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그레트-239화 (239/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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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장. 성년식

그는 한때 루바흐에서 쥬다스의 수족이 되기를 자처한 마르젠이었다.

지금은 정계에 진출해 화려한 언변과 인맥으로 귀족들을 휘어잡은 초신성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물 만난 고기처럼 사람 사이를 누비고 다니며 온갖 위업을 쌓은 그는 황태자를 보필하는 이들 중에서 이젠 없어서는 안 될 인물로 크게 자리 잡았다.

대신 그만큼 할 일도 많아 쥬다스의 친위기사로 들어온 에단이나 바이칼만큼 자주 얼굴을 비추지는 못했는데, 이번 기회에 그들을 만나기 위해 바쁜 일도 뒤로하고 초대에 응해 찾아온 참이었다.

그런 마르젠의 곁에는 투르케 사막에서 새로운 부족민들을 이끌고 있는 신예 수장, 아벨 투르케가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어색하기만 했던 두 사람이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예상외로 호흡이 잘 맞아 친해졌다. 그들은 이제 방금 전처럼 서로 허물없는 농을 건넬 사이가 되었다. 그리고 아벨에게 마치 연인처럼 엉겨 붙어 있는 소녀는 거울정령 투르키였다.

가면에 가려지긴 했으나 목소리며 피부색, 분위기 등을 통해 눈치 빠르게 그들의 정체를 알아본 바이칼이 반가움과 황당함이 섞인 얼굴로 입을 열었다.

“오셨으면 형님에게 말해서 저를 바로 찾아오시지 그랬습니까?”

“그러려고 했는데 진행자님이 너무 바쁘시던데요. 기왕 온 거 파티도 좀 즐기고, 제 눈썰미를 시험해 볼 참으로. 겸사겸사?”

그 특유의 유들유들한 말투는 여전했다. 바이칼은 피식 웃음을 흘리며 대꾸했다.

“뭐 아무튼 마침 신경 쓰이던 똥파리를 처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 할 일을 했을 뿐이지요.”

‘방법은 영 아름답지 못했지만.’

싱글거리는 두 친우 사이에서 아벨은 소심하게 속으로만 토를 달았다.

“그나저나 에단 님은?”

“끌려갔습니다.”

“호오, 역시 천재 검술사. 얼굴을 가려 놔도 인기는 사라지지 않으시나 보네요.”

별다른 설명 없이도 마르젠은 알 만하다는 반응을 했다.

“마침 저기 오시네요.”

그는 때를 맞춰 제자리로 돌아오는 에단을 향해 손을 붕붕 흔들었다.

“욥, 에드 님.”

“주군께선?”

“에이. 오자마자 하는 말이 그겁니까? 뭐 댄스 소감 같은 거 없어요?”

“까불지 말고.”

지극히 충성심 높은 기사단장다웠다. 장난이라곤 씨알도 먹히지 않는 상관에게 쳇 혀를 찬 바이칼은 쥬다스가 있는 방향으로 손짓을 해보였다.

“체리 양과 함께 반대편으로 가셨습니다.”

“가지.”

“아뇨, 아뇨. 잠깐 기다려 보십쇼.”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성큼성큼 이동하려는 에단의 옷깃을 바이칼이 붙잡았다.

“오랜만에 이렇게 손님들이 찾아오셨는데 인사는 안 하십니까?”

“…….”

그의 검은 눈동자엔 어떠한 감동도 떠오르지 않았다. 무심하게 마르젠과 아벨, 투르키를 차례로 훑어본 에단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왔군.”

“으하하핫! 뵌 지 2년도 넘었는데 여전하시네요.”

마르젠에 비해 비교적 최근에 순례의 길에서 만난 아벨은 그저 어색하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마주 짧게 눈인사를 해준 에단이 다시 몸을 돌렸다. 그 단순하리만치 임무에 충실한 태도에 바이칼이 질린 표정으로 다시 그를 붙들었다.

“잠깐만요.”

“또 왜?”

“생각 좀 해보십쇼. 제가 왜 진작 주군을 안 따라가고 여기 남아 있겠습니까, 이 양반아.”

그 말에 멈칫한 에단이 눈매를 살짝 좁혔다.

“신경 쓰일 만한 일 있었나?”

“조금요. 별거 아닌 신경전이었긴 한데 그 상황에서 같이 있던 영애가 한 방 먹었거든요.”

“‘이즈’ 양인가.”

이소타의 가명이었다. 에단이 정확히 그녀를 짚어내자 부관은 긍정의 뜻을 표했다.

“옙, 분위기 정말 장난 아니었습니다. 뭐라도 한 방 터뜨릴 눈치였다니까요? 그랬던 걸 여기 이분들이 나서서……!”

“쓸데없는 생각 말고 임무에나 충실해라.”

“아오, 바로 그게 문제라고요.”

바이칼은 답답함에 가슴을 쳤다.

“우리가 지금 여길 왜 왔습니까? 주군께 혼담까진 무리더라도 연애사업 정도는 도와드리려고 파티를 연 거잖아요?”

“그래서?”

“자꾸 눈치 없게 끼어드시게요? 예?”

“그런 시답지 않은 이유로 곁을 비우고 있었다면 실망이로군. 돌아가면 정신 교육이다.”

고지식한 기사에겐 설득 따위 통하지 않았다. 오히려 정신교육을 빙자한 지옥훈련을 선물 받게 된 바이칼은 억울함에 입만 뻥끗거리다 축 늘어진 채 상관을 따랐다. 루바흐에 다닐 적부터 익숙한 모습이었기에 마르젠과 아벨은 그러려니 싶은 얼굴이었다.

그러나 몇 걸음 채 걷지 않아 변수가 생기고 말았다.

“안녕하세요?”

활짝 핀 장미꽃처럼 생기 가득한 소녀들이 그에게 다가왔다.

“성함이…… 에드 님이군요. 한 곡 어떠세요?”

“그다음엔 저랑도요!”

“아이, 가면 한 번만 벗어보시면 안 될까요? 정말 멋있으실 것 같은데.”

블랙레이디란 파티 컨셉 아래, 이안에서 남성이 여성의 권유를 거절할 권리는 없다. 그 단순한 규칙에 꼼짝없이 발목을 붙잡혀 버린 탓에 에단은 낭패한 표정을 지었다.

여자들 무리에게 질질 끌려가다시피 붙들린 에단을 보며 일행과 함께 자리에 남은 바이칼이 눈을 끔뻑였다.

한 차례 파도가 휩쓸고 지나간 모래성처럼 그저 어안만 벙벙했다.

“…….”

그는 문득 허전한 옆구리를 쓸었다.

‘왜 나한텐 아무도 안 오는 건데!?’

솔로의 정령이 있다면 이런 것일까.

분명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건 똑같은데 이상하게 자신에게만 춤 요청이 오지 않았다.

바이칼은 누구에게도 토로할 수 없는 억울함에 코끝이 시큰해지는 걸 느꼈다. 하인에게 맡기고 온 플루비의 말랑말랑한 온기가 그리워지는 밤이었다.

‘빌어먹을 빈익빈 부익부 같으니. 파티고 뭐고 그냥 다 망해버렸으면.’

그 심정과는 별개로 그 자신이 주최한 파티였으니 진짜로 망칠 수는 없었다. 바이칼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레이디들에게 둘러싸여 사라진 에단을 기다렸다.

잠시 후 에단이 일행의 곁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제법 시간이 많이 흐른 뒤였다. 정신적으로 상당히 지쳐 보이는 그를 향해 마르젠이 농을 건넸다.

“검술 천재도 여자 앞에서는 맥을 못 추는가 봅니다?”

“……당연히. 검으로 상대하는 게 아니니까.”

돌아오는 대꾸에는 심지어 짜증마저 어려 있었다. 귀족가문에서 철저히 교육받고 자란 영애들은 대부분 이중, 삼중 언어를 사용했다.

바로 그 점이 말수가 적고 직설적인 화법을 주로 사용하는 에단을 피곤하게 만들었다.

“말속에 뼈가 있거나 의도를 가지고 낚아보려는 계산을 일일이 대응하려면 피곤할 수밖에.”

“호오, 그런가요?”

“동류끼린 어려움을 못 느끼겠지만.”

따끔한 일침에 마르젠은 말 가면을 고쳐 쓰며 모르는 척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정원이 꽤 넓군요. 그분께서 어디 계신지 찾는 것도 일이겠는데요.”

“하긴 어딜 둘러봐도 비슷비슷하네요. 참석자들이 머리색도 전부 같고 가면까지 쓰고 있으니 찾기가 어렵겠…….”

답답한 나머지 목을 꽉 조이던 타이를 풀어내던 바이칼이 그대로 자리에 멈춰 섰다.

동시에 발길을 멈춘 일행들 사이에 많은 의미를 함축한 침묵이 흘렀다. 투덜거리던 목소리가 어설프게 이어졌다.

“……은 아닌 듯?”

“찾은 것 같군요.”

“그, 그러게요.”

이미 많은 사람의 주목 가운데 일행이 찾던 그가 있었다. 혼자였다면 묻혔을 수도 있겠지만 지금 그의 옆엔 마침 인형 같은 레이디가 함께 자리했다.

가녀려 보이면서도 강인하게도 느껴지는 모순적이면서 독특한 분위기의 그녀 덕에 사람들이 힐끗힐끗 둘을 훔쳐보는 참이었다.

마침 크리스티나가 손을 내밀었고, 쥬다스는 부드럽게 그 제의에 응했다. 그 접촉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사교댄스로 이어졌다.

멍하니 그 광경을 지켜보던 바이칼이 뒤통수를 긁적이며 에단에게 쑥덕거렸다.

“제 눈이 이상한 게 아니라면 저분, 크리스티나 님 맞으시죠?”

“내 눈에도 그러해 보이는군.”

수년을 같은 학교에서 동고동락한 바이칼이나 에단도 그녀 특유의 분위기를 몰라볼 리 없었다.

대체 언제 파티장에 도착한 건지 그들에겐 인사도 없이 곧장 쥬다스를 찾아간 그녀를 보고 둘은 놀란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그러자 크리스티나를 알아보지 못한 마르젠이 휙 휘파람을 불었다.

“워후~ 분위기 좋은데요?”

“보셨죠, 단장? 지금은 절대 끼어들면 안 되는 타이밍입니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굳이 이럴 필요가.”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자연스레 나무 사이사이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성인남자 셋과 여성체 정령 하나를 가려주기에는 나무가 턱없이 얇았지만 그 외에는 넓은 야외 파티장에서 숨을 곳이 딱히 없었다. 엉겁결에 같이 나무 기둥 뒤에 서게 된 에단이 영 불만스러운 반응을 보였지만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쥬다스와 크리스티나의 주변에서 여전히 자리를 떠나지 않고 있는 체칠리아를 발견한 바이칼이 새로운 사실을 유추해 냈다.

“아니, 가만. 설마, 진짜, 혹시, 지금 삼각관계인가?”

밤을 새워가며 추리소설을 읽을 때처럼 절로 손에 땀이 쥐어졌다. 바이칼은 그래도 오래 알고 지냈던 크리스티나에게 한 표를 던지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거 완전 흥미진진한데!’

하지만 그런 바이칼의 기대가 무색하리만치 실상은 완전히 달랐다. 쥬다스는 두 여성 중 어떤 이에게도 특별한 감정이 없었다.

아직까진 그에게서 가장 가까운 인간관계란 ‘친구’였다. 심리적 거리로 따지자면 학생 시절부터 이미 친구로 지내온 크리스티나가 더 가깝긴 했지만 그뿐, 바이칼이나 마르젠이 기대하는 종류의 호감은 아니었다.

숨는다고 숨은 일행이 있는 나무를 등진 채 크리스티나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정말이지, 그들은 몇 해가 지나도 여전하군요.”

“그렇구나. 변함없이 유쾌한 아이들이야.”

그녀가 말하는 ‘그들’이 누구인지 단박에 알아들은 쥬다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크리스티나는 춤을 청하듯 손을 내밀며 몸을 살짝 틀었다. 가면에 가려진 바다빛깔 눈동자가 흘끗 나무쪽을 향했다.

“설마 저런 꼴을 하면서 안 들킬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요?”

“아마도?”

“하.”

그녀는 작게 한숨을 뱉었다. 분명 함께 성장했는데 나무 뒤에 숨어서 몰래 지켜보는 모양새가 아직도 루바흐를 다니던 시절 활기찬 소년들 같았다.

좋게 말하면 아직 천진했고, 나쁘게 말하면.

‘한심해.’

그리 생각하는 크리스티나의 손에 따뜻한 온기가 맞닿았다. 그녀의 춤 신청에 쥬다스가 기꺼이 응해준 것이다.

“우리가 모르길 바라는 모양이니 모른 척 해주자꾸나.”

장난기가 스민 목소리에 크리스티나는 가면을 써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다.

가면파티가 아니었더라면 지금 표정을 감출 수 없었을 테고, 그랬다면 나무 뒤에 숨은 바이칼보다 못난 꼴을 그에게 보였을지도 모른다.

늘 도도하고 완벽을 추구했던 공녀는 가면 뒤에 숨어 씁쓸한 마음을 곱씹었다.

‘사실은 내가 제일 한심해.’

전혀 성장하지 못했다. 몸이 자라고 지식을 얻었을지언정, 가장 인정받고 싶은 한 사람에게만큼은 여전히 어린 소녀였다.

‘그렇지만.’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크리스티나는 맞잡은 손에 살며시 힘을 주었다.

그 따스한 온기가 자신만의 것이 되는 건 무리겠지만, 적어도 그가 자신을 아이가 아닌 여인으로 봐주기를 바랐다.

그리하여 그녀는 다들 몸이 성인이 된 것과 별개로 아직도 자랄 날이 한참은 남았다고, 그렇게 느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다음 편은 최종화입니다.

곧 이어질 완결편 후기에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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