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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그레트-246화 (246/252)

00246  [ 외전 1 : 인형의 꿈 ]  =========================================================================

이그레트 외전 6화

외전 1 : 인형의 꿈

잠시 망설이던 크리스티나는 용기 내어 먼저 말을 걸었다.

“전하, 안색이 좋지 않으십니다.”

“……크리스티나.”

쥬다스는 인형을 품에 안은 채 두 번째 한숨을 쉬었다. 그러곤 인형이 되어버린 크리스티나를 똑바로 내려다보며 사과했다.

“미안하구나.”

“아닙니다.”

모습은 인형이라도 딱 부러지는 음성은 여전했다. 크리스티나는 칼같이 그의 사과를 부정했다.

“임무 상황에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던 제 불찰입니다. 전하께서 심려하실 일이 아닙니다.”

위로해 주고 싶었는데 딱딱한 어조밖에 나오지 않았다. 크리스티나는 난생처음으로 자신의 차가운 말투와 재간 없는 성격이 원망스러워졌다.

그녀는 자신이 저주받은 상황에서도 쥬다스를 걱정하고 있었다. 어쩌면 평생 원래대로 돌아갈 수 없을 거란 두려움보다 그의 표정이 무너지는 게 훨씬 가슴 아팠다.

쥬다스는 여전히 부드러운 표정이었지만 크리스티나는 이를 보자마자 알았다. 그가 감정을 속으로 감출 때 짓곤 하던 쓰라린 미소다.

“하오니.”

그 표정을 본 크리스티나는 충동적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 자책하지 마십시오.”

“…….”

그녀의 서투른 위로를 들은 쥬다스가 의외라는 듯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가까운 거리에서 자신을 담고 있는 맑은 금안을 보자 크리스티나는 그제야 부끄러움이 몰려와 확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 보니 아, 안고 계셨지.’

비록 인형의 모습이라곤 하나 살면서 남자의 품에 안겨 본 적은 처음이었다. 게다가 평소 늘 한 걸음 뒤에 물러서 있던 것과 달리 지나치게 가까웠다.

그 사실을 인지하고 나자 지금껏 그에게 말을 건넬 수 있도록 지탱해 주던 용기가 손에 쥔 모래처럼 사라락 빠져나갔다.

“아.”

그러나 고개 숙인 그녀에게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는 건 쥬다스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이 아이에게 그런 표정을 보였던가.’

속을 읽힌 건 오랜만이었다. 특히 부정적인 감정일수록 남들에게 드러나지 않도록 각별히 신경을 써서 감추는 편이었다. 그건 오랜 세월 쌓아 올린 견고한 벽과 같은 습관이었다.

‘왜?’

크리스티나를 비롯한 세 친우와 사이가 가까워지면서 그 습관이 간혹 무뎌질 때가 있음은 그도 알고 있었다.

한평생 현자라 불리며 살았던 그라 해도 이런 일에는 익숙하지 않았다. 오히려 사람과 사람 사이 감정 교류에 한해서만큼은 그는 어린아이처럼 무지했다.

각자의 상념에 사로잡히는 바람에 둘 사이에는 한참이나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그…… 리 말해주어 고맙구나.”

“아, 아닙니다.”

어색한 대화를 마지막으로 쥬다스는 그녀를 안아 든 채 책상으로 향했다. 그는 크리스티나를 다시 책상 위에 올려주고 자리에 앉아 사제 파견을 요청하는 편지를 썼다.

쥬다스가 교황청에 보낼 편지를 작성하는 동안 크리스티나는 책상 위를 두리번거리며 구경했다. 인형이 되었지만 움직임에는 큰 불편이 없었다. 그녀는 치마를 두 손으로 꼭 부여잡고 살며시 일어나 가지런히 쌓인 책더미를 살펴보았다.

‘책상도 딱 전하의 성격 그대로네.’

깃펜은 깃펜끼리, 서류는 각 종류별로 파일에 꽂혀 있다. 평상시 즐겨 읽는 서적은 따로 손이 잘 갈 수 있도록 한편에 정리된 책상 위는 무척 정갈했다.

‘오라버니 방은 정신없었는데.’

델피아 공작가의 장남 알시오스. 그는 아버지의 대를 잇는 유능한 공작후계자로 명성을 떨치고 있었지만 늘 일에 치여 살다 보니 방 안이 몹시 지저분했다.

서류는 오리 깃털처럼 사방팔방으로 날아다녔고 펜은 잉크병에 꽂아두지도 못해 데구루루 굴러 바닥에 떨어져 발로 밟아 부러뜨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읽다만 서적이나 가끔 취미로 조립한 건물 모형 등이 책상 위에 잔뜩 널브러져 있곤 했는데 또 거기에 남이 손대는 걸 죽도록 싫어했다.

크리스티나가 보기엔 온갖 물건이 엉망진창으로 쌓여 더럽기만 한 방이었는데 그녀의 오빠인 알시오스는 다 자기만의 위치가 있다는 알 수 없는 소릴 하곤 했다.

그리고 그건 존경하는 아버지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알시오스만큼은 아니었지만 델피아 공작도 서류나 물건을 제법 이리저리 널어놓고 처리하는 성격이었다.

그래서 크리스티나는 남자들 방은 전부 그렇게 정신없고 더러운 줄 알았다.

신기한 기분으로 책상 위를 구경하던 크리스티나의 눈에 익숙한 책 표지가 하나 들어왔다.

‘루바르잔 경제학원론…….’

그리운 느낌이 들어 손을 뻗어 표지를 훑었다. 원래 루바흐에서 수석을 차지하던 그녀가 처음으로 쥬다스에게 밀렸던 과목이었다.

그 과목을 기점으로 크리스티나는 모든 과목에서 연패 행진을 당했다. 문과 부문 전 과목 수석이 크리스티나에서 쥬다스의 이름으로 바뀌어버린 게 바로 그날 성적 발표에서부터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녀는 몰랐다.

‘당신의 뒤를 쫓는 게 당연하게 될 줄은.’

닿을락 말락 표지에 적힌 책 제목을 손끝으로 훑고 있는 그녀의 머리 위에서 순간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경제학 수업은 과제가 지나칠 정도로 많아 학생들이 버거워했었지.”

“……!”

“나 역시 당시 놓친 것이 많아 다시 차근차근 읽어보고 있단다.”

편지를 마무리 짓고 자리에서 일어선 쥬다스였다. 크리스티나는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다 의아함을 느껴 입을 열었다.

“전하께서도 놓친 것이 있으셨나요?”

“그럼. 수업에서 다루는 것만이 학문의 전부는 아니라서 말이야.”

루바르잔 경제학원론은 딱 루바흐에 다닐 만한 아이들이 읽는 기초서적이다. 쥬다스는 그 책을 집어 들어 다시 책꽂이에 꽂아두었다.

“내가 다루어야 할 영역은 이론이 아닌 현실이지만.”

책상 위에 있던 책을 전부 정리한 그가 부드럽게 말을 맺었다.

“현실에 다리를 놓아주는 건 이론이니까.”

“그렇군요. 저는 이론은 그저 학문을 쌓는 기초라고만 생각했었는데 부끄럽습니다.”

크리스티나도 그를 따라 책장을 올려다보며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전하.”

쥬다스는 책상 위에 서 있는 작은 인형의 부름에 시선을 마주했다.

“처음 전하께 밀렸을 때.”

루바흐 학원 시절 얘기였다. 가만히 귀 기울여 들어주는 그를 향해 크리스티나는 차근차근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솔직히 조금 분했습니다.”

“그랬구나.”

“예. 그땐 세상에서 제가 제일 잘난 줄 알고 있었으니까요.”

부끄러운 과거지만 당당히 입 밖으로 얘기할 수 있는 이유는 상대가 쥬다스였기 때문이다. 어떤 추한 모습이라도 그의 앞에서는 허물이 될 수 없다. 쥬다스는 그런 존재였다.

“무조건 제가 한 노력이 최고라고 생각했습니다.”

크리스티나는 질끈 눈을 감았다. 인형의 몸으로도 민망함에 얼굴이 홧홧해지는 느낌이었다.

“모든 것이 다 하찮아 보였지요. 다른 이들의 노력 따윈 유치하고 부질없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 얼마나 건방진 생각인지 모르오나.”

“크리스티나.”

“언제나 치열하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하여, 델피아의 명예에 걸맞은 딸이 되자고.”

그녀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작게 중얼거렸다.

“그건 사실. 인정받고 싶어서였어요.”

완벽해 보이는 일상을 유지하여야만 인정받는다고 여겼다. 드높은 지위를 가진 부모가 그러했고, 그 지위를 이어받을 오라버니가 그러했다. 모든 것이 완벽한 가운데 그녀 혼자 흐트러질 수는 없었다.

크리스티나는 아주 어릴 적부터 보이지 않는 시선들로부터 완벽을 강요받았다.

“루바흐에서 전하께 밀리고 나서부터는 오히려 마음이 편해지더군요.”

‘완벽하지 않아도 돼. 치열하게 살지 않아도 괜찮아.’

1등이 아니어도 자신을 온전히 바라봐 주는 사람들이 있다. 인정받는 게 목적이라면 그녀는 이미 그 목적을 달성했다.

도리어 치열하게 사는 것이 가슴 아픈 일이라는 걸 어린 시절 핍박받던 그를 알게 되며 느꼈다. 그가 원한 건 황제의 후계자 자리가 아니었을 것이다. 어쩌면 따뜻하게 자신을 감싸줄 어미가 곁에 있기만을 바랐을지도 모른다.

‘산꼭대기에 원하는 보상이 없다면 모든 걸 버리고 정상에 오를 필요는 없지.’

그래서 그녀는 목적 없는 등산을 그만두었다.

“그리 결심하기까지 많이 힘들었겠구나.”

크리스티나는 울컥한 심정으로 눈을 떴다. 따뜻한 빛을 담은 금안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런 사람이었다. 자신이 이야기하면 가만히 들어주는 사람, 힘들다 이야기하면 그 힘든 마음을 다독여 주는 사람. 그게 자신이 모시는 주군이었다.

‘인형이라 다행이야.’

사람 모습이었다면 이렇게 본심을 전부 내보이기는 어려웠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얼굴이 빨개지고 어린아이처럼 눈물이 흘러 첫마디도 제대로 마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다행히도 딱딱하고 뽀얀 볼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런데 지금도 저는…….”

‘다른 무엇보다도, 당신에게 인정받기 위해 계속.’

인형일 뿐인데 심장이 찬 바닥에 뚝 떨어진 것처럼 아팠다.

“……죄송해요, 전하.”

크리스티나는 인형으로 변한 현실에 기대어 속내를 토로하려는 자신이 너무나도 초라하게 느껴졌다.

“이기적이네요, 저.”

차마 더 이상은 마주 보고 있을 수 없어 시선을 책상 위로 늘어뜨렸다. 기껏 벗어났던 침묵이 다시 또 밀물처럼 밀려와 방 안을 채웠다.

이번에 그 침묵을 깨뜨린 건 쥬다스였다.

“영민한 너라면 알아차렸으리라 생각하였건만.”

크리스티나는 어리둥절한 심정으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어딘가 곤란한 표정으로 망설이던 쥬다스가 이내 하는 수 없다는 듯 빙긋이 웃었다.

“흠. 그래, 네 이야기를 들었으니 나 역시 솔직히 말하마. 오늘 내가 궁 밖으로 나갔던 이유 중 하나는…….”

그가 말끝을 흐렸다.

물론 크리스티나도 이번 외출이 단순한 잠행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전하께선 적어도 이 루바르잔에서만큼은 사령술을 몰아내고자 하시니까.’

사령에 대한 정보는 쥬다스의 권위에 종속된 ‘할더’라는 사령술사가 끝도 없이 물어 날랐다. 사령을 다루는 자가 사령의 꼬리를 잡아다 주니 누구보다 빠른 대처가 가능했다.

덕분에 루바르잔 제국 내에서는 이제 사령술에 관련한 모든 것이 뿌리째 뽑혀 나가는 중이었고 이번 잠행 역시 그 일환이었다.

그리 생각하고 있던 크리스티나의 귓가로 의외의 한마디가 들려왔다.

“너란다.”

크리스티나는 순간 자신이 인형이 되는 과정에서 청각 기능이 잘못된 게 아닐지를 의심했다.

“예……?”

“네 보기에 쥬다스 E.루바르잔 아르키디온. 이는 어떤 사람이라 생각하느냐?”

인형의 동그란 눈이 더욱 크게 뜨여졌다. 입술을 파르르 떤 크리스티나가 황망한 기색으로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바다 빛깔 머리카락이 찰랑였다.

“어, 어찌 제게 그런 하문을 하십니까? 전하.”

“괜찮으니 답해 보려무나.”

괜찮지 않은 쪽은 크리스티나였다. 하지만 그녀는 차마 그렇게 반박하지는 못하고 치마를 꼬옥 그러쥐었다.

어떤 사람이냐 물었을 때 당장 떠오르는 이미지는 많았다.

“전하께오선…….”

하지만 그중 그녀가 표현할 수 있는 말이라곤 고작.

“훌륭한 주군이십니다.”

그 한마디뿐이었다.

물 없이 퍽퍽한 빵을 100개쯤 목구멍으로 씹어 삼킨 기분이 들었다. 크리스티나는 자기가 말을 하고도 혼자 울상이 되어버렸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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