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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그레트-250화 (250/252)

00250  [ 외전 1 : 인형의 꿈 ]  =========================================================================

이그레트 외전 10화

외전 1 : 인형의 꿈

이러니저러니 해도 유리엘은 인형이 된 크리스티나의 저주를 풀 방법을 찾기 위해 은밀히 파견 나온 대사제였다.

오전 시간이 다 지나갈 동안 이어진 긴 기도를 마친 유리엘은 마지막으로 신성력을 펼쳐 인형을 감쌌다.

짙은 분홍빛 안개처럼 보이는 신성력이 방 안을 가득 메웠다. 생명의 근원이자 신의 축복을 담고 있는 신성력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따뜻한 햇볕처럼 은은하게 그들을 비추었다.

잠시 후, 신성력을 거둔 유리엘이 천천히 눈을 떴다.

‘휴, 다행이야.’

유리엘의 입가에 편안한 미소가 맺혔다. 신성력과 충돌하는 저주의 기운은 몹시 미약했다. 신성력으로 정화시킬 필요도 없었다.

그냥 이대로 하루 이틀만 더 지나면 자연히 풀릴 단순한 저주였다. 인형이 된 자의 생명을 갉아먹거나 영혼에 악영향을 미치진 않으니 그야말로 천만다행이었다.

유리엘은 서둘러 이 사실을 알리기 위해 입을 열었다.

“이 저주는…….”

그러나 막 안심하라고 말하려던 순간, 유리엘의 시야에 그동안 보이지 않던 무언가가 읽혔다.

‘응?’

유리엘은 붉은 장밋빛 눈동자를 한 차례 깜빡였다.

누군가를 홀로 외롭게 좋아해 본 경험이 있는 그녀는 한눈에 알아보았다. 지금 이 방 안에도 닿지 않는 마음을 가진 한 사람이 있었다.

‘크리스티나 님?’

하필 인형이 되어 작아진 탓에 더욱 잘 보였다. 정말이지 올곧게 단 한 사람을 바라보고 있는 여인의 모습이.

작은 손짓 하나까지 놓치지 않고 향하고 있는 시선에는 행복과 슬픔이 공존하고 있었다. 바로 곁에서 지켜볼 수 있다는 행복과 결코 마주볼 수 없다는 슬픔.

어떤 상황에 저런 모순적인 감정들이 한 마음에 공존하는지는 유리엘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다름 아닌 외사랑.

저도 모르게 탄식이 터져 나왔다. 유리엘이 볼 때, 지금 크리스티나는 무식할 정도로 솔직하게 곧이곧대로 마음을 내보이고 있었다. 그걸 알아보지 못하는 자는 사랑받고 있는 본인뿐이다.

“무슨 문제라도 발견되었느냐?”

“아, 그, 그게 아니라.”

갑자기 쥬다스가 진지하게 물어오는 통에 유리엘은 말을 더듬었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 더 깨달았다.

“어?”

맑은 금빛 눈동자 너머로 무언가 어둡게 일렁거리는 것들이 가라앉아 있었다.

예전 정략결혼이나 기다리던 평범한 귀족 아가씨였다면 몰랐겠지만 대사제가 된 지금은 알 수 있었다. 흔들림 없이 자신의 답을 기다리고 있는 인자한 차기 군주가, 실은 감정을 억누르는 데에 익숙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꽁꽁 숨겨둔 비밀을 엿본 기분이 되어버린 유리엘이 손을 들어 살며시 입가를 가렸다.

그 반응을 오해한 쥬다스가 재차 물었다.

“혹여 나쁜 소식이라도 괜찮다. 이 아이를 괴롭히는 저주에 대해 무언가 알았다면 숨기지 말고 알려주겠니?”

어쩌면 단순히 아끼는 친우라서, 혹은 유능한 수하라서 그런 것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유리엘은 순간적으로 자신이 엿본 간절함을 믿어보기로 했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전하.”

유리엘은 말을 하며 목에 걸고 있던 크로스를 기도하듯 양손으로 감쌌다. 그리고 살며시 눈을 내리깔았다.

“참으로 지독한 저주입니다.”

그녀는 시한부를 선고하듯 굵고 짧게 말을 맺었다.

“신성력조차 통하지 않으니 이대로 방치하신다면 하루 이틀 안에…….”

“…….”

“잃게 되실 겁니다.”

그러면서 유리엘은 의도적으로 주어를 빠뜨렸다.

거짓은 아니었다. 저주는 이미 효력을 다해 끝물이었고, 크리스티나는 하루 이틀 안에 인형의 몸을 잃고 본래 모습으로 되돌아올 테니까.

보통 때라면 그런 잡스러운 말장난에 넘어갈 쥬다스가 아니었지만 조급한 마음이 판단을 흐렸다. 가족 같은 아이들을 잃고 난 후 얻은 죄책감과 좌절은 사라지지 않고 깊은 내면에 숨어 있었다.

송곳과도 같은 차가운 고통이 다시 가슴 언저리를 찢고 속삭였다.

‘나는 또.’

떨리는 손끝을 꽉 말아 쥐었으나 소용없었다. 지독한 무력감이 뱀처럼 기어올라 온몸을 옭아맸다.

‘지키지 못했구나.’

피 냄새를 맡았을 때처럼 속이 역했다. 그는 천천히 가슴에 손을 얹었다. 어떤 표정을 지어야 좋을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크리스티나는 어쩔 줄 모르고 다가가 그의 옷깃을 살짝 잡았다. 크리스티나가 보기엔 그의 굳어버린 표정이 이미 그 어느 순간보다 괴로워 보였다.

「이그레트…….」

정령들도 숨을 죽이고 그의 곁에 내려앉았다.

그리고 유리엘은 상상 이상으로 축 가라앉은 분위기에 놀라 눈치를 살폈다.

‘엄마야. 내, 내가 너무 심하게 뻥을 쳤나?’

그녀가 야심차게 시작한 즉흥 자작극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유리엘은 용기를 내어 흠흠 목청을 가다듬었다.

잠시 후, 유리엘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하는 쥬다스를 향해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한 가지, 죽음의 기운으로 가득한 저주를 약화시키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는 여전히 침묵하고 있었으므로 크리스티나가 대신 고개를 돌려 물었다.

“저주를 약화시키는 방법?”

“예! 바로 사람의 체온입니다.”

씩씩한 대답이 되돌아오자 크리스티나는 불신의 눈빛으로 유리엘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유리엘은 더 의심을 사기 전에 성전에서 배운 지식을 동원하여 그럴 듯한 설명을 잽싸게 덧붙였다.

“사령은 생명의 불빛을 꺼뜨리는 존재. 호흡이 멈춘 사람에게 인공호흡을 하듯, 강한 생명력을 끊임없이 불어넣어준다면 인형 속에 갇혀 버린 크리스티나 님의 생명도 다시 제자리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크리스티나는 인형인 채로도 험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말도 안 되는.”

“함인즉, 계속 체온을 나누어주면 된다는 말이더냐?”

그러나 더 타박하기도 전 끼어드는 목소리가 있었다. 크리스티나는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예, 전하. 안고 계시거나 엎고 계시거나 둘러메시더라도! 아무튼 계속 산자의 따뜻한 체온과 맞닿아 있기만 하면 됩니다.”

들을수록 어처구니없는 이야기였다. 조목조목 따지고 싶은데 쥬다스가 너무 진지하게 듣고 있어서 차마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크리스티나가 금붕어처럼 입만 벙긋거리는 사이 유리엘은 헛소리로 가득한 자작극의 서막을 내렸다.

“그렇게 이틀. 저주가 유지되는 기간 동안 충분한 온기를 나누어주신다면 크리스티나 님은 본래 모습으로 되돌아오실 수 있을 겁니다.”

“이틀.”

쥬다스는 조용히 되뇌었다. 허황되어 보이는 이야기라도 좋았다. 일단 노력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했다.

“고맙다, 유리엘.”

진정으로 감사를 표하는 그를 보며 유리엘은 머쓱하게 마주 웃었다.

부드러운 빛을 담은 금안이 너무나도 따뜻해서, 크리스티나도 더 따지지 못하고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 * *

대사제 유리엘이 떠난 후, 어김없이 호위 임무를 위해 쥬다스를 찾아온 에단과 바이칼은 주군의 행보에 단박에 시선을 사로잡혔다.

“저, 단장?”

“……아무 말 하지 마라.”

“아니, 그게. 이건 그래도 말씀을 드려야 하는 게 아닌.”

“아니니까 하지 마라.”

에단은 칼같이 부관의 쓸데없는 담소를 끊어냈다. 사실 그도 당혹스럽긴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주군이자 대제국 루바르잔의 황태자가 느닷없이 품에 인형을 안고 다니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서류를 확인할 때에도, 회의에 참석할 때에도, 급기야는 잠시 짬을 내어 야외로 산책을 나온 지금조차 질리지도 않고 귀여운 소녀 인형을 안고 다니는 것이다.

‘저주를 풀 방법을 찾으셨겠지.’

경악하는 바이칼과 달리 에단은 눈치 빠르게 쥬다스가 그러한 행동을 하게 된 원인을 짐작했다.

사람들은 쥬다스가 지니고 다니는 인형이 델피아 공녀를 본더 만든 얼라이브 돌이 아니냐며 수군거렸지만, 두 사람이 알다시피 크리스티나를 닮은 저 인형은 그냥 크리스티나 본인이었다.

그래서 에단은 쓸데없는 호기심은 접어두고 임무에만 충실하기로 했다.

“신 마르젠, 전하를 뵙습니다.”

이번에 마주친 인물은 최근 정계의 동향을 보고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찾아오는 마르젠 H.하쉬였다.

간단히 안부를 주고받은 후 보고서 브리핑을 마친 마르젠의 눈매가 능글맞게 휘어졌다. ‘오’ 하고 간략한 감탄사를 내뱉은 마르젠이 유들유들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그것이 오늘 궁을 떠들썩하게 만든 사랑의 증표로군요.”

“으음. 그런 소문이 났느냐?”

“그저 ‘소문’입니까?”

농담인 듯 뼈가 있는 질문이었다. 거기에 쥬다스는 그저 물 흐르듯 넌지시 대꾸했다.

“글쎄다.”

크리스티나는 그 순간만큼은 인형이 된 걸 다행으로 여겼다. 본래 모습이었다면 동요하는 표정을 숨길 수 없었을 게 분명했다.

황제의 후계자 자리란 말 한 마디가 모든 걸 좌우하는 위치였다. 소문에 대해 물었을 때 부정하지 않는다는 건, 즉 돌려 말하는 긍정이나 다름없다.

마르젠은 묘한 표정으로 쥬다스의 품에 들린 크리스티나를 응시하다 이내 웃으며 자리를 떠났다. 크리스티나는 자그마한 손에 얼굴을 묻었다. 인형 손은 상대적으로 작아서 얼굴이 다 가려지지 않았다.

‘어찌 그런 말씀을.’

상대는 정계를 주름 잡고 있는 마르젠 하쉬였으니, 조만간 궁에 새로운 소문이 돌기 시작할 게 뻔했다.

하루가 어떻게 가는 줄도 모른 채 그렇게 지나버렸다. 쥬다스는 그날 많은 사람을 만났고 모든 자리에 크리스티나와 함께했다. 그 특이행동은 측근들조차 당황케 했으니 자연히 궁 안에선 그와 크리스티나를 닮은 인형에 대한 추측이 난무하였다.

정작 타오르는 소문의 주인공이 된 크리스티나는 하루 종일 그런 시선들을 견디다 못해 물 먹은 솜처럼 축 늘어져 버렸다.

드디어 모든 일정을 마치고 방으로 돌아와 둘만 남게 되자, 그녀는 어린 아기처럼 쥬다스에게 안긴 채로 웅얼웅얼 입을 열었다.

“저…….”

너무 용기 없이 흘러나오는 바람에 목소리가 중간에 끊겼다. 크리스티나는 다시 힘주어 말했다.

“전하.”

“그래. 듣고 있단다.”

다정한 대답이 돌아왔다. 크리스티나는 고개를 빠끔 들어 올렸다. 여전히 품에 안겨 있었기 때문에 머리 위에서 내려다보는 따뜻한 금안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 바람에 순간 넋을 놓을 뻔했지만 그녀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수상합니다.”

“무엇이?”

“이 방법으론 전하의 명예에 흠집이 날 뿐입니다. 애당초 신성력도 아닌 체온으로 저주를 몰아내다니요? 전혀 근거 없는 이야기지 않습니까. 분명 유리엘 양이 무언가 잘못 알고 있거나.”

“유리엘 S.프리스트.”

쥬다스는 빙긋이 웃으며 크리스티나의 말을 정정해주었다.

“유리엘 양이 아니라, 프리스트의 이름을 이은 대사제란다.”

“아.”

신이 인정한 대사제란 이유만으로 유리엘이 한 근거 없는 이야기엔 저절로 신빙성이 따라붙었다. 시무룩하게 입을 다문 크리스티나의 귓가에 다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설령 진실이 아니라 하더라도.”

크리스티나가 눈을 깜빡이는 사이 쥬다스는 그녀를 들어 올려 눈높이를 맞춰주었다. 맑은 금안에 비친 인형의 모습은 무척 어여뻤다.

“그 아이가 너를 나쁜 길로 인도하지는 아니할 터.”

쥬다스는 유리엘이 말한 방안의 허점을 이미 알고 있었다. 크리스티나를 영영 잃어버릴 수 있다는 말에 충격 받은 건 사실이었으나 현명한 그는 곧장 유리엘의 이야기가 반쯤 장난에 가까운 자작극이었음을 간파했다.

그러나 쥬다스는 기꺼이 그 한 편의 극에 어울려 주었다.

“다행이라 생각했다.”

오히려 그때 받은 충격이 남아 평소라면 시도하지 않을 새로운 욕심을 자극했다.

그는 크리스티나를 책상 위에 내려주었다. 인형의 크기에 맞춰 제작된 유리구두가 책상을 딛고 제대로 서는 것까지 확인한 후에야 그는 크리스티나로부터 손을 떼고 그 앞에 섰다.

“내게 기회가 남아 있어서.”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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