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44 [ 외전 1 : 인형의 꿈 ] =========================================================================
이그레트 외전 4화
외전 1 : 인형의 꿈
“꾸옥! 꾸옥!”
와이번 우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발을 딛자마자 순식간에 와이번 인형에 둘러싸인 일행은 마치 닭장에 들어온 기분이었다.
“꾸오옥!”
“삐…….”
정작 블루와이번인 플루비는 와이번 인형을 보고 오들오들 떨었다. 그런 플루비를 품에 안아 든 바이칼이 투덜거렸다.
“어우야, 여기 진짜 무섭네요.”
“쁘이익!”
“그래, 그래. 네 심정이 내 심정이다.”
주홍빛 눈망울 가득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플루비가 바이칼의 품을 파고들었다. 평소에는 그렇게 로브 밖으로 나오고 싶어 하더니 지금은 그 반대였다.
바이칼은 플루비를 익숙하게 안아 든 채 궁둥이를 토닥여 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거위처럼 꿱꿱거리는 와이번 인형들은 간혹 날개를 흔들긴 했지만 날아다니지는 못했다.
“신룡 플루비는 근처에 있는 사람을 자동으로 졸졸 따라다니는 귀여운 인형이랍니다. 애교가 많아 살아 있는 펫보다 훨씬 인기가 좋아요.”
와이번 인형들을 지나치자 이번엔 사람을 본떠 만든 얼라이브 돌이 선반 위에 주르륵 나열되어 있었다. 사람 형태의 인형은 갓난아기처럼 작은 것에서부터 가장 큰 것이 서너 살 어린아이 정도의 크기까지 있었다.
인형에는 별 관심이 없던 크리스티나였지만 진짜 사람처럼 보이는 얼라이브 돌에게서는 좀처럼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꼭 살아 있는 사람 같아.’
그렇게 생각한 순간 한 인형이 시뻘건 눈알을 도르륵 굴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흠칫 어깨를 떠는 크리스티나에게 프시케가 친절히 권했다.
“한번 만져 보시겠어요?”
“아.”
아니라고 거절하려던 크리스티나는 문득 곁에 있는 쥬다스에게 생각이 미쳐 입을 다물었다.
‘인형을 고르러 오셨다 하였지.’
그렇다면 성심성의껏 가장 좋은 품질의 인형을 고르도록 도와주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크리스티나는 한숨을 속으로 삼키고 손을 뻗어 선반 위에 있던 빨간 눈알의 인형을 집어 들었다. 그러곤 인형의 생김새나 무게 등을 따져보기 위해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하마터면 깜짝 놀라 인형을 떨어뜨릴 뻔했다.
“크리스?”
곁에 선 쥬다스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크리스티나가 인형의 가슴을 짚어보며 입을 열었다.
“……이 얼라이브 돌은, 심장이 뛰는군요.”
그녀는 말을 하면서도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인형에서 느낀 사람의 온기는 무척이나 불쾌했다.
“꼭 진짜 살아 있는 사람처럼.”
“앗, 알아차리셨어요? 그건 말이죠, 다른 인형에서는 볼 수 없는 얼라이브 돌만의 자랑이에요.”
그 소리는 아기 심장 소리처럼 작아서 어지간한 사람들은 알아차리기 힘든 얼라이브 돌만의 특징이었다.
크리스티나가 예민한 편인데다가 평소 무예도 놓치지 않고 훈련한 성과가 의외의 장소에서 드러난 셈이었다.
“그런 기능을 어떻게 만들어낸 거지?”
유심히 인형들을 살피던 에단이 불쑥 물었다. 상인 프시케는 친절한 웃음과 함께 성실히 질문에 대한 답변을 하기 시작했다.
“그렇지 않아도 손님들이 많이 궁금해하셔요. 제작 과정을 자세히는 알려드릴 수 없지만, 전혀 위험하지 않답니다.”
“그것을 어떻게 장담할 수 있나? 귀한 아가씨께서 쓰실 인형이다. 혹여 해라도 입으신다면…….”
“꺄아, 아가씨의 기사님이신가요? 멋져요. 정혼자에 기사님까지! 정말 사랑받는 아가씨신가 봐요.”
상인의 호들갑에 크리스티나는 민망한 기분이 들어 시선을 내리깔았다. 사람들의 칭찬이야 늘 들어 익숙했지만 지금처럼 누군가의 연인으로 보호받은 적은 드물었다.
그녀는 언제나 당당한 델피아의 딸이었고 누구에게도 뒤처지지 않는 기개와 품위를 갈고 닦으며 자라왔다. 원래 같았으면 에단과 함께 날카롭게 상황을 살펴 지적했을 크리스티나였지만, 이번만큼은 무리였다.
“인형을 제작할 때 사용한 기법은 일종의 정령술이거든요.”
“……정령?”
쥬다스를 제외한 모두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주변에 모습을 숨긴 정령들이 까르륵 웃으며 반응했지만 쥬다스는 모른 척 끼어들었다.
“정령을 인형 안에 넣은 겁니까?”
“어머, 그건 아니에요. 정령은 귀한 존재잖아요. 그것보다 더욱 간편한 방법이 있답니다. 정…….”
“정령석이로군요.”
순간 프시케의 웃는 눈매가 매서워졌다. 쥬다스는 주변에 널려 있는 인형 중 하나를 훌쩍 집어 들었다.
어린 아기를 본 따 만든 얼라이브 돌이었다.
“한데 평범한 정령석은 아닌 모양입니다.”
“평범하지 않다니요?”
“일반적인 정령석은 정령의 힘을 저장해 놓고 필요할 때마다 사용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합니다.”
“어머나.”
프시케는 그의 손에 들린 얼라이브 돌을 살며시 빼앗아갔다. 파란 눈동자가 무언가를 들킨 사람처럼 초조하게 번뜩였다.
“손님, 정령에 대해 잘 아시는 것 같은데.”
“정령술사입니다.”
“역시! 그러셨구나.”
소녀 상인은 방글방글 웃으며 박수를 쳤다.
“그래서 알아보셨군요? 처음부터 조사하고 오셨나 봐요. 어디, 황실에서 나오셨어요?”
갑자기 확 달라진 상인의 태도에 바이칼과 에단도 이상한 분위기를 눈치채고 표정을 굳혔다. 그들의 손이 소리 없이 스르륵 무기 손잡이로 향했다.
크리스티나도 손을 뻗어 검을 찾다가 오늘은 하늘하늘한 원피스 차림임을 자각하고 움찔 미간을 좁혔다. 홀로 태연한 쥬다스만이 프시케의 사나운 반응에 대처했다.
“정령술사들은 당신이 인형에 사용한 물건을 정령석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차가운 빛을 담은 금안이 소녀를 내리누르듯 응시했다.
“‘사령석’이라고 부르지요.”
“……!”
사령석, 즉 타락한 사령의 힘이 깃든 돌.
자연의 힘을 간직한 정령석과 다르게 사령석은 살아 있는 자들의 생기를 빨아들여 죽음에 이르게 한다. 이 사령석은 최근에서야 밝혀지고 있는 암흑 물질이다.
쥬다스가 황태자 자리에 오른 후로 그의 지도하에 루바르잔 제국 내에서 사령술사 자체는 숫자가 많이 줄었다.
그러나 이 사령석은 정령석과 마찬가지로 사령술사가 아닌 자들도 누구나 손쉽게 이용할 수 있기 때문에 퍼지는 속도가 빨랐다.
“쳇!”
일이 틀어졌음을 느낀 프시케가 인형이 잔뜩 쌓여 있는 선반을 확 밀쳐서 넘어뜨렸다.
우르르 쏟아지는 인형 사이로 에단이 검을 뽑아 선반을 빠르게 베어 넘겼다. 프시케가 남색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인형들 사이로 도망가고 있었다.
“토니.”
「헤헤~. 맡겨 달라요. 범인은 나요가 잡는다요!」
황토색으로 빛나는 정령이 휘익 날아올랐다.
까드득!
사탕 깨지듯 경쾌한 소리와 함께 천막이 반으로 갈라졌다. 천막을 지탱하고 있던 기둥이며 지반이 모조리 부러지고 뒤흔들린 탓이었다.
갑자기 천막이 무너지자 시장에선 비명 소리와 함께 소란이 일어났다.
“사, 사람 살려어!”
흙바닥에 머리와 팔만 남겨놓고 꽁꽁 파묻힌 프시케가 공포에 질려 눈물을 뚝뚝 흘렸다.
무너진 천막을 뒤로한 채 바람의 보호를 받아 멀쩡하게 걸어 나온 쥬다스가 그녀의 앞에 섰다.
“이익, 이거 놔! 풀어달란 말이야!”
“나라에서 법으로 금한 사령석을 어찌 손에 넣었는지에 대해서는.”
스릉!
에단의 검이 가느다란 목에 겨누어졌다. 피부에 맞닿는 차가운 금속의 느낌에 소녀가 입을 합 다물었다.
바닥에 하체가 파묻힌 채 하얗게 질린 인형상인 프시케를 내려다본 쥬다스가 부드럽게 선고했다.
“재판소에 가서 천천히 얘기하자꾸나.”
후두둑.
그녀의 눈앞에 배가 갈린 인형들이 떨어졌다. 그리고 그 안에서 꺼낸 흑요석처럼 검은 돌덩이들이 쥬다스의 손바닥 위에서 빙그르르 돌았다.
사령석을 장난감 다루듯 가볍게 손에 쥔 그를 보며 프시케는 울상을 지었다.
“아…….”
꼼짝없이 현행범으로 붙잡히게 된 인형상인은 소동을 발견하고 달려온 수도 경비대에게 끌려갔다.
“어흐, 놀랐습니다. 전하.”
바이칼은 혹시나 싶어 꺼내 들었던 스태프를 품에 갈무리하며 쥬다스에게로 다가왔다.
“오늘 나오신 목적이 이거였군요. 사령석이라니, 전혀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전 중간부터 무슨 귀신의 집에 온 줄 알았지 뭡니까?”
“하하. 이런, 많이 놀랐느냐?”
바이칼의 호들갑에 쥬다스는 미안한 미소를 지었다.
“전하.”
에단이 다가와 상황을 보고했다.
일단 오늘 하루는 시장 통행을 막았다. 무너진 천막에는 기사들이 들어가 인형들을 일일이 수거하고 있었다. 얼라이브 돌이 유통되는 과정에 대해서 즉시 조사관이 파견되어 다른 지역에서도 최대한 빠르게 인형을 수거할 예정이라 하였다.
준비해 둔 대로 일사천리로 돌아가는 상황을 듣고 고개를 끄덕인 쥬다스가 문득 주변을 휘 둘러보았다.
“왜 그러십니까?”
“……에단, 바이칼. 크리스티나는 먼저 돌아간 것이냐?”
“예?”
두 기사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그들은 빠르게 주변을 눈으로 훑고는 고개를 저었다.
“송구합니다, 전하. 공녀로부터 따로 언질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그러고 보니 천막에서 빠져나온 이후로 계속 보이지 않으셨죠.”
분명 천막을 빠져나올 때에는 함께였다. 그런데 이상하게 상황이 정리될 즈음부터는 누구도 그녀를 본 사람이 없었다.
턱을 짚은 채 수하들의 이야기를 듣던 쥬다스가 가볍게 허공에 손을 휘저었다. 녹색 바람이 그 손짓을 따라 무지개처럼 은은하게 빛났다.
“유니. 그 아이의 행방을 찾아줄래?”
「응! 크리스티나라는 여자아이 말이지?」
녹색 바람이 폭죽 터지듯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갈래갈래 찢어졌던 바람은 일제히 방향을 돌려 되돌아왔다.
「어.」
「에엥. 왜 찾으러가다 만다요?」
「가만 있어 봐.」
유니는 골똘한 표정으로 주변을 빙글 맴돌았다. 그러더니 난리 통에 바닥에 떨어져 있던 한 인형 위로 조심스럽게 내려앉았다.
눈을 감은 채 축 늘어져 있는 인형은 꼭 잠든 어린아이 같아 보였다.
「저기, 이그레트. 이거…….」
「그냥 인형이잖아요?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건가요?」
유니가 긴가민가하여 말을 잇지 못하고 있자 카니도 그녀의 곁으로 파라락 날아들었다.
「그냥 인형이 아니야.」
「뭐다요. 어어엄청 특별한 인형이다요?」
「아니아니, 특별하다기보단! 어음. 그러니까.」
한 차례 말을 고르던 유니가 인형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어쩌면 이건 인형이 아니라.」
그 순간 인형이 반짝 눈을 떴다. 그러면서 벌떡 일어난 인형 때문에 그 위에 앉아 대화하던 정령들이 와그르르 떨어졌다.
방심하고 있다가 간신히 흙바닥에 뒹굴기 직전에 날개를 파닥여 날아오른 유니가 끄응 앓는 소리를 내며 인형을 휙 가리켰다.
「이 아이가 크리스티나인 것 같아.」
“……응?”
그날, 처음으로 그의 태연함이 깨졌다.
눈을 뜬 인형이 당황으로 굳어진 쥬다스의 얼굴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인형의 눈동자 색은 물결치듯 파도를 연상케 하는 어여쁜 푸른빛이었다.
푸른 눈동자를 가진 인형이 조그맣게 입술을 달싹였다.
“쥬다스 님?”
“…….”
쥬다스뿐 아니라 정령들의 이야기를 듣지 못한 에단과 바이칼의 표정도 단단히 굳었다.
“이, 인형이 이젠 말도 합니까?!”
“인형? 누가…… 그보다 왜 다들 크기가…….”
아름다운 바닷빛 머리카락을 가진 자그마한 인형이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중얼거리다가 이내 멍하니 두 손을 들었다. 서너 살 아기처럼 자그마한 몸과 짧은 팔다리가 보였다.
「있지, 아무래도 저 인형 속에 크리스티나란 아이가 갇혔나 봐.」
유니가 난처한 어조로 상황을 결론지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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