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48 [ 외전 1 : 인형의 꿈 ] =========================================================================
이그레트 외전 8화
외전 1 : 인형의 꿈
세이지는 특별한 일이 있어 방문한 게 아니었다.
“마침 좋은 찻잎을 들여와서 가져와 봤습니다.”
근래 세이지는 타국과의 거래에 관심을 많이 기울이고 있었다. 지난번 순례의 길을 함께 다녀온 영향을 받아 소극적인 태도를 벗어던진 아이는 외교에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
그러자 쥬다스는 중요 물자를 거래하는 일을 그에게 맡겼고, 세이지는 형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일을 처리했다.
그리고 이렇게 담소를 나누러 오면서 자신이 한 일에 대해 확인받곤 했다.
“차?”
“네, 심신을 안정시키고 숙면을 취할 수 있게 해주는 효과가 있다고 하여.”
세이지는 하녀를 시키지 않고 직접 투명한 유리로 만들어진 다기를 쟁반에 얹어다 책상 앞으로 가져왔다.
쥬다스와 함께 있던 에단과 바이칼은 자리에서 일어나 황자를 향해 가볍게 예의를 갖췄다.
“오, 이거 향이 참 좋은데요?”
뜨거운 물을 쪼르륵 따르는 걸 지켜보던 바이칼이 코를 킁킁거렸다.
일반적인 차에서는 강한 향이 나지도 않을뿐더러 씁쓰름하거나 맑은 풀내음이 나게 마련이다. 그런데 세이지가 가져온 찻잎에서는 뜨거운 물을 붓는 순간 훅 달콤한 향이 퍼졌다. 마치 향초를 켠 듯 방 안이 온통 향기로 가득 찼다.
단순히 향에 감탄하는 바이칼과 달리 에단이 다소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
“숙면을 취할 수 있게 돕는다는 말씀은, 수면 성분이 들어 있다는 뜻입니까?”
“강하진 않지만 약간은?”
답하고 보니 형에게 무슨 수면제를 타서 주는 기분이 든 세이지가 황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하, 하지만 마시고 바로 졸려지거나 하는 건 아니에요. 이건 약이 아니라 평소에 즐겨 마실 수 있는 차니까요. 그저 잠들기 전 마시면 푹 잘 수 있도록 돕는 정도입니다.”
혹여 오해라도 살까 허둥거리는 아이를 향해 쥬다스가 작게 웃어주곤 따라준 차를 들었다. 별다른 말도 않고 곧장 찻물을 머금어 향을 음미한 그가 입을 열었다.
“아주 좋은 향을 가진 찻잎이로구나. 어떻게 이런 선물을 가져올 생각을 하였는고?”
칭찬을 듣자 어쩔 줄 몰라 하던 세이지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게, 형님은 늘 많은 일을 하시니까요.”
“음?”
“……조금은 쉬셨으면 하고.”
확실히 쥬다스는 세간에서 훌륭한 황태자로 칭송을 받고 있다.
황제는 후계를 인정한 후로부터 보통 사람이라면 감당하기 어려운 업무까지 그에게 위임했고 쥬다스는 모든 일을 누구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처리해 냈다.
현재 루바르잔 제국에서 국정이면 국정, 외교면 외교, 심지어 나라를 어지럽히는 사령까지 모조리 그의 손으로 처리되고 있다. 지금 당장 제위에 올라도 아무 이상이 없을 정도였다.
그가 가진 능력에 대해서는 루바흐에서부터 명성이 자자했지만 실질적으로 황태자위에 오른 뒤부터는 지켜보던 모든 이가 혀를 내둘렀다.
‘모두들 형님을 완벽하다고 찬양하지만.’
세이지는 그런 형님이라도 실은 힘들어할 줄 아는 한 인간이란 사실을 염려했다.
잔잔한 호수 위에 떠 있는 백조는 더없이 우아하고 아름다우나, 실제 물밑으로는 힘겹게 헤엄을 치고 있는 두 발이 있다고 한다.
‘그 완벽을 당연하다고 여겨선 안 돼.’
이번에 들여온 찻잎은 과중한 업무를 맡고 있는 형을 위해 특별히 준비한 선물이었다.
그리고 쥬다스 역시 이에 담긴 따뜻한 진심을 모를 리 없었다.
“고맙다, 세이지.”
“……네!”
고맙다는 한 마디에 세이지는 뛸 듯이 기뻐했다. 해처럼 밝아진 얼굴로 자기 몫의 찻잔을 들던 세이지의 시야에 문득 못 보던 물건이 들어왔다.
‘인형?’
책상 위에 예쁘장한 인형이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세이지는 컵을 내려놓으며 그 인형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쥬다스의 방은 늘 정갈한 편으로 필요한 물건 외에는 흔한 장식장 하나 들여놓지 않았다. 특히 인형 같은 물건이 놓여 있을 책상이 아니었다.
그런데 하필.
‘어린 소녀들이나 가지고 놀 법한 예쁜 인형이라니.’
차분한 분위기의 방에서 떡하니 책상 위를 차지한 인형이란 홀로 너무 위화감이 들었다.
일반적으로 남성은 인형보다는 차라리 조각품이나 모형을 선호한다. 웅장한 배를 본떠 만든 조각이라든지, 하다못해 천사와 악마를 새긴 조각상이라든지. 물론 쥬다스는 평소 그런 장식품들에조차 일절 관심이 없었다.
“이 인형은 무슨…….”
세이지는 의아한 얼굴로 인형에 손을 뻗었다.
탁.
그 순간, 팔목이 강하게 붙잡혔다. 인형에 닿기도 전에 팔을 붙들린 세이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놀란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형님?”
“저, 전하?”
어느 틈엔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세이지의 팔을 붙들어 세운 건 다름 아닌 쥬다스였다.
그가 갑자기 일어나는 바람에 뜨거운 찻물이 엎질러진 상태였다. 화상이라도 입었을까 놀란 에단과 바이칼이 재빨리 다가왔다.
“괜찮으십니까?”
대기하고 있던 시종이 즉시 쏟아진 다기를 정리했다.
“그…….”
쥬다스는 어정쩡하게 말을 하려다 멈추었다. 사실 세이지의 팔을 붙잡은 건 자신도 모르게 나온 행동이었기에 그 스스로도 몹시 당황해 있었다.
또 세이지는 세이지대로 여전히 붙들린 팔을 곁눈질하며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내가 뭘 실수했나? 이거, 형님이 엄청 아끼시는 인형인가?’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는 몰라도 세이지는 무조건 자신이 잘못했다고 판단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언제나 여유롭고 느긋하던 형이 지금껏 이 정도로 당황하는 걸 본 적이 없었다.
쥬다스가 저런 반응을 보인다면 분명 상대가 큰 실수를 했기 때문이리라. 이는 그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굳건한 신뢰였다.
그래서 세이지는 아무것도 모른 채 일단 사과부터 했다.
“형님, 죄송합니다!”
“아니다. 내가 미안하구나.”
그제야 정신이 든 쥬다스는 비로소 동생의 팔을 놓아주었다. 두 형제는 서로 혼란에 빠져 수렁 같은 침묵에 빠져들었다.
쥬다스의 의중을 알 수 없어 불안하게 눈동자를 굴리던 세이지가 다시 인형에 시선을 주었다. 다시 봐도 왜 이 방에 있는지 이해할 수 없는 괴이쩍은 물건이었다.
물론 예쁘긴 참 예뻤다.
‘자꾸 보다보니 특이한 인형이네. 머리색이 꼭 바다 같은…… 어? 응?’
바다를 닮았다 하면 딱 연상되는 사람이 있었다.
크리스티나 R.델피아!
그녀와 꼭 닮은 인형이었다. 세이지는 설마 하는 눈으로 이번엔 쥬다스의 표정을 살폈다.
‘헉! 이거 혹시?’
인형을 크리스티나와 연관 지어 놓고 보니 꽤 그럴듯한 그림이 그려졌다. 본인들만 모르고 주변 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는 궁중 연애담!
세이지는 그 도도한 장미 같은 여인의 지고지순한 사랑 이야기에 드디어 꽃이 피었음을 직감했다.
“형님!”
“응?”
덥석, 이번엔 쥬다스가 역으로 손을 잡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어쩔 줄 모르고 굳어 있던 동생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눈을 반짝반짝 빛내고 있었다.
“왜 그러느냐?”
“응원하겠습니다.”
“응원? 무엇을?”
진지하게 손을 꼭 붙들고 응원하겠다는 세이지를 쥬다스가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헤헤헤.”
대답 대신 뿌듯함과 안도가 담긴 웃음이 실실 흘러나왔다.
‘역시 지성이면 감천이지. 두 분 사이가 어느 틈에 저런 커플 인형까지 맞춰다가 책상 위에 두고 손도 못 대게 챙기실 정도로 애틋해지셨을까!’
세이지는 크리스티나가 저주에 걸려 인형이 되었다는 사실까진 미처 상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번 사건에 대해 쥬다스가 일부러 알리지 않았고 크리스티나도 세이지가 들어오자마자 인형인 척 숨을 죽이고 있었기 때문인데, 이는 색다른 오해를 낳아버리고 말았다.
“그럼 형님. 쉬십시오.”
“벌써 가는 게냐? 좀 더 담소를 나누지 않고선.”
“훗, 저도 이제 눈치 없이 귀한 시간을 빼앗는 어린아이가 아닙니다. 저녁 식사는 크리스티나 공녀와 함께하시겠지요?”
아니라고 하기도 뭐하고 그렇다고 하기도 어려운 질문이었다. 인형이 된 크리스티나는 식사 시간에도 줄곧 함께 있겠지만 음식을 먹을 수는 없다.
말문이 막힌 쥬다스를 향해 꾸벅 고개를 숙여 보인 세이지가 방글방글 웃으며 문을 나섰다.
“조만간 좋은 소식 기대할게요.”
의미심장한 말을 끝으로 방문이 톡 닫혔다.
“……?”
문맥을 이해하지 못해 멍하니 동생이 사라진 자리만을 바라보고 있던 그의 옷깃을 누군가 꾹꾹 잡아당겼다.
평범한 인형인 척 숨을 죽이고 있던 크리스티나였다.
“전하. 다치지는 않으셨습니까?”
“아, 괜찮아. 물은 내게 해를 끼치지 않으니 말이다.”
그르릉.
동의를 표하기라도 하듯 모습을 드러낸 푸른 늑대가 그의 손에 머리를 부볐다. 물의 정령왕이 함께하는 이상 어지간한 일로는 그가 상처를 입을 일이 없다. 그 사실을 알아차린 수하들이 일동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세이지가 다녀간 뒤로도 그들은 다시 저주에 대한 실마리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식사는 약식으로 챙겼으며 시간이 늦어지자 에단과 바이칼도 자리를 떠났다.
밤이 깊었는데도 쥬다스의 방에선 불이 꺼지지 않았다. 고요 속에 앉아 멍하니 어두워진 창밖을 바라보던 크리스티나는 문득 더 이상 책장 넘기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고개를 돌렸다.
“……전하?”
작은 인형의 모습으론 낮은 창틀에서 책상 위로 뛰어내리는 데에도 제법 힘이 들었다. 크리스티나는 치맛자락을 부여잡고 총총 책상 위를 가로질러 쥬다스의 곁으로 다가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의 곁에서 실체를 드러내고 까불거리던 정령들의 모습이 지금은 보이지 않았다.
‘잠드셨어.’
크리스티나는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가 책을 펼쳐놓은 채 그대로 엎드려 잠들어 있었다. 불편하게 잠든 자세를 보아하니 자려고 잔 게 아니라 과로로 인해 눈이 감긴 게 틀림없었다. 가뜩이나 평소에도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던 중이었는데 이번에 사령석 사건을 해결하자마자 또 저주에 대한 실마리를 찾느라 밤낮으로 열중한 탓이다.
쥬다스가 이런 식으로 자기관리에 실패하여 무방비하게 잠든 모습은 크리스티나로서도 처음 보는 장면이었다.
‘아까 그 차를 마셔서 그런 걸지도.’
이유야 어찌 되었든 그가 최근 한계치 이상으로 무리했단 것만큼은 사실이었다.
크리스티나는 울컥한 심정으로 잠든 그의 곁에 살며시 주저앉았다.
드레스 자락이 사락거리는 소리가 생각보다 커서 그가 잠에서 깰까 겁이 났다.
그런 한편, 차라리 이대로 책상에서 불편하게 자느니 깨어나서 침상으로 가 잠들기를 바라는 마음도 들었다.
“전하.”
‘죄송해요.’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한 사죄가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크리스티나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흐트러진 은빛 머리카락을 정돈해 주었다.
“제가 전하께.”
‘짐만 되는 것 같아서.’
이내 떨리는 손끝이 잠든 쥬다스의 볼에 맞닿았다. 전해져 오는 체온이 몹시 따뜻했다.
“차라리 말하지 말걸.”
인형이라 눈물이 나지 않아 다행이었다. 크리스티나는 우는 대신 조용히 미소 지었다.
덜컹!
바로 그때, 창문이 벌컥 열렸다. 놀란 크리스티나가 굳어버린 사이 다람쥐처럼 날쌔게 창틀을 넘어 뛰어들어온 황색 피부의 사내가 주변을 둘러보곤 어라, 하고 머리를 긁적였다.
“뭐야. 주인, 왜 여기서 자고 있어?”
밖에서 신나게 쏘다니고 돌아온 청룡 가야였다. 워낙 돌아다니길 좋아하는 청룡이지만 한 번씩 이렇게 계약자의 안위를 확인하러 돌아오곤 했다.
자신의 등장에도 깨지 않는 쥬다스를 가만 내려다보던 청룡이 에라 모르겠단 심정으로 그를 훌쩍 안아 들었다.
“인형이네?”
가야는 책상 위에 있던 크리스티나에게도 흥미로운 시선을 주었다.
“흐응, 주인에게 이런 소녀스러운 취미도 있었구나. 다음에 선물로 사와야겠다.”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키득거린 가야가 크리스티나도 함께 안아 들고 저벅저벅 걸어갔다. 청룡이 잠든 계약자를 데려간 곳은 침대 위였다.
편안히 눕혀놓고 이불까지 덮어준 가야는 마지막으로 인형이 된 크리스티나를 그의 품에 쏙 안겨주었다.
“잘 자, 주인.”
가야는 모처럼 주인에게 도움이 되었단 생각에 만족했다.
그리고 사색이 된 크리스티나의 표정을 알아보지 못한 채 유유히 도로 창밖으로 나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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