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49 [ 외전 1 : 인형의 꿈 ] =========================================================================
이그레트 외전 9화
외전 1 : 인형의 꿈
쥬다스의 하루는 평소 동이 완벽히 트기 전 어슴푸레한 새벽 무렵 일찍이 눈을 뜨는 걸로 시작한다.
갓 태어난 햇살이 창문을 넘어 침대를 포슬포슬 비출 즈음에 잠에서 깨는 일은 굉장히 드문 일이다.
‘늦잠…….’
쥬다스는 깨어나면서 눈이 부신 순간 이미 깨달았다. 몽롱한 와중에도 작게 한숨이 흘러나왔다.
어찌나 곤히 잠들어 있었던지 정령들의 재잘거림조차 들리지 않았다. 그가 정신적으로 지쳐 있을 때엔 계약자의 상태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정령들의 기분도 함께 가라앉는다.
수면욕이 없는 정령들이 가끔 꾸벅꾸벅 졸거나 움직임이 둔해져 멍하니 넋을 놓고 있는 경우가 바로 이럴 때였다.
‘피곤하긴 했던 건가.’
잠에서 깼는데도 여전히 좀처럼 눈이 떠지지 않았다. 억지로 깜빡여 봤지만 잠에 취한 눈앞은 흐릿했고 이불은 따뜻했다.
품에 안고 있는 인형도 폭신해서 정말이지 이대로 다시 잠에 들고만 싶은 생각뿐이었다.
‘……?’
모처럼 일탈을 꿈꾸고 있는 그의 뇌리에 문득 이상한 예감이 스쳤다.
‘인형이라니?’
편안한 숙면과 전혀 관계없는 요소였다. 그제야 현실 감각이 돌아오며 잠이 훅 달아났다.
다시 눈을 뜨자마자 품에 안고 있던 한 존재와 시선이 마주쳤다.
“…….”
“…….”
둘은 약속이라도 한 듯 서로를 바라보며 침묵을 지켰다. 지난밤 저주를 받아 인형이 된 크리스티나는 잠에 들지도 못하고 뜬눈으로 지새워야만 했다.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인형인 채로나마 그의 곁에 줄곧 남아 있을 수 있으니 편안하고 행복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쥬다스가 눈을 뜬 순간 크리스티나도 동시에 꿈에서 깨듯 퍼뜩 깨달았다.
‘아차! 분명 오해하실 텐데.’
눈을 떠보니 인형이 품에 안겨 있다니!
청룡 가야가 한 짓이란 사실을 아는 건 크리스티나뿐이었다.
딱 필요한 물건들만 두고 지내는 방 안 상태를 보았을 때 그에게 딱히 인형을 안고 자는 취미 따위가 있어 보이진 않았다.
게다가 크리스티나는 지금 자의로 움직일 줄 아는 특별한 인형이었다.
아무리 인형이 되었다곤 해도 알맹이는 델피아의 장녀였으니 지켜야 할 선이 분명히 정해져 있었다.
‘도대체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드려야.’
‘도대체 왜 이런 상황이.’
둘은 동시에 비슷한 고뇌에 빠져들었다. 누구도 섣불리 입을 열지 못하고 굳어 있는 사이 거짓말처럼 때맞춰 노크 소리가 났다.
똑똑!
“전하, 로한입니다. 기침하셨사옵니까?”
“아.”
당혹감에 물든 나머지 입을 열긴 했지만 어떤 말로도 이어지지 않았다. 이미 늦잠을 잔 상태에서 평소답지 않은데 말을 더듬기까지 하자 이상하게 여긴 시종이 문고리를 잡았다.
“전하?”
“잠깐. 들어오지 말거라.”
“……예? 예.”
로한은 어리둥절해하면서도 노련한 시종답게 문 앞에서 물러섰다. 일단 한숨 돌리게 된 쥬다스가 일어나 크리스티나를 책상 위에 올려주었다.
한 박자 늦게 정신을 수습한 크리스티나가 황급히 사과부터 건넸다.
“죄송합니다. 전하, 제 불찰입니다.”
“네 실수가 아니란다. 밤새 가야 그 아이가 장난을 치고 간 모양이야. 내가 미안하구나.”
연둣빛으로 빛나는 바람의 정령이 주변을 빙글 돌고는 다시 모습을 감추었다. 정령들의 도움으로 청룡이 왔다 갔음을 알게 된 쥬다스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으음, 숨길 상황은 아닌데.’
어차피 저 인형 속에 크리스티나 R.델피아가 갇혀 있다는 사실을 아는 자는 극소수였다. 개인적인 공간에서 인형을 옆에 두고 취침했다고 해서 별달리 문제가 되진 않는다.
평소 시중 없이도 세안부터 의복정제까지 스스로 해결하는 버릇대로 시종을 문밖에 세워둔 채 아침에 일어나면 으레 하는 준비들을 시작했다.
그러나 순간 인형이 있는 책상 위에 시선이 미친 그는 반쯤 풀었던 옷깃을 처음부터 그러려고 했던 양 자연스럽게 다시 여몄다.
“…….”
“…….”
두 번째 침묵이 파도처럼 몰려왔다.
둘 중 누구도 입을 연 사람은 없지만 서로 어색해하는 공기가 따끔따끔 피부를 찌르는 듯했다.
태연한 척 갈아입을 의상을 챙겨 욕실로 들어온 쥬다스는 자신이 지금 필요 이상으로 인형이 된 크리스티나를 신경 쓰느라 유난을 떨고 있는 건 아닌지 잠시 고민했다.
‘아니, 신경을 쓰는 게 맞지. 크리스티나는 여자아이니까.’
아무리 인형이 되었다고 해도 바로 코앞에서 아무렇게나 훌렁 옷을 갈아입을 순 없는 노릇이었다.
“하아.”
쥬다스는 깔끔히 복장을 다 정돈해놓고도 잠시 욕실 벽에 기대 생각을 정리했다. 조금 전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는 자각이 없을 정도로 마음이 복잡했다.
‘내가 이리 허둥대고 있으면 저 아이도 불안하겠구나. 이런 때일수록 침착하게 대해줘야 하거늘.’
엉뚱하게도 가장 동요하고 있는 이는 저주를 받은 크리스티나 본인도 아닌 쥬다스였다.
그는 이미 한 번 가슴에 품었던 아이들을 지켜주지 못했다. 그에게 있어 주변인을 다치게 하거나 잃는 경험은 일종의 트라우마로 남아 끊임없이 치부를 자극했다.
그래서 이번에도 역시 저주받은 크리스티나를 보며 자신의 일을 해결할 때만큼 침착하게 대응하지 못했다.
서둘러 저주를 푸는 방법을 찾아줘야겠다는 결의를 다지고 방으로 돌아가는 쥬다스를 따라 포로록 날아오른 유니가 순간 팔짱을 척 끼며 중얼거렸다.
「있잖아, 얘들아.」
「응이다요!」
「후후, 듣고 있어요.」
과묵한 푸른 늑대를 제외한 불과 땅의 정령이 해맑게 대답했다. 그러자 정령들을 불러 모은 유니가 동네 주민들과 모여 수다 떠는 여인네처럼 쑥덕거리기 시작했다.
「난 지금 이그레트가 짓는 표정이 왜 이렇게 웃기지? 지금 이 상황 나만 웃겨?」
「나요도 재밌다요! 완전 지지까까로 변한다요!」
「……지지까까가 아니라 시시각각.」
근엄한 표정으로 토니의 말실수를 지적해준 루니가 물거품을 퐁퐁 일으키며 걸어갔다.
「사람은 누구나 처음 겪는 상황에 대해선 면역이 없을 수밖에 없다.」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는 다른 정령들을 뒤로한 채 푸른 늑대는 조용히 계약자의 한 발짝 뒤에 멈춰 섰다.
「그건 현명한 너라도 마찬가지, 이그레트.」
이렇게 가까이에서 떠드는데도 정령들의 소리에 반응하지 못할 정도로 다른 곳에 신경을 쏟는 계약자란 낯설기도 하고 조금 서운하기도 했다.
늘 품안에만 안겨 있던 아기가 처음으로 걷기 시작하더니, 어느 날 또래 아이가 있는 놀이터로 향하는 아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부모의 심정과도 비슷했다.
어쩌면 처음 만나는 친구와의 놀이에 흠뻑 빠져 옛날의 평온함을 잊을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늘 같은 자리에 있을 테니까.」
생각날 때마다 한 번씩 돌아봐 준다면 기쁠 거야.
변화를 겪는 장본인보다 훨씬 더 예민하고 정확하게 계약자의 감정에 감응한 정령들은 저들끼리 키득거렸다.
* * *
“교황청에서 답신이 돌아왔습니다.”
시종이 전해준 낭보에 쥬다스와 크리스티나는 동시에 반색했다.
다만 남들 앞에서는 여전히 평범한 인형인 척해야만 하는 크리스티나는 미동 없이 눈만 반짝였고, 그녀 대신 쥬다스가 화답해 주었다.
“늦지 않게 서신을 가져와주어 고맙구나, 로한.”
그런데 답신을 가져왔다던 시종 로한은 이상하게도 빈손이었다. 서신을 찾는 눈길을 알아차린 로한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이, 교황청에서 보내온 것이 서신이 아니오라.”
로한은 조심스럽게 문밖을 눈짓했다.
“엘리시움의 대사제가 직접 전하를 뵙고자 찾아왔습니다.”
황태자가 다쳤다면 모를까, 고작 저주에 대해서만 언급했을 뿐인데 교황청에서 대사제씩이나 되는 거물을 파견하는 경우는 굉장히 드물었다.
심지어 지금은 교황의 자리가 비어 있는 상태, 대사제 본인이 나서지 않으면 그들에게 파견을 강요할 수 있는 자는 없다. 황궁으로 가도록 권한 것은 친우를 위한 성녀 위그드라실의 안배였지만 그에 더해 대사제 본인의 돕고자 하는 강한 의지도 분명해보였다.
쥬다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시종이 문을 열어주었다.
사박, 사박.
대사제들이 입는 치렁치렁한 자색 사제복이 흔들리면서 옷에 달려 있던 은장식들에서 맑은 소리가 났다.
“사랑스러운 당신께 신성한 축복이 함께하길.”
쥬다스는 자신을 향해 인사하는 고운 목소리를 듣자마자 알아차렸다. 분위기며 말투, 몸가짐 등이 확연히 달라지긴 했으나 분명 아는 이였다.
“당신은.”
“신의 은총을 전하기 위해 찾아온 대사제, 유리엘 S.프리스트입니다.”
신을 모시는 사제라면 누구나 옛 성을 버리고 ‘프리스트’라는 라스트네임을 가진다.
신께 받은 진명과 본래 쓰던 이름을 합쳐 ‘유리엘 S.프리스트’라고 소개한 대사제는 시종이 방에서 나가자 쥬다스와 단둘이 되자마자 숙였던 고개를 들어 올리며 생긋 웃었다.
“헤헤. 오랜만이에요! 전하.”
아직 소녀티가 남아 있는 얼굴에는 근엄한 표정보다는 밝은 미소가 훨씬 잘 어울렸다.
어깨선까지 짧게 자른 금발에 붉은 장밋빛 눈동자를 가진 그녀와는 언젠가 사막에서 마주친 바 있었다.
정략결혼과 자유의지 사이에서 갈등하던 소녀, 유리엘. 그녀는 쥬다스 일행과 헤어진 후 곧장 성녀를 찾아가 수습사제가 되었다.
쥬다스가 알아본 만큼 유리엘은 굉장히 강대한 신성력을 타고났으며 순식간에 그 자질과 열의를 인정받아 대사제의 자리까지 올라갔다.
성녀 위그드라실은 쥬다스가 넘겨준 목걸이 하나에 의지하여 지친 산양처럼 비틀거리면서 교황청을 찾아온 유리엘을 몹시 아껴 친구처럼 대해주었다고 하였다.
이제 어엿한 어른이자 대사제가 되어 돌아온 유리엘은 철없던 가출소녀 시절과 달리 정갈하면서도 생기로 가득한 눈빛을 가지고 있었다.
“사정은 위그드라실 님께 들었어요. 크리스 님이…… 앗.”
저도 모르게 예전처럼 크리스티나를 호칭한 유리엘이 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얼굴을 붉혔다.
“저어, 죄송해요. 여전히 크리스티나 님은 제게 우상 같은 분이어서.”
“헛소리. 신을 섬기는 사제가 되었으면 네 우상은 오로지 신이어야 하지 않나?”
차가운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크리스티나 님?!”
꾸지람을 들으면서도 반가운 얼굴로 반짝 눈을 빛낸 유리엘은 떨리는 가슴을 안고 고개를 돌렸다.
“여기 계셨, 푸흡.”
하지만 상대를 확인하자마자 그녀는 그만 참지 못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고 말았다.
“…….”
“아, 아니. 제가 웃은 건 크리스 님이 너무 멋지셔서, 아니. 품격…… 아름다우, 고풍…….”
원래대로라면 어울려야 할 그 어떤 단어와 수식어를 꺼내 봐도 지금의 크리스티나와는 하나도 맞지 않았다.
“억지로 기분 맞춰줄 필요 없어.”
“귀, 귀여우셔서?”
솔직하게 말했더니 더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오랜만에 만난 건 고사하고 심지어 인형의 모습인데도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차가운 태도는 여전했다.
그녀의 냉대에 유리엘은 어쩔 줄 모르고 쩔쩔 맸다.
“그리고 내 이름은 제대로 불러줬으면 좋겠군, 그대. 나는 지금 크리스라는 가명을 쓰고 있지 않으니까.”
“네, 네. 죄송해요, 크리스…… 티나 님.”
대사제의 품위는 집어던지고 인형에게 혼나느라 시무룩해진 유리엘을 보며 쥬다스가 조용히 웃음을 삼켰다.
어떤 지위, 어떤 모습으로 만나도 변함없는 두 사람이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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