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43 [ 외전 1 : 인형의 꿈 ] =========================================================================
이그레트 외전 3화
[외전 1 : 인형의 꿈]
전생에 현자라고 칭송받은 사내치곤 멍청하기까지 한 의문점이었다.
그를 연모하는 여인들에게는 불행히도, 쥬다스는 여인의 마음에 대해선 지독하게 무지했다. 그간 별로 알고자 하는 욕심도 없었으니 이런 상황에서 더욱 알 길이 없었다.
곰곰이 머릿속을 뒤져 봐도 무엇 하나 단서가 될 만한 게 떠오르지 않았다. 잠깐 사이 크리스티나는 다시 표정을 잘 갈무리한 상태였다.
굳이 스스로 드러내고 싶지 않아 하는 감정을 끄집어낼 생각까진 없었던 쥬다스는 그녀를 빤히 응시하다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그럼 그 전까지 허기를 좀 달래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예.”
“수도에서 파는 시장 음식. 드셔보신 적 있습니까?”
지난번 순례의 길을 떠났을 때엔 어쩔 수 없이 가끔씩 사 먹곤 했지만 수도에서는 처음이었다. 애초에 황궁이 있는 수도까지 와서 시장 음식을 사 먹을 신분들이 아니었다.
크리스티나뿐 아니라 에단과 바이칼도 당황한 눈길로 그를 쳐다보았다.
결국 언제나와 같이 그들은 이번에도 주군의 고집을 이기지 못했다. 표정이나 말투는 분명 부드러운데 도무지 거역하지 못할 분위기가 그에게 있었다.
그래서 세 명의 친우는 ‘길거리 음식 드시고 배앓이를 하시면 어쩌시려고!’ 따위의 조언은 해보지도 못하고 맥없이 끌려갔다.
“감자를 넣어 튀긴 빵에다가 또 소시지를 넣은 간식입니다.”
“저건 소 내장에 야채와 가느다란 면을 넣어 삶은 후 매콤한 소스에 함께 볶은 거래요.”
“누에나방 번데기를 물에 넣고 끓인…….”
하나같이 입맛이 뚝 떨어지는 레시피였다.
귀족은 염분이 가득 들어 있는 저가 소시지 따위를 먹지 않는다. 특히 벌레 번데기를 끓였다거나 내장을 먹는다거나 하는 부분에선 크리스티나의 안색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심지어 음식 투정을 거의 하지 않는 에단조차 움찔 놀랄 정도의 먹거리가 많았다.
과연 평민과 귀족의 상은 재료부터가 달랐다.
“드실 수 있겠습니까? 무리라고 생각하신다면 억지로 드실 필요는 없습니다.”
“……괜찮습니다.”
쥬다스는 시장 중턱에 마련된 간이테이블에 사 온 음식들을 풀어놓고 진지하게 일행의 의사를 확인했다. 그동안 어느 정도 길거리 음식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하고 있던 바이칼마저 머뭇거리게 되는 메뉴들이었다.
그러나 수년간 쥬다스의 독특한 행보에 단련된 그들은 겨우 그 정도에 겁먹지 않았다.
오히려 셋 중 가장 안색이 어두웠던 크리스티나가 제일 먼저 포크를 들었다.
‘돼지 발바닥…….’
쿡 찍혀 올라온 갈색 고기는 보기에도 영 껄끄러운 생김새였다. 원재료를 모르면 모르는 대로 불편했겠지만 알고 먹으려니 더 괴로웠다.
크리스티나는 평범한 귀족 아가씨라면 절대 손대지 않을 음식도 망설임 없이 입에 넣었다.
“어. 이거 의외로 맛있는데요?”
곁에서 같은 음식을 맛본 바이칼이 신기해하며 우물거렸다. 크리스티나와 에단도 그 의견에 동의했다. 다른 음식들도 마찬가지였다. 혐오스러운 재료들로 만들어진 음식이라 해도 막상 입안에 들어가니 그럭저럭 씹어 삼킬 만은 했다.
맛있다고까진 하지 못해도 ‘이 정도면 괜찮네’ 싶은 것들은 제법 있었다.
‘결국 사람이 먹는 음식이니.’
에단은 왁자지껄한 시장을 둘러보며 생각했다. 이런 식으로 잠행을 나올 때마다 쥬다스가 일부러 한 번씩 길거리 음식을 택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강요한 건 아니지만 함께 나온 일행은 늘 그 뜻에 따랐다. 음식이야말로 삶의 질을 평가하기에 좋은 잣대다. 누구나 먹을 수 있고 먹어서 탈이 안 나는 식재료라면 나쁘지 않다.
‘평민이 케이크와 쿠키, 값비싼 홍차를 간식거리로 음미하진 못할 테니까.’
무난하게 흘러간 식사시간 뒤에 그들은 슬슬 매대에 올라오기 시작한 물건들을 구경하러 돌아다녔다.
다니면서 신비한 인형 ‘얼라이브 돌’에 대한 정보를 묻는 것도 잊지 않았다. 다행히 상인들은 모두 그 인형에 대해 알고 있었다.
“얼라이브 돌? 요즘 대단한 인기지. 부르는 게 값이라데.”
“근데 언제 어디쯤에서 자리를 잡고 파는지는 도무지 알 수가 없어. 나타나는 시간이랑 파는 장소가 워낙 들쭉날쭉한 양반이라.”
“그래서 신비의 인형상단이라고도 부르지. 핫핫!”
수도의 시장은 넓고 복잡했다. 대부분 상인은 미리 자리를 맡아두고 같은 위치에서 장사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았다.
“점포는 따로 열지 않았습니까?”
“그러게 말이야. 거기 인형가게 주인이 자유로운 영혼인가 봐. 점포를 내면 이런 시장바닥에서 파는 것보다야 훨씬 장사가 잘될 텐데. 하긴, 지금도 없어서 못 파는 지경이라지만.”
쥬다스는 친절하게 정보를 알려준 자수 상인에게서 감사의 뜻으로 자수 물품 하나를 사 들고 돌아섰다. 노란 나비가 새겨진 얇은 손수건이었다.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모르는 비밀스러운 상인이라니. 그럼 위치를 어떻게 찾죠?”
바이칼이 머리에 깍지를 끼며 투덜거렸다. 그러자 쥬다스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대꾸했다.
“괜한 걱정을 하는구나.”
“옙?”
“바람이 모르는 장소는 없단다.”
휘익.
살랑이며 볼을 훑고 지나간 바람을 느끼고 바이칼이 멈칫하여 눈을 깜빡였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그냥 바람이겠거니 지나갔을 미풍이지만 그들 일행만큼은 그 바람에 섞인 익숙한 청량감을 알아보았다.
「다녀왔어!」
바람의 정령왕 유니였다. 몸소 시장 곳곳을 돌아다니며 쥬다스가 부탁한 일을 빠짐없이 해결하고 온 유니는 가볍게 계약자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헤헤.」
“고마워, 유니.”
「고맙긴! 믿어줘서 나야말로 기뻐.」
그러는 사이, 편리하긴 하지만 겨우 인형 찾는 일에 정령의 힘까지 사용할 줄은 몰랐던 바이칼이 슬쩍 에단의 귓가에 대고 속닥거렸다.
“단장. 역시 오늘 좀 이상하죠?”
“……?”
“주군 말입니다.”
“이상한 건 네놈의 정신머리다. 감히 주군을 상대로 망언을 하려 들다니.”
“으익! 잠깐만요, 아오. 그 뜻이 아니라고요. 들어봐요, 좀!”
부관이고 나발이고 그대로 베어버릴 듯한 기세에 찔끔한 바이칼이 맹렬히 두 손을 내저었다. 그리고 한 층 더 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전하께서 크리스티나 님께 보이시는 태도가 오늘 좀 다르지 않느냔 뜻입니다.”
“…….”
에단은 말없이 검 손잡이에 올렸던 손을 내렸다. 사실 이런 일에 둔감한 그 역시도 어느 정도 눈치는 챈 상태였다.
“약혼녀라는 역할도 그렇고. 선물로 인형을 알아보신 것도 그렇고. 오늘 시장에 나와서 내내 챙겨주고 계신 것도. 게다가 어지간해선 눈에 안 띄게 숨기시던 정령까지 사용하고 계시잖아요.”
바이칼의 추리력은 날로 고강해져 갔다. 어느새 에단도 진지한 얼굴로 그 추리를 듣고 있었다.
“보세요. 이건 마치 잠행이 아니라 데이트코스 같단 말이죠.”
이번에도 부정할 수 없었다. 평소 황태자가 잠행을 나간다 했을 때엔 명확한 목적이 있게 마련이다. 비리를 저지르고 있는 귀족, 불법도박이나 불법 노예거래, 항소를 올렸으나 무시당한 평민의 호소 등. 그가 살펴야 할 대상이 분명했다.
그런데 오늘은 그런 목적 없이 시장을 구경하고 인형을 사러 가겠다는 소소한 일정이 끝이었다.
이쯤에서 바이칼은 확신했다.
“혹시 말이죠. 전하께서 말씀하셨던 그 ‘황태자비 후보’가…….”
말이 끝까지 이어지지는 않았으나 두 사람의 시선은 같은 여인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사람이 바글바글한 시장에 와서까지 단 한순간도 쥬다스로부터 눈을 떼지 못하는 크리스티나 R.델피아.
그녀의 지고지순한 외사랑은 이미 본인만 감추려고 애쓸 뿐 주변 사람들은 다 눈치채고 있었다.
“친구 좋다는 게 뭡니까?”
“흠.”
“기왕 이렇게 된 거 우리도 좀 밀어드리죠.”
평소라면 ‘쓸데없는 소리’라며 칼같이 무시했을 에단도 이번만큼은 바이칼의 의견을 묵인했다.
주군의 애정 전선을 응원하는 것도 충정의 일환이다.
* * *
쥬다스 일행은 곧 바람의 안내를 따라 인형가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제 막 문을 열었기 때문에 인형들이 아무렇게나 잔뜩 쌓여 있는 천막에는 아직 손님이 보이지 않았다. 천막 바깥에 널려 있는 인형들은 움직이거나 소리를 내지 않았다. 바이칼이 인형 하나를 집어 올려 이리저리 살폈다.
‘여기 있는 건 얼라이브 돌이 아닌가 본데.’
“앗. 손님이신가요?”
천막 안에서 나온 이는 젊다 못해 아직 일을 하기에는 어려 보이기까지 한 소녀였다.
짙은 남색머리카락을 길게 길러 한 줄기로 땋아 내렸고, 파란 눈동자는 동글동글하여 선한 인상을 주었다.
전체적으로 얼핏 델피아 가문의 바다빛 머리카락을 떠올리게 하는 푸른 색감이다. 물론 지금 인챈트로 감춘 크리스티나의 머리색에 비하면 한없이 채도가 낮고 반짝거리지도 않는 평범한 머리색이었다. 그녀는 이제 갓 성인식을 치른 쥬다스보다 서너 살은 더 어려 보였다.
“안녕하세요. 헤헤, 인형상인 ‘프시케’입니다. 어떤 인형을 찾으시나요?”
“어…….”
밝게 웃으며 인사해 오는 인형상인 프시케를 보며 바이칼이 말을 더듬었다. 그 대신 에단이 나서서 상황을 정리했다.
“주인께서 얼라이브 돌을 찾으신다.”
“아, 얼라이브 돌은 안쪽에 있답니다. 귀한 분들께 보여드릴 솜씨는 아니지만요. 들어오시겠어요?”
상대가 귀족임을 눈치챘음에도 소녀의 싹싹한 태도에는 변화가 없었다. 이를 의심스럽게 쳐다보던 바이칼도 이내 수긍했다.
‘하긴. 귀족 여성들 사이에서 인기가 좋은 인형이라 했으니 익숙할 만도 하겠네.’
“어라? 손님. 그거 ‘신룡 플루비’ 아니에요?”
바이칼은 불쑥 치고 들어온 인형상인의 질문에 헉 숨을 들이켰다. 프시케가 반짝이는 시선으로 그의 가슴팍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을 따라 고개를 내려 보니 어느 틈엔가 로브 자락에서 머리를 빼꼼 내놓고 바깥을 구경하고 있는 플루비가 보였다.
“그, 이건, 그러니까.”
“에헤헤. 이미 하나 구매하셨구나. 신룡 플루비는 제 자신작이죠! 세트상품으로 ‘신룡의 기사님’도 있는데 그건 안 필요하세요?”
“……?”
그제야 바이칼은 돌아가는 상황을 눈치챘다.
프시케는 플루비를 인형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게다가 저 인형상인이 그와 플루비를 본떠 만든 인형을 세트상품으로 팔고 있다는 사실까지.
황당함으로 굳어버린 그를 향해 쥬다스가 웃으며 덧붙였다.
“온 김에 네 플루비에게 세트를 맞춰주는 것도 좋겠구나. 칼.”
“……예, 뭐. 그러게요. 세트.”
바이칼은 졸지에 한 세트가 되어버린 플루비를 침통하게 내려다보았다. 파트너의 슬픔도 모른 채 블루와이번이 좋다고 삑삑 울어댔다.
천막 안으로 들어가자 시야가 살짝 어두워졌다. 싸구려 마법 등을 밝혀놓긴 했지만 햇빛만큼의 효과는 내지 못했다.
어둑어둑한 내부에는 바깥에 진열된 인형들보다 훨씬 많은 양이 놓여 있었다.
“손님. 얼라이브 돌은 어떤 형태를 원하시나요? 인간? 동물? 몬스터?”
프시케는 익숙하게 손님의 취향을 물었다. 쥬다스는 직접 답하는 대신 크리스티나를 돌아보았다.
“어떤 걸 고를지 생각은 해보셨습니까?”
“아.”
“와아, 연인분께 드릴 선물인가요? 정말 부러워요!”
상인은 연인으로 온 손님을 만났을 때 가장 신나는 법이다. 이런 곳까지 와서 제 연인을 위해 지갑을 열지 않는 남자란 본 적 없다.
프시케의 열렬한 지원에 크리스티나는 더욱 당황하고 말았다. 늘 차갑고 도도하게 살아온 그녀는 인형 같은 걸 선물로 받아본 적이 드물었다. 심지어 어릴 적 부모나 오라비가 가져온 인형들조차 전부 필요 없다며 거절하여 창고로 들어갔다.
그러니 크리스티나가 어떤 인형이 있고 무슨 종류가 인기가 있는지 알 리 없었다.
결국 그녀는 자신이 알고 있는 유일한 대상을 지목했다.
“시, 신룡 플루비를.”
“역시 신룡 플루비와 신룡의 기사님 세트가 최고죠! 아가씨, 보는 안목이 굉장히 드높으시네요.”
뒤에 서 있던 바이칼의 표정은 두 배로 침통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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