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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장. 성년식
시원하게 울고 난 체칠리아는 고개를 들지 못하고 망설였다. 손에는 짠 물기에 젖은 가면이 들려 있었다. 눈물을 닦느라 벗어두었던 탓이었다.
곧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음성에 쥬다스가 고개를 돌렸다.
“체칠리아 샬롯트.”
가면파티에선 정체를 감추는 게 규칙이지만 마음에 드는 상대를 찾으면 그에게만큼은 가면을 벗고 이름을 알려준다.
생면부지의 관계에서 바로 그렇게 인연이 이어진다. 이 파티장에 있는 모든 여성이 혹시 모를 인연을 위해 가면을 쓰더라도 예쁜 옷을 입고 자신에게 어울리는 화장을 받은 채 나왔다.
체칠리아는 울어서 엉망이 된 얼굴로 소탈하게 웃었다.
“제 이름이에요. 맨 얼굴은 이미 들켰으니까.”
설마하니 곧장 이름을 밝혀 버릴 줄은 몰랐던 쥬다스가 침묵하자 그녀는 가면을 들어 도로 얼굴을 덮었다.
“꼭 알려주시지 않아도 돼요. 오늘 쥬드 님을 만난 것만으로도 충분히 기쁘거든요.”
“으음. 미안합니다.”
상대가 먼저 이름을 밝혔는데도 거기에 응하지 않는다는 건 즉 거절을 의미했다.
쥬다스에겐 굳이 정체를 밝힐 생각까진 없었다. 고민하거나 어영부영 돌려 말하지 않고 솔직하게 표한 거절의사에 체칠리아는 키득거렸다.
“괜찮아요. 저도 다른 뜻으로 말씀드린 건 아니라.”
“그렇습니까?”
“네. 그저…….”
오늘 만나 말 몇 마디 나눠보지 못하고,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상대에게 이렇게까지 홀려 버릴 줄은 몰랐다.
체칠리아는 귀족 작위가 있긴 하나 상인의 딸이었고, 본디 사람에게 호감을 느끼기 위해선 그만한 시간과 투자가 오가야 된다고 생각하는 철저한 현실주의적 소녀였다.
“그저 친구라도 된다면 좋을 텐데, 하고.”
‘친구?’
쥬다스는 조금 의외인 시선으로 그녀를 가만히 응시했다.
늘 무언가를 바라 접근해 오거나 자연스럽게 군신관계로 이어진 친우들을 제외한다면 먼저 이렇게 아무 목적 없이 친구가 되고 싶다고 요청해 오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위그드라실이라면 진심 어린 벗이라 할 수 있겠지만.’
두 번째 삶에서 처음 벗으로 맺어진 성녀 역시도 생각해 보면 그가 먼저 손을 내밀었었다. 그가 생경한 기분에 휩싸여 말을 않자 그 침묵에 부담을 주었다고 생각한 체칠리아가 서둘러 괜찮다고 손을 내저으려던 찰나였다.
“파티가 끝나면.”
“어?”
“제 이름으로 초대장을 보내겠습니다. 그때 뵙지요.”
귀족은 평민과 달리 어지간한 친분이 있지 않고서야 서로를 집에 초대하지 않는다. 그 의미를 알아차린 체칠리아의 눈이 동그랗게 뜨여졌다.
“친구로.”
욕심 내지 않았던 보상을 받게 된 아이는 더 큰 상을 바라게 되기 마련이다.
체칠리아는 순간적으로 들뜬 마음에 자기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그러면 오늘…….”
‘저랑 춤 춰주시지 않겠어요?’
그렇게 이어졌어야 할 말이 뚝 끊어졌다. 그녀뿐 아니라 주변에 있던 몇몇 사람도 할 말을 잊고 멍한 시선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들이 머물던 주변만 묘한 정적이 흘렀다.
길게 굽이치는 검은 머리카락에 이어 얼굴을 반쯤 가리는 새까만 고양이 가면, 레이스가 달린 코르셋 드레스는 붉은색과 검은색을 배합한 고급스러운 원단이었다. 인어의 꼬리지느러미처럼 길게 늘어진 허리 리본과 손목을 감싼 노란 뱅글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갑자기 파티장에 나타난 여인은 꼭 공방장인이 심혈을 기울여 빚어낸 인형 같았다.
고양이 가면에 가려진 얼굴 탓에 빨간 리본을 맨 도도한 검은 고양이를 연상시키기도 했다. 그런 그녀의 당당하면서도 우아한 걸음걸이에 주변에 있던 이들이 일제히 감탄했다.
분명 육감적인 몸매는 아니었다. 하지만 뭇 여성들보다 큰 키와 탄력 있는 하얀 피부, 소녀와 여인의 사이에 걸친 아슬아슬한 아름다움이 그녀를 한층 빛나게 하고 있었다.
그런 여인이 쥬다스와 체칠리아의 앞까지 와 섰을 때, 체칠리아는 꼭 장군을 우러러보는 병사처럼 위축되고야 말았다.
‘다른 세상 사람 같아.’
똑같은 검은 머리카락에, 가면을 쓰고, 하나같이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었지만 이렇게나 격이 다를 수 있다는 걸 처음 깨달았다.
여인은 누구에게도 시선을 주지 않은 채 곧장 쥬다스를 찾아왔다. 그러더니 아는 사이인가 싶어 눈치를 보는 체칠리아에게조차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고 입을 열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쥬다스 역시 한눈에 그녀를 알아보았다. 모르려고 해도 모를 수가 없었다.
그는 명찰에 적힌 이름이 아니었어도 그녀의 가명쯤은 쉽게 맞출 수 있었을 거라 확신했다.
“오셨습니까, 크리스 님.”
그의 부드러운 응답에 크리스티나의 무표정하던 입매에도 미소가 떠올랐다.
크리스티나 R.델피아. 블랙레이디라는 파티 컨셉에 가장 잘 어울리는 오만함과 고고함을 갖춘 여인의 등장이었다.
* * *
한편, 춤 신청을 거절당한 충격으로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던 이소타가 홱 몸을 돌려 파티장을 가로질렀다. 머리가 아플 정도의 분노 탓에 즐길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감히 날 거부했어?’
그것도 체칠리아, 그 여자 때문에.
평소 그녀에게 느끼던 감정이 얄미움 정도였다면 지금은 아예 흙탕물이라도 뒤집어쓴 듯 더럽고 불쾌했다.
‘하! 그 건방진 눈빛은 뭐냐고.’
다 알고 있다는 듯 차갑게 내려다보던 금색 눈동자. 시선이 마주친 순간 마치 나쁜 짓을 하다 걸린 아이처럼 무서웠다.
이소타는 정계에서 상당히 영향력 있는 가문의 고명딸이었다. 다른 남자 형제들 사이에서 한 떨기 꽃처럼 예쁨받고 자란 그녀에게 냉대한 남자는 없었다.
그래서 얄밉긴 하나 별 볼 일 없는 체칠리아보단, 자신을 거절한 쥬다스에게 못 견디게 화가 났다. 가면 너머로 차게 빛나던 눈이 거슬려서 미칠 것 같았다.
이소타는 손톱을 깨물며 중얼거렸다.
“……누군지 그 잘난 정체를 까발려서.”
아버님에게 울며 매달리기만 하면 된다. 어차피 이 가면파티에 참석한 인원들은 전부 갓 성년을 맞이하였거나 이렇다 할 작위가 없는 젊은 청년들이다. 각 가문의 수장들이라면 모를까 젊다 못해 어리기까지 한 새싹쯤이야 어렵지 않게 짓밟아줄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며 분노를 삭이던 그녀의 뒤통수 위로 사람 그림자가 졌다.
“그건 곤란한데요.”
“……?!”
순간 귓가에 들려오는 낮은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소리를 지를 뻔한 이소타는 가까스로 입을 틀어막고 뒤를 홱 돌아보았다.
웬 키 큰 남성이 그녀를 향해 빙글거리고 있었다. 남자가 쓴 가면은 동물 중에서도 말을 형상화한 동물가면이었는데 그 장난스러운 선택이 이소타로 하여금 더욱 소름 끼치게 했다.
“뭐, 뭐야. 당신.”
“말가면맨이요. 히힝.”
“뭐 이딴.”
뭐 이딴 게 다 있느냐는 소리가 이소타의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그녀의 황당하다는 투에 자칭 말가면맨은 곁에 있던 친구의 팔짱을 끌어다 척 가리켰다.
“이 친구는 낙타가면맨!”
“……창피하지도 않습니까, 말 씨.”
“뭐 어때요? 원래 이런 곳에서는 이미지가 중요하다구요. 알아두세요, 벨 씨.”
‘그냥 처음부터 말, 벨이라고 소개하면 된 거잖아?!’
말에게 끌려온 친구는 정말 창피해보였다. 이마를 찡그리던 이소타는 부끄러워하는 벨이란 청년의 피부가 특이하게도 까무잡잡하단 사실을 깨닫고 멍하니 쳐다보았다.
‘사막부족에 초콜릿색 피부가 있다고는 들었지만.’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었다. 본의 아니게 제 출신지를 온몸으로 노출하게 된 꼴이었지만 벨이란 청년은 그것도 모른 채 꿋꿋하게 낙타가면을 유지했다.
그런 벨 곁에 있던 또 다른 일행이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우웅. 이미지, 중요하다. 바보 이미지, 오래 간다.”
“왜 네 안에서의 나는 하필 그런 이미지가 오래 가고 있는 건데……?”
이번엔 어여쁜 감청색 드레스를 차려입은 여성이었는데 벨과 마찬가지로 피부색이 어두웠다.
두 사막부족인은 옷까지 맞춰 입고 온데다 찰싹 붙어 있기까지 해 이소타가 보기엔 꼭 연인처럼 보였다.
“당신들 뭐예요? 나한테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는 건가요?”
놀란 마음을 진정시킨 이소타가 따져 묻자 말가면을 쓴 청년이 능글맞게 대꾸했다.
“예, 있습니다.”
“뭔데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요. 당신이 접근하려는 남자.”
슥-
갑자기 얼굴을 코앞에 들이대는 말 때문에 이소타는 기겁하여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
진짜 말처럼 주둥이가 툭 튀어나오고 혀를 빼문 말가면을 가까이서 보니 더 무서웠다.
“……에게 관심이 있거든요, 제가.”
“네?”
이소타는 순간 맹꽁이처럼 눈을 깜빡거렸다. 하도 가면에만 시선을 집중했더니 헛소리가 들리는 건가 싶었다.
그런 그녀를 위해 말이 친절하게 방금한 말을 되짚어주었다.
“쥬드 님께 특별한 관심이 있다고요.”
“네에?”
“그러니까 정체를 밝혀 복수를 해야겠다는 생각은 말아줬으면 좋겠는데요. 순순히 당할 분도 아니시긴 한데, 그래도 좀 신경 쓰여서.”
말 가면이 히죽 웃는 착각이 일어났다. 이소타는 화르륵 붉어진 얼굴로 어버버거렸다.
“다, 다, 당신도 나, 남자잖…….”
“네. 그게 왜요? 제 몸과 마음은 이미 그분 것이거든요.”
“히이익.”
듣지 말아야 할 금단의 이야기를 들어버렸다는 생각에 그녀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가, 가끔 이런 변태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도 있다고 듣긴 했지만!’
신성을 믿는 제국 내에서 남색, 즉 동성연애는 엄격히 금지된 항목이었다. 특히 귀족들 사이에선 더욱이 입에 담지 않는 주제였으니, 이제 갓 성년식을 치른 이소타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무엇보다 그런 성향을 가진 사람을 실제로 본 건 처음이었다.
‘뭐야. 그럼 체칠리아 고 계집애랑도 잘 되가는 게 아니었나? 하긴 내 애교에 넘어가지 않는 남자라니, 이상하긴 했어.’
혼란 상태가 된 머릿속에서는 엉뚱한 결론이 나왔다. 그사이 말이란 청년은 그녀를 설득하기 위해 계속 떠들고 있었다.
“그러니까 관심을 좀 꺼주셨으면.”
“끌게요! 그…… 런 쪽에 관심 없어요!”
“오?”
말이 반색하며 물어왔다.
“정말입니까?”
“더 신경 쓰고 싶지도 않으니까, 그러니까.”
“네.”
“조, 좋은 사랑하세요!”
결국 이소타는 견디지 못하고 그들을 지나쳐 달려 나갔다.
그녀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낙타가면의 벨이 소심하게 중얼거렸다.
“……저기, 완전히 오해한 것 같은데요.”
“일부러 그러라고 한 말입니다. 저런 부류는 어쭙잖게 자극해 봤자 더 발톱을 세우고 달려들거든요. 일이 커지면 귀찮잖아요.”
“아.”
“그리고 주군께는 충성을 맹세했으니까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있는 건 당연하죠. 멋대로 오해한 건 그 영애 쪽이라고요. 제가 틀린 말 한 건 아닙니다?”
“그래도 전하께서 아시면 좀 기분 안 좋으실 것 같…….”
“당신만 입 다물면 됩니다, 벨 씨.”
말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덧붙였다.
“물론 당신의 귀여운 정령 아가씨도요.”
“웅, 웅. 다문다, 입.”
“착하네요.”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는 말가면 청년의 뒤에서 이번엔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역시 댁들이셨습니까?”
딱히 할 일이 없어 우두커니 자리에 남아 있던 바이칼이었다.
그들이 이소타를 둘러싸고 한 짓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바이칼은 어처구니없는 한숨을 뱉으며 말했다.
“초대를 하긴 했지만 루머를 퍼뜨리라고 부른 건 아닙니다. 아무리 서로 정체를 모르는 가면파티라지만 주군께 이상한 이미지를 만드는 건 자제해 주시죠.”
“이야, 이게 얼마 만입니까? 바…… 아니, 칼 님.”
말가면을 쓴 청년이 무척 반가운 어조로 인사를 건넸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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