록달록 주변을 물들인 조명만으로도 이미 시선을 빼앗기기엔 충분했다.
“이번 가면파티의 칼라코드는 블랙. 마법효과로 인해 전부 머리카락을 검은색으로 물들이셨죠. 따라서 컨셉은.”
특이한 정원 댄스홀을 구경하면서 신기해하는 손님들을 향해 레이칼이 중대한 발표를 하듯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블랙레이디’입니다.”
“블랙…… 레이디?”
머리색이 검게 변한 건 남녀가 모두 같았다. 하지만 굳이 레이디의 앞에만 블랙을 붙인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레이칼의 얼굴에 짓궂은 장난기가 떠올랐다.
“춤 신청은 무조건 레이디 먼저! 남성에겐 선택권이 없습니다.”
“허어?”
그동안의 고정관념을 완전히 박살 내는 파티 컨셉이었다.
일반적으로는 남성이 여성에게 춤 신청을 한다. 신청을 받은 여성은 이를 거절할 수야 있지만 상대의 명예를 생각하여 어지간해서는 응해주게 되어 있다.
그런데 이 가면파티에서는 얼굴을 가려놓아 서로 신분을 알 수 없으니 떨어질 명예가 없었다. 그렇다는 건 즉 여자들이 자유롭게 상대를 고를 수 있다는 뜻이고, 춤 신청을 받는 남자 측에겐 선택권이 없기 때문에 거절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파티에 참석한 손님들의 당황한 시선을 받으며 레이칼은 목검을 들고 마당을 뛰는 아이처럼 방글방글 웃었다.
실제 바이칼보다 4년이나 앞서 태어난 성인이었지만 그 안에 반짝이는 장난기는 동생과 쌍둥이처럼 똑 닮아 있었다.
‘하이고야, 블랙레이디라니. 형님다운 발상이군.’
늘 영특하고 재치 있는 사고를 하며 우수한 성적으로 루바흐를 졸업한 레이칼다운 진행이었다.
이 파티장에서만큼은 여성들이 늘 보호받아야 하는 청순한 레이디의 이미지에서 탈피하여 남자를 직접 선택하는 진취적인 모습으로 변화한다.
그야말로 매혹적인 검은 꽃, 블랙레이디가 아닌가!
작게 휘파람을 분 바이칼은 모처럼 제 형의 똘끼를 응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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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y. 공든탑
아이고 늦었습니다;;
완결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 새벽 중에 최종화까지 업로드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