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41 [ 외전 1 : 인형의 꿈 ] =========================================================================
이그레트 외전 1화
[외전 1 : 인형의 꿈]
한 달간의 성년식 파티를 마친 후, 쥬다스는 다시 황제 레위스와 독대했다.
드물게도 황제는 아들을 사냥터로 불렀다. 두 사람이 집무실이나 식당이 아닌 야외 공간에서 대면하는 건 아주 흔치 않은 일이었다.
황제가 선택한 장소는 황실의 혈통만이 들어갈 수 있도록 엄중히 관리되고 있는 사냥터 ‘루 베가’.
그 광활한 평야에서 오로지 금과 백, 두 마리의 말이 나란히 내달렸다.
특수 브리딩을 통해 태어난 황제 전용마가 금색 갈기를 멋들어지게 흩날리며 땅을 박찼다. 그보다 한 발 뒤에서 달리는 우아한 백마는 마치 제 주인과도 같은 은빛 갈기를 지니고 있었다.
한참을 내달린 후에야 속도를 줄인 황제 레위스가 먼저 활시위를 겨누었다.
“꽃밭을 보고 오니 어떠하더냐.”
활 끝에는 아무것도 모른 채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 흰 염소가 있었다. 그는 군더더기 없는 동작으로 시위를 놓았다.
픽!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활촉이 정확히 염소의 목을 명중했다. 강력한 마비독이 발린 화살은 염소가 날뛸 시간도 주지 않고 녀석을 그대로 죽음으로 이끌었다.
“개중.”
“…….”
“네가 취하고자 하는 향기를 가진 꽃은 있었느냐?”
찌르듯 물어오는 금안을 마주 본 쥬다스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질문을 받았으니 답할 차례였다. 그는 말허리에 채워놓은 활통을 열어 사냥용 활을 꺼냈다.
“꽃밭은 전부 아름답고 좋은 향기로 가득하였습니다.”
천마의 깃을 심어 장식한 활이 유려한 몸체를 드러냈다. 사냥용이라곤 하나 금으로 황실의 문양을 박아놓아 보통 사람들은 손가락 하나 대지 못하는 귀중한 보물이었다.
“폐하.”
동색의 눈동자가 다른 무게를 담고 서로를 마주 보았다.
“제 어머니는, 이 황궁으로 와 제 어머니가 되기를 직접 선택하셨다 들었습니다.”
‘하윤 리.’
한 남자를 사랑하였기에 스스로 낯선 땅으로 건너온 비운의 여인.
“마찬가지로 폐하께선 제 어머니를 선택하셨지요.”
제위를 물려줄 아들을 낳을 고결한 모체로.
쥬다스는 차갑다 못해 따갑게 마저 느껴지는 황제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오롯이 응시했다.
“그리함으로써 당신은 무엇을 지키셨습니까?”
누구도 감히 지엄한 황제에게 올린 적 없는 무례한 질문이었다. 그러나 황제는 노여워하거나 무례하다 경하지 않았다. 그저 침묵했다.
그 침묵을 물끄러미 지켜본 쥬다스가 작게 덧붙였다.
“폐하. 저는.”
“…….”
“제 어머니와 같은 여인을, 그리고 저와 같은 아이를 세상에 만들어내고 싶지 않습니다.”
아들이 밝힌 솔직한 고백에 황제의 표정이 처음으로 일그러졌다. 그러나 한 번도 자식들에게 아비로서 선 적 없었던 레위스는 제 피를 이은 아들에게 분노할 수 없었다.
가장 소중한 이를 지키지 못하고, 비극을 방관한 건 사실이었다.
다른 대의를 위해. 다른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
그러나 결코 옳았다고는 표현할 수 없었다. 황제는 아들과 달리 솔직하게 마음을 드러내지 못한 채 침묵을 지속했다.
‘나는 그 결정을 후회한다.’
그랬기에 쥬다스가 하는 말에 화를 낼 수 없었다. 그는 아이가 하는 말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이해했기 때문에 응당 부정해야 하는 상황에서조차 부정할 수 없다.
그 묘한 딜레마에 빠진 황제 레위스를 가만히 바라보던 쥬다스가 활을 들었다.
그가 겨눈 건 어미를 잃고 사냥터에 잡혀 온 어린 사슴이었다. 행여 황족의 몸을 상하게 하기라도 할까 포악하고 거대한 짐승은 이곳 사냥터에 들여놓지 않았기에 사냥감들은 하나같이 여리고 느렸다.
게다가 소리를 잘 듣지 못하게 귀를 멀게 하였으니 도망도 제대로 가지 못했다.
윤기 나는 갈색 털을 가진 새끼사슴 역시 가녀린 다리로 풀밭을 서성이며 연신 들리지 않는 귀를 까딱이고 있었다.
쥬다스는 그 새끼 사슴을 겨냥한 채 활을 날렸다.
피잉!
“……!”
풀을 뜯다 소스라치게 놀란 사슴이 겅중겅중 뛰어 달아났다. 날아든 화살은 정확히 사슴이 서 있던 자리 한 발짝 앞에 박혀 있었다.
“소자, 활에는 재간이 없어 사냥은 어렵겠습니다.”
모른 척 빙긋이 웃는 아들을 향해 황제가 서늘한 시선을 보냈다.
“무르군.”
“하여 꽃을 꺾지는 못하였으나.”
쥬다스는 잠시 말하던 걸 멈추었다. 예정대로라면 다른 핑계를 대어 반려를 맞으라는 황명을 거부하려던 게 본래 계획이다.
하지만.
‘좋아해요.’
마냥 어린 소녀라 여겼던 한 여인이 보여준 용기 어린 진심을 외면하긴 어려웠다.
금방이라도 울 듯, 그러나 촉촉하게 젖은 눈망울로라도 행복하게 웃던 그 미소를 두고 어찌 눈에 밟히는 이가 없다 말하겠는가.
그가 크리스티나에게 쏟는 신경은 흔히 남녀 사이에서 오가는 ‘연심’과는 차이가 컸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쥬다스는 황제를 향해 제 답을 내어놓았다.
“가까이 두고자 하는 이는 있습니다.”
* * *
“예?”
소식을 들은 바이칼이 입을 떡 벌렸다. 그와 함께 앉아 있던 에단의 표정도 그 못지않게 크나큰 당혹감에 물들어 있었다.
그처럼 추하게 입을 벌린 건 아니지만 마시던 차가 목에 걸려 작게 쿨럭거리던 참이었다.
“전하께 비 후보가 있다고요?”
툭, 동글동글한 청포도 알이 바닥을 뒹굴었다. 평소처럼 여유를 갖고 둘러앉은 다과상은 순식간에 찬물을 뒤집어쓴 양 고요해졌다.
답지 않게 실수까지 해가며 포도 알을 떨어뜨린 크리스티나가 떨리는 손끝을 상 아래로 감추고는 시선을 내리깔았다.
‘황태자비 후보…….’
평화롭던 다과 시간을 강타한 건 황제와 사냥터에 다녀온 쥬다스의 한마디였다.
충격에 빠진 세 사람 사이에서 유일하게 멀쩡한 얼굴을 한 그가 태연한 어조로 대답했다.
“완전히 그렇게 결정 난 건 아니야. 폐하께 그리 말씀드렸을 뿐이다.”
“아, 그렇습…….”
“무엇보다 상대는 아직 모르고 있을 터라.”
“예에?!”
다과상에는 두 번째 충격 폭풍이 휘몰아쳤다.
‘뭐지? 무려 전하께서 점찍어둔 상대가 있는데. 그 상대는 자기가 황태자비 후보란 걸 몰라?’
바이칼이 속으로 상황을 정리해 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순간 에단과 크리스티나, 바이칼 셋의 머릿속에 동시에 같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렇다는 건.’
‘전하 혼자서 마음에 두신.’
‘외사랑?!’
수하들이 엉뚱한 결론을 내리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쥬다스는 쪼그려 앉아 작은 짐승의 새끼를 돌보고 있었다.
다리를 다쳐 절뚝거리는 아기 사슴에게 약이 발린 붕대를 감아주는 그를 보며 바이칼이 멍하니 입을 열었다.
“전하. 근데 그 동물은……?”
“오늘 사냥터에서 만난 아이란다.”
“사냥터요?”
사냥감을 사냥하지 않고 데려왔다는 뜻이었다. 황망함에 빠진 세 눈길이 얌전히 고급 카펫 위에 엎드려 있는 아기사슴에게로 향했다.
“다치게 하지 않으려고 일부러 비껴 맞췄는데.”
쥬다스는 말하면서 사슴을 향해 미안한 미소를 지었다.
“급히 달아나다가 발이 꼬여 넘어지더구나.”
이젠 괜찮지? 긴 주둥이를 톡톡 두들겨주는 손길에 사슴이 끙끙 울었다. 쥬다스는 어미를 찾듯 그의 품을 파고드는 어린 동물을 안아 토닥였다.
“아, 그리고 내일은 아침 일찍 가야 할 곳이 있어.”
“예? 어디에 가십니까?”
뜬금없이 외출을 언급하는 그를 향해 다들 의아한 시선을 주었다. 쥬다스는 어린 사슴을 품에 안은 채 빙긋 웃었다.
“시장에 물건 사러.”
세 명의 수하는 서로 시선을 교환하며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언제나 그랬지만, 오늘 주군의 행보는 정말 한 치 앞도 예측할 수가 없다.
정말로.
* * *
쥬다스가 뜻한 건 잠행이었다.
그는 다음 날 동이 트자마자 정말로 친위기사들을 이끌고 궁을 나섰다. 루바르잔의 수도 알리의 아침은 하루를 여는 사람들로 인해 이미 분주한 상태였다. 빵 굽는 냄새가 아침 공기를 타고 포근하게 사방을 뒤덮었다.
그들은 먼 지방에서부터 수도를 구경나온 귀족 여행자들로 위장했다. 특징적인 머리색을 전부 인챈트 소품으로 바꿔놓는 건 이제 기본이었다.
원체 상황극에 능한 주인 탓에 기사단 전체가 이미 이런 연기에 익숙해져 있었다. 대부분은 기사로서의 품격과 절도를 갑옷과 함께 벗어 던지고 일반 시민들 틈에 섞여 몰래 상황을 감시했다.
에단과 바이칼은 주군의 곁에 붙어 있어야 하는 만큼 평상시대로 호위 역을 맡았으며, 마지막으로 유일하게 기사가 아닌 크리스티나는 의외의 역할을 부여받았다.
‘함께 여행을 온 약혼녀.’
처음 그 역할을 맡으라는 명을 들었을 때 크리스티나는 제 귀를 의심했다. 그녀뿐 아니라 에단과 바이칼도 심각한 표정으로 시선을 교환할 지경이었다.
말이 약혼녀지, 여행까지 같이 올 정도라면 쥬다스가 직접 연기하는 ‘쥬드 리프너스’가 아껴 마지않는 애틋한 연인 노릇을 하란 뜻이다.
그리고 그들이 알기로 쥬다스는 크리스티나가 아니라 어느 누구에게조차 한 번도 그런 역할을 맡긴 적 없었다.
물론 크리스티나는 여성인데다 눈에 띄는 외모와 분위기를 가지고 있어 에단과 바이칼처럼 귀족의 호위를 맡은 직속 기사 행세를 하느니 확실히 그편이 가장 자연스럽긴 했다.
그렇지만, 크리스티나는 연한 분홍빛으로 무릎께에서 살랑이는 소녀풍의 원피스를 멀거니 내려다보았다.
‘무언가 다른 뜻이 있으신 건가?’
습관처럼 온갖 가능성을 떠올려 머릿속으로 정리해 봤지만 딱히 이렇다 할 결론은 나오지 않았다. 결국 크리스티나는 살랑이는 옷자락을 그러모은 채 길게 한숨을 뱉어냈다.
‘아니, 아니야. 전하의 뜻을 추측하는 건 미련한 짓이지.’
다른 누구도 아니고 쥬다스였다. 루바흐를 다니던 시절부터 내내 그녀의 추측을 빗나가게 만든 유일한 존재이자, 과히 불경하게 표현하자면.
크리스티나는 벌써부터 지끈거려오는 골을 손가락으로 꾹꾹 눌렀다.
그를 둘러싼 모든 이의 뒤통수를 비정기적으로 후려치는 존재!
그게 바로 최근 황태자를 수식하는 묘사였다. 평소에는 잘 나가다가 언제 또 무슨 통수를 칠지 모르니 예측하고 속단하는 건 금물이다.
“아직 장터에는 도달하지도 않았는데. 무슨 일로 그리 한숨을 쉽니까?”
“……아.”
평소 착용하던 복잡한 의복이 아니라 깔끔한 셔츠 차림의 쥬다스가 곁에서 질문을 던졌다.
장터로 향하는 길에는 아침시간이라도 제법 사람이 많았다. 그 점을 의식해 그의 말투도 존대로 바뀌어 있었다.
크리스티나는 완벽히 ‘쥬드 리프너스’의 모습으로 곁에 선 그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별일 아닙니다. 신경 쓰게 해드려 송구합니다.”
“음. 크리스?”
애칭이 아니라 그저 이름을 줄인 가명일 뿐이라는 사실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 가짜 이름을 부르는 부드러운 목소리에 심장이 멋대로 뛰기 시작한 건 그녀 자신도 주체하기 힘들었다. 의지와 상관없이 멋대로 피어오르는 설렘을 숨기느라 시선을 내려 깐 크리스티나를 향해 쥬다스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혹 제가 괜한 역할을 부탁드렸습니까?”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헛. 늦었습니다. ^^;;
[외전1 : 인형의 꿈]은 올해 2월달에 출판사에 원고전달을 완료하였으나,
조아라에선 업로드에 대한 권한이 제게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습니다. 늦어져서 정말 죄송합니다!
외전 1은 총 12화로 구성되어있으며 주제는 본편에서 볼 수 없었던 '로맨스'입니다.
늘 감사합니다. (꾸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