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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그레트-242화 (242/252)

00242  [ 외전 1 : 인형의 꿈 ]  =========================================================================

이그레트 외전 2화

[외전 1 : 인형의 꿈]

‘그럴 리가.’

용기가 없어 차마 맞부딪히지 못하고 숨겨 버린 고백 대신 이렇게 연기로나마 그의 곁에 설 수 있어서 어찌나 기뻤는지 모른다.

크리스티나는 마구 고개를 젓고 싶은 걸 가까스로 억제하곤 침착하게 대답했다.

“아뇨. 다만 이런…… 일에 경험이 부족하여. 자칫 이번 여행에 누가 되진 않을지 걱정일 뿐입니다.”

경험이 부족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없다. 정략혼담은커녕 스무 살이 된 올해까지도 단 한 사람만을 가슴에 품고 살아온 그녀가 누군가의 연인이 되거나 연애 경험을 해봤을 리는 만무했다.

그런 와중에도 잠행을 여행으로 돌려 말한 걸 알아들은 쥬다스가 작게 웃었다.

“그리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오늘 여행 일정은 제가 알아서 진행합니다.”

“예?”

“그러니 편한 마음으로 따라주시지요. 크리스도, 다른 여러분도.”

지금이 진짜 여행 나온 귀족들의 시장 구경 자리라면 당연한 소리였다. 하지만 그 안에 숨겨진 뜻을 읽어낸 에단이 살짝 미간을 좁히며 고민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나서지 말거라.’

쥬다스가 전한 메시지는 그 뜻이었다. 물론 그에게는 어지간한 상황에선 걱정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충분한 무력이 주어져 있지만 그러한 객관적인 능력치와 호위로서 느끼는 불안감은 별개다.

정말 지켜보기만 해야 하는 건지 적당한 타이밍에서 끊고 위험을 차단해야 하는 건지 고뇌에 빠진 수하들을 뒤로한 채 쥬다스가 먼저 걸음을 옮겼다.

“자, 그럼.”

본격적으로 잠행을 시작하기 전, 쥬다스는 가볍게 손바닥을 펼쳤다.

포로록.

그러자 다른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녹색 정령이 활기차게 날아올랐다. 살짝 돌아 윙크를 해오는 정령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 준 그가 작게 중얼거렸다.

“……거래를 시작해 볼까.”

하늘로 길게 호선을 그리며 사라진 녹색 바람의 잔재가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아침 시장에는 제대로 장사하는 상인이 몇 없다. 그마저도 대부분 갓 쪄 올린 만두나 팔팔 끓인 스튜, 따끈한 꼬치구이 따위를 파는 음식가게뿐이다.

나머지는 이제야 슬슬 자리를 잡고 물건을 진열하기 바빴다.

「우아아아. 온통 먹을 거투성이다요.」

「으응. 그러게요? 아직 시간이 일러서 식당밖에 문을 안 열었나 봐요.」

「새우만두! 무슨 맛인지 완전 궁금하다요!」

「이름에 재료명이 들어가 있잖아요?」

왁자지껄한 시장에 들어서자 토니의 호기심은 어김없이 발동했다. 토니는 이리저리 날아다니며 음식 만드는 모습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자리를 비운 유니 대신 토니의 응석을 일일이 봐주고 있는 건 카니였다.

「종류가 엄청 많다요.」

「신기하죠? 사람들의 취향은 다양하니까요. 우리 정령들과는 다르게.」

정령은 맛이나 향을 구분할 줄은 알지만 그에 대한 갈망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애초에 먹을 필요가 없으니 식욕 자체가 없다. 그래서 토니는 사람들이 만들고 파는 음식에 대해 호기심은 느꼈지만 먹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작은 땅의 정령은 이번엔 푸른 늑대의 머리 위로 올라앉아 두 귀를 꾹꾹 잡아당겼다.

「루니, 루니.」

「……왜.」

「유니는 어디 갔다요?」

「난 바람의 움직임은 읽을 수 없다.」

루니는 귀찮다는 투로 귀를 까딱이며 답했다.

「멀리 떨어진 것 같진 않군.」

정령왕들끼리는 서로의 위치를 어느 정도 감지해 낼 수 있었다. 루니의 말에 토니도 고개를 끄덕였다.

「히잉. 부럽다요.」

「뭐가 부러워요?」

「이번에도 유니만 할 일이 생긴 거다요.」

푸른 늑대의 머리 위에 매달려 시무룩해진 황토 빛깔 정령을 물끄러미 내려다본 카니가 손가락으로 턱을 짚으며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물론 내게도 이그레트를 위해 할 일이 생기면 기쁘겠지만.」

다홍빛 눈망울이 예쁘게 휘어졌다.

「응, 역시 그냥 곁에 남아 있는 지금이 제일 좋은걸요.」

「듣고 보니 그런 것 같다요! 우와앙, 카니는 천재다요!」

“……콜록.”

정령들의 만담 아닌 만담을 듣고 있던 쥬다스는 웃지도 못하고 작게 기침만 내뱉었다.

“쥬드 님?”

“아니, 흠.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보다 시장을 돌기엔 아직 시간이 좀 이른 모양이군요.”

기침 소리에 반응한 일행을 향해 가볍게 손을 내저은 그가 걸음을 멈추었다.

“찾는 물건이 나올 때까진 좀 걸릴 듯한데.”

“혹 어떤 물건을 찾으시는 건지 여쭈어도 괜찮겠습니까?”

“인형입니다.”

“인, 형…… 말씀이십니까?”

예상치 못한 대답을 들은 크리스티나가 말을 조금 더듬었다. 그녀답지 않은 실수였다.

그러나 쥬다스는 사소한 실수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대화를 이어갔다.

“예. 최근 수도를 비롯한 큰 도시마다 아주 특별한 인형이 유행하고 있다 하더군요.”

“아주 특별한 인형이라 하심은.”

“꼭 사람이나 동물처럼 소리 내고 움직인다고 들었습니다. 살아 있는 것과 같다 하여 ‘얼라이브 돌’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도.”

그 말을 듣자 모처럼 얌전히 있던 바이칼이 윽 하고 팔뚝을 쓸었다.

“인형이 사람처럼 말하고 움직인다고요? 그거 정말 소름…….”

“글쎄다. 실제로 보면 상당히 귀여운 모양이야. 칼, 너의 플루비처럼.”

“삐잉?”

제 얘기가 나오자 바이칼의 품 안에 쏙 들어가 동면하는 곰처럼 내내 졸고 있던 플루비가 눈을 반짝 떴다.

로브 자락 속에서 머리만 빼꼼 내민 꼬마 와이번을 도로 꾸역꾸역 집어넣으며 바이칼이 물었다.

“허. 설마 플루비처럼 생긴 인형도 있습니까?”

그에 대한 답은 쥬다스가 아니라 에단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미니 와이번 모델. 들어본 적 있다. 실제 와이번처럼 울음소리를 내고 날갯짓도 할 줄 아는 얼라이브 돌. 최고 인기 품목이라고 하더군.”

“단장도 알고 계셨습니까?!”

냉철하고 고지식한 성격 탓에 유행에 대해선 유독 약한 모습을 보이던 에단마저 그 인형에 대해 알고 있다고 하자 바이칼은 어쩐지 억울해졌다.

“나 원, 언제 그런 쪽으로 취미를 돌리신 겁니까? 인형이라곤 제국군 전쟁 시뮬레이션에 쓰이는 피규어 정도만 관심이 있으신 줄 알았는데요!”

“……관심이 있어서 알게 된 게 아니다. 우연히 소문을 들었을 뿐.”

“우연히요?”

“그래. 우연히.”

에단은 우연이란 표현을 거듭 강조했다. 민망해 보이는 수하를 위해 쥬다스가 슬쩍 거들어주었다.

“나도 소문만 들었지 무어냐. 신비한 인형이라 하여 제국 전역에서 날개 돋친 듯 팔리고 있다는구나.”

“아니, 그 정도로 유행하는 품목이었는데 왜 저는 몰랐죠?”

“으음. 값이 비싸고 수량이 적어 구하기도 힘든 바람에 아직까진 고위 귀족가 레이디들 사이에서만 유행하는 모양이야.”

“레이디……. 하긴, 인형이니까요. 남자들보단 여자들에게 인기겠죠.”

“그래서 최근 레이디를 위한 선물용으로 제격이라고 하더구나.”

그 설명을 듣고 나자 저절로 바이칼의 시선이 에단에게로 향했다. 피식 웃더니 다시 절레절레 고개를 젓고, 다시 또 힐끔거리며 한숨을 쉬는 꼴을 가만히 내버려 두던 에단이 참다못해 입을 열었다.

“왜 그런 눈으로 보나?”

“아뇨, 뭐. 단장도 연애하실 때가 되긴 하셨죠. 그래요, 뭐. 사실 지금쯤 결혼하셔서 애가 하나쯤 있어도 이상할 나이가 아니죠.”

에단의 연령은 현재 스물하나다. 귀족가 사이에선 이르면 스물에도 결혼을 하긴 하지만 성인식이 19세인 것을 감안하여 일반적으로는 남자 나이 이십 대 중반, 여자 나이 이십 대 초반이 혼인 적령기였다.

그러니 바이칼의 깐죽거림은 그냥 놀림에 지나지 않았다. 건방지게 상관을 놀려대기 시작한 바이칼을 보며 에단이 슬슬 미간을 찡그렸다.

“……해서,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지?”

“흐흐. 단장, 우리 이쯤 되면 솔직히 말씀하시죠. 어느 레이디께 선물하시려고 알아본 건데요? 예?”

“알아본 게 아니라니까.”

“혹시 전 약혼녀님? 아니면 지난번 가면 파티 때 만난 영애들 중 한 분이신가요?”

“…….”

아무리 부정해 봤자 들어먹지 않을 땐 그냥 무시하는 게 답이었다. 에단은 더 이상 바이칼의 놀림에 응대하는 대신 다른 무기를 꺼내 들었다.

“돌아가면 밤샘훈련이다.”

“다, 단장! 잘못했습.”

“지금부터 한 마디 할 때마다 하루씩 늘어난다. 실시.”

“…….”

이번엔 바이칼이 죽은 조개처럼 입을 딱 다물 차례였다.

‘아마 단장과 사귀실 여자분은 대단한 인내심과 스스로에 대한 가학심을 갖추고 있을 게 분명해.’

바이칼은 속으로 그리 확신했다. 실제로 에단은 연애를 하고 있지 않았지만, 한다손 쳐도 연인을 위해 선물할 인형을 수소문할 정도로 다정한 성격이 아니었다.

그러던 중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바이칼과 에단, 크리스티나의 시선이 자신들이 모시는 주군에게로 향했다.

‘가만, 그럼 전하께선 왜 저 인형을 찾으시는 거지?’

친우들끼리 서로 놀리고 놀림받는 장면을 가만히 구경하고 있던 쥬다스가 그들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되돌아왔음을 느끼고 빙긋이 웃었다.

“같은 이유로.”

“에, 예?”

마치 독심술이라도 있는 양 넌지시 대답해 오는 쥬다스를 보며 바이칼이 당황하여 허둥거렸다.

“나 역시 선물용으로 구하려고 한단다. 얼라이브 돌.”

‘아. 황태자비 후보 말씀이신 건가.’

모두가 그리 이해했다.

“자, 크리스. 인형 좋아하십니까?”

“……?”

뜬금없이 이름을 불린 바람에 크리스티나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그러다 뭐라도 대답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뒤늦게 떠올랐다.

“네.”

기껏 예쁜 옷을 입어놓고선 딱딱한 표정과 대답밖에 나오지 않았다. 오늘따라 어찌나 바보 같은지 스스로가 답답할 지경이었다.

크리스티나가 속으로 한숨을 다섯 번쯤 쉬었을 때, 다시 쥬다스가 말했다.

“곧 본격적으로 시장이 활성화되면 얼라이브 돌을 구하러 갈 생각입니다. 그때까지.”

평범한 갈색으로 물들인 머리색과 달리 그의 황금빛 눈동자만큼은 전과 다름없이 빛났다.

“어떤 종류의 인형이 마음에 드실지 생각해 주십시오.”

진짜 약혼녀도 아닌 주제에, 진짜로 선물 받을 당사자도 아니면서 설레고 말았다.

‘바보같이.’

크리스티나는 떨리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질끈 눈을 감았다가 떴다. 여전히 부드러운 빛을 담은 금안이 똑바로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그녀는 애써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겠습니다.”

쥬다스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잘하고 있다는 칭찬의 뜻과 앞으로도 힘내자는 격려의 뜻이 함께 담긴 손길이었다. 그는 종종 이런 식으로 크리스티나를 아이 취급하곤 했다.

평소라면 그 손길을 반겼겠지만 오늘따라 크리스티나는 좀 더 감정적이 되어 고개를 숙였다.

‘……황태자비 후보는, 역시 좀 더 여성스러운 성격의 성숙한 레이디일까.’

그녀는 자신이 아이 취급을 받는 이유가 특유의 까칠한 성격 때문이라고 여겼다.

쥬다스는 분명 크리스티나보다 두 살이나 어렸는데도 그녀를 늘 아이처럼 다루었다. 반면 가면 파티에서 만난 그와 동갑인 18세 여성, 체칠리아 샬롯트에게 보이는 태도는 좀 달랐다. 어딘가 좀 더 정중했으며 퍽 다정해 보였다.

물론 첫 만남 자체가 정체를 숨겨야 할 상황인지라 태도가 정중할 수밖에 없었을 뿐 정작 쥬다스 본인은 체칠리아야말로 어린 소녀로 보고 선을 그었었다.

그 사실은 기대를 품고 지켜보던 바이칼이 가장 뼈저리게 느낀 부분이다.

그러나 크리스티나는 그 사실을 몰랐다. 발랄한 매력을 가진 체칠리아를 떠올린 그녀는 저도 모르게 쓴웃음을 입가에 머금었다.

“…….”

상대의 감정 변화를 예민하게 파악해낸 쥬다스가 순간 멈칫했다.

‘웃음이란 슬픔을 가리기에 가장 좋은 가면일 터.’

감정을 파악하는 데엔 성공했으나 문제는 왜 그녀가 갑자기 우울해졌는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그는 난처하게 손을 거두며 자문했다.

‘으음. 한데 왜? ……내가 무언가 실수한 게 있었나?’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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