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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장. 성년식
남성 참가자들에게선 의외로 반발이 적었다.
어차피 가면을 쓰고 있기도 했고, 늘 용기 내어 신청 하던 입장에서 받는 입장이 되자 굉장히 신선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들에겐 지금 이 가면파티 자체가 평범한 일상을 탈피하는 이벤트였다.
“춤을 신청하실 때는 상대가 명찰로 달고 있는 ‘가명’을 불러주시면 됩니다.”
파티 참여자들은 각기 자신의 가명이 적힌 명찰을 가슴팍에 달고 있었다.
멀리서는 잘 안 보여도 춤을 신청할 정도로 가까이 다가가면 누구나 읽을 수 있는 명찰이었다.
“그럼 마음껏 즐겨주시길 바랍니다.”
진행자의 깔끔한 인사와 함께 배경음악이 바뀌었다. 빠른 템포의 신나는 음악에서 살짝 느려진 곡조가 정원에 울려 퍼졌다.
겨울 밤하늘은 시리고 추웠지만 댄스홀로 꾸며진 정원에는 따뜻한 불의 마법구가 마련되어 있어 바깥공기의 상쾌함과 아른아른한 따뜻함이 동시에 느껴졌다.
「머리 잘 썼네.」
「우잉? 뭐다요?」
「봐. 분위기가 순식간에 달라졌잖아.」
유니가 주변을 빙글 가리켰다. 조금 전까지 퀴즈 정답을 맞추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던 열정이 미묘하게 이어져 낯선 사람에게도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용기로 변했다.
음악, 조명, 그리고 실내에서 실외로 옮겨가는 개방적인 장치까지.
블랙레이디라는 특이한 규칙에 쉽게 적응할 수 있는 로맨틱한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마련된 셈이다.
「한마디로 저 레이칼이란 사람이 완급 조절을 잘하는 진행자라는 거지.」
「분위기를 활용할 줄 아는 사람이네요. 이런 면에서는 바이칼 꼬마와는 확실히 다른 게 느껴져요.」
쥬다스의 어깨에 꼭 달라붙어 있던 카니가 배시시 웃었다.
정작 바이칼은 정령들이 자기 얘기를 하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모른 채 댄스홀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래도 난 꼬마 쪽이 좀 더 좋아. 자주 봐서 그런가? 순진한 면도 있고.」
「후후, 그런가요? 저는 이그레트 외에 다른 사람들은 다 똑같게 느껴져서 모르겠어요.」
「나요도 이그레트가 제일 좋다요!」
「다른 인간에겐 별로 관심이 없다.」
「……야야, 니들이 그렇게 말하면 내가 뭐가 되니.」
다른 정령들의 야비한 반응에 배신감을 느낀 유니가 험악하게 인상을 썼다.
“저기, ‘에드’ 님? 아까부터 지켜봤는데 합석한 영애들 중에 따로 파트너는 없으신 것 같아서. 저랑 춤 한곡 어떠신가요?”
그러는 사이 마침 에단에게도 춤 신청이 들어왔다. 가면 아래로 엿보이는 밝은 미소와 곡선적인 몸매, 손을 내미는 태도까지 자신감이 넘쳐 보이는 한 여성이었다.
‘역시 단장. 그럼 그렇지.’
바이칼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부러운 표정을 지었다.
참가자들이 전원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상황에서 에단의 큰 키와 단련된 몸은 확실히 눈에 띄었다. 그 탓에 연미복으로 입고 온 검은 슈트가 이 자리에 있는 누구보다 잘 어울렸다.
거기다 기사 특유의 절도 있는 분위기까지 갖추고 있어 그에게 눈독을 들이고 있는 여자들은 상당했다.
“…….”
평소대로였다면 단칼에 거절하고 호위 임무에 충실했을 테지만 이 가면파티에서만큼은 그럴 수가 없었다.
하지만 구색이야 어찌 되었든 그는 호위를 위해 따라붙었을 뿐이다. 주군의 곁을 비우면 직무태만이고, 반대로 여기서 춤 신청을 거절할 경우 파티의 룰을 어기는 꼴이 된다.
에단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난처한 심정으로 쥬다스를 돌아보았다. 그와 시선이 마주친 쥬다스는 빙긋 웃어주었다.
“다녀오십시오. 에드.”
주군의 반응은 쌈박하기 짝이 없었다.
“……예.”
한숨처럼 대답한 에단은 하는 수 없이 앞으로 걸어 나갔다. 용기 내어 춤을 신청해 온 이름 모를 여성과 함께 자리를 비우는 그를 보며 미처 나서지 못했던 여성들이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다음 차례엔 내가!’
‘여기선 먼저 행동하는 사람이 이기는 거구나.’
이제 더 이상 소극적으로 머뭇거리는 영애는 없었다.
가면을 쓴 검은 머리의 여성들은 보다 전투적으로 마음에 둔 대상, 혹은 그럴 듯한 상대를 찾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저기.”
“쥬드 님.”
마찬가지로 도도하게 콧대를 높이고 있을 상황이 아니라는 걸 깨달은 이소타가 곁에 있던 쥬다스에게 춤을 신청하려던 찰나였다.
동시에 입을 연 두 여자는 각기 다른 당혹감을 담고 서로를 쳐다보았다.
체리를 닮은 자줏빛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친 이소타의 눈매가 차갑게 굳었다.
‘뭐야, 얘. 맨날 소심하게 구석에 찌그러져 있었던 주제에.’
사사건건 무시하면서도 은근히 경쟁의식을 가지고 있던 동년배 소녀, 체칠리아였다.
파티에 잘 참여하지도 않을뿐더러 와서도 조용히 밥이나 먹고 금방 자리를 떠나곤 하던 그녀였다.
그나마 반반한 얼굴 덕에 남자들이 춤을 신청해 오는 경우도 있었지만 이소타가 접근해 빼앗아 버리곤 했다.
그럴 때마다 체칠리아는 겁먹은 토끼처럼 움츠린 채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흥, 그래 봤자 체칠리아 샬롯트. 언제나 그랬듯이 너답게 굴어. 건방지게 변하려 하지 말고.’
그 깔아보는 눈빛을 느낀 체칠리아는 움찔 주먹을 말아 쥐었다.
이소타는 속으로 코웃음을 치며 냉큼 쥬다스의 팔을 붙들었다.
“이렇게 알게 된 것도 인연인데. 한 곡…… 어때요?”
은근한 목소리로 섹시함까지 어필하는 그녀를 보며 유니가 어처구니없는 숨을 탁 뱉었다.
「와, 막 달라붙는 거 봐.」
「어머나. 끈끈하네요. 거미줄인 줄.」
카니도 입을 살짝 가린 채 무감동한 반응을 해보였다.
떨떠름한 정령들의 반응을 들으며 쥬다스가 제 팔에 과감하게 팔짱을 낀 이소타에게 시선을 주었다.
‘어?’
가면 너머에 자리한 금안을 발견한 이소타가 흠칫 몸을 떨었다.
차가운 금색. 그걸 보자 마치 사자나 호랑이를 마주친 사람처럼 등골을 타고 소름이 죽 올라왔다. 금안은 은발과는 달리 제법 흔한 색이었으므로 그것만으로 황족을 유추해 내기는 힘들었다.
다만 이소타는 지금 본능적으로 상위 포식자에 대한 두려움에 휩싸여있었다.
그녀가 겁먹은 표정으로 툭 그의 팔을 놓자 반쯤 포기하고 있던 체칠리아가 의아한 시선을 보냈다.
쥬다스는 웃음기 없이 입을 열었다.
“이 파티에선 ‘이름을 부른 사람’이 파트너가 되는 것이었지요.”
분명 선택받은 입장인데도 마치 심판자처럼 고고하다.
무례하지 않게, 그러나 도무지 반발할 수 없는 위압감을 담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규칙대로라면 제 명찰에 적힌 이름을 부른 체리 님에게 우선권이 있겠군요.”
“……!”
순간 두 여자 사이에 희비가 엇갈렸다. 이소타가 중간에서 꼬리를 쳐 빼앗지 못한 남자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충격으로 굳어버린 이소타를 두고 쥬다스는 체칠리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화들짝 놀라 그 손을 잡긴 했지만 그를 따라 걸음을 떼면서도 체칠리아는 불안한 표정으로 뒤를 힐끔거렸다.
‘이소타.’
가면에 가려 표정을 확인할 순 없었지만 이소타가 그리 좋은 심기가 아니란 사실쯤은 알아볼 수 있었다. 이소타의 다른 친구들이 어쩔 줄 모르고 발을 구르는 모습까지 본 뒤 다시 고개를 돌렸다.
정신없이 상황을 빠져나오느라 몰랐는데 맞잡은 손에서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체칠리아는 손을 잡은 채 거침없이 정원을 가로지르는 쥬다스의 등에 대고 꾸벅 고개를 숙여보였다.
“고마워요.”
“별말씀을.”
마치 옷에 묻은 자국을 지워줬을 때처럼 태평한 목소리였다. 체칠리아는 그제야 편안히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하지만 전 춤을 신청하려던 건 아니었어요.”
“그렇군요.”
“……알고 계셨어요?”
“파티를 별로 안 좋아한다고 했으니까.”
그 자리에 계속 함께 있어봤자 이소타 무리에게 괴롭힘을 받을 뿐이다.
그 사실을 눈치챈 쥬다스가 그들과 멀리 떨어진 자리로 장소를 옮겨다주었다.
“새삼 춤을 신청하실 리는 없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그는 그리 말하며 부드럽게 손을 놓아주었다. 두 사람은 어느 틈엔가 정원에 심어놓은 어느 커다란 나무 밑까지 와 있었다.
춤을 추는 사람들과 입김이 하얗게 얼 정도로 시린 겨울 공기, 하지만 사방에서 따뜻하게 열기를 뿜어내는 마법구. 그 모든 게 꿈처럼 아름다웠지만 처음으로 자신의 손을 잡아준 사람이 옆에 있다는 게 가장 몽환적이었다.
거기까지 생각한 체칠리아가 맑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
갑자기 웃어도 트집 잡지 않고 진정될 때까지 기다려주는 그의 배려마저도 따뜻했다.
체칠리아는 옷이 더럽혀지는 것도 아랑곳 않고 나무에 등을 기댔다.
“쥬드 님은 참 신기해요.”
“어떤 점이 그리도 신기합니까?”
“으음, 꼭 모든 걸 다 알고 있는 현자 같아요.”
체칠리아야 별 뜻 없이 감탄 삼아 한 말이지만 전생의 삶에서 한평생 대현자라 불려온 그는 어쩐지 조금 찔렸다.
지레 찔려 말문이 막힌 줄도 모르고 소녀는 즐거운 어조로 말을 계속 했다.
“있죠, 쥬드 님.”
“예.”
“저는요. 늘 바쁘게 살았어요. 귀족이지만 이름뿐인 작위라, 파티에서 즐거움을 찾을 시간 따윈 없었죠. 그럴 시간에 거래처를 하나라도 더 따고, 상단 홍보를 한 군데라도 더 돌려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어요.”
쥬다스가 가만히 얘기를 들어주자 체칠리아는 볼을 긁적이려다 손가락 끝에 닿는 가면의 차가운 재질을 느끼고 힘없이 손을 내렸다.
“집이 가난하거든요. 부모님은 저보다 더 바빠요. 그래서 악착같이 일만 하고 살았던 것 같아요.”
“힘들었겠군요.”
“어, 조금요.”
그녀는 길게 한숨을 뱉었다. 힘들었다는 걸 인정하고 나니 무언가 가슴 속에서 내려놓은 기분이었다.
“그치만 누구나 한 번쯤 있잖아요? 힘들고 지쳤는데 좁은 내 방 안엔 아무도 없는 거예요. 듣는 사람 하나 없이 누가 제발 내 목소리 좀 들어달라고 울어본 적.”
“…….”
“사실은 내가 아파서 죽겠는데 내 앞에서 힘들다는 사람 토닥여 준 적.”
18살 성년식을 갓 치른, 소녀에서 성인이 되어가는 그녀는 나무에 등을 기댄 채 멍하니 중얼거렸다.
“아, 그런 생각해 보기도 했어요. 아이들은 아이라서 사랑해 줘야 한다고들 하잖아요. 그럼 어른은요?”
까만 밤하늘이 보였다. 어릴 적 보았던 것처럼 여전히 하늘은 높았다.
“어른이 됐지만.”
‘난 아직도 아이 때랑 달라진 게 없는데.’
“어른이 됐다고 해서 누구나 더 잘 견뎌낼 수 있는 건 아닌데…….”
음악 소리에 묻힐 만큼 조그맣게 웅얼거리는 그녀의 목소리에도 쥬다스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아직 힘들다고 느끼시는군요.”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던 체칠리아가 고개를 내려 그를 바라보았다.
“힘내라곤 하지 않으시네요?”
“그래야 하는 겝니까?”
“앗, 아뇨! 그게 아니라. 보통은 이런 얘기를 하면 그러잖아요.”
힘내, 잘될 거야라고. 민망함에 볼을 붉히는 그녀를 마주 바라봐 준 쥬다스가 넌지시 입을 열었다.
“이미 죽을 만큼 힘들어하는 사람에게 또 ‘힘내’라고 하는 건 죽으라는 소리와 같습니다.”
체리를 닮은 붉은 눈동자가 점차 크게 뜨여졌다.
“그건 너무 잔인하지 않습니까?”
“윽.”
“당신은 지금 잘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더 이상 힘낼 필요 없어요.”
후두둑, 예기치 못하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마음속에 꾹꾹 눌러 담아 억지로 못 박아두었던 둑이 쾅 터진 느낌이었다.
기껏 파티에 나온다고 가면 속에나마 꾸며놓은 화장이 엉망이 되어버리자 체칠리아는 황급히 소맷자락으로 얼굴을 가렸다.
창피함과 서러움, 후련함 등 여러 가지 감정이 북받쳐 올라 당장 눈물을 멈추는 건 무리였다.
쥬다스는 그녀가 마음껏 울 수 있도록 앞에 서서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가려 주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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