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51 [ 외전 1 : 인형의 꿈 ] =========================================================================
이그레트 외전 11화
외전 1 : 인형의 꿈
쥬다스가 크리스티나의 연심을 처음 짐작했던 건 성년파티 때였다.
파티 컨셉 ‘블랙레이디’.
마법 효과로 인해 전부 머리카락을 검은색으로 물들이고 얼굴은 가면으로 감싸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도록 감춘 비밀스럽고도 은밀한 파티 속에서 그는 한눈에 크리스티나를 알아보았다. 정확히는 두 사람이 동시에 서로를 발견했다.
그날 깨달았던 건, 자신이 더 이상 생을 마감한 전생의 현자가 아니라는 것.
‘나는 지금 여기.’
손을 맞잡은 그녀와 같은 선상에 서 있다는 것.
‘너희들과 함께 걸어가고 있구나.’
그 사실이 가슴 벅차도록 설렜다. 쥬다스는 떨리는 감동을 품은 채 고민했다. 한 번도 걸어보지 못했던 새로운 길목 앞에서 한참을 망설였다.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의 선택이 누군가를 괴롭게 한다면 무용지물이었다. 정령들에게 진심을 고백할 수 있었던 건 그들 사이에 결코 끊어지지 않을 완벽한 유대가 있음을 신뢰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너지지 않는 확신이 이곳에는 없었다. 확신할 수 없는 욕심은 또다시 누군가를 불행에 빠뜨릴 수 있다.
쥬다스는 표지판 없는 낯선 길목 앞에 선 채 이번에도 잘못된 선택을 하는 게 아닌가 끊임없이 자문했다.
그가 한 발짝을 앞두고 겁내는 사이 크리스티나가 먼저 그 한 발을 내딛었다.
‘구속하셔도 좋아요. 영원히’
전생의 기억도, 믿고 의지할 정령도 가지고 있지 않은, 저 작은 인형만큼이나 자그맣다고 생각한 여인이 훨씬 용감했다.
‘제가 전하를 연모하고 있으니까요.’
그녀의 용기를 떠올린 쥬다스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지금 그의 감정은 크리스티나가 말한 연심과는 조금 다른 방향일지도 몰랐다.
“무엇 하나 확신할 수 없고 아는 것이 없어.”
“전하?”
“나는 모르는 길로 걷지 아니하고 자신 없는 선택은 하지 않으니.”
크리스티나의 눈이 점점 크게 뜨여졌다. 따르는 주군이자 그녀의 인생에서 무엇보다 빛나는 이가 천천히 무릎을 굽히고 있었다.
“실은 지독한 겁쟁이에 아무것도 지키지 못한 위선자일지도 모릅니다.”
“전……!”
“이런 내가.”
책상 위에 털썩 주저앉은 인형과 바닥에 무릎을 꿇은 청년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곁에 있어 달라고 부탁한다면.”
언제나처럼 부드러운 빛으로.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그가 웃었다.
크리스티나는 그 반짝이는 웃음을 향해 손을 뻗었다.
처음 본 순간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닿지 않았던 손을, 작은 인형이라 닿지 못할 거라 생각한 손을, 그러면서도 결코 포기할 수 없었던 가녀린 나비 같은 손짓을.
톡.
눈물이 흘렀다.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은 몹시 뜨거웠다. 하지만 정말 뜨겁게 느껴진 건 손끝이었다.
크리스티나는 믿기지 않는 시선으로 제 손바닥과 맞닿은 쥬다스의 볼을 바라보았다. 닿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손이 드디어 그에게 닿았다.
그녀는 더 이상 인형이 아니었다.
‘저주가 풀렸어.’
본래 몸으로 되돌아왔음을 인지하기도 전에 크리스티나는 책상에서 뛰어내렸다.
후웅-
녹색 바람이 그녀를 다치지 않게 감쌌다. 그와 동시에 따뜻한 품이 그녀를 받아주었다.
“크리스티나.”
이름을 불리자마자 아이처럼 울음이 터졌다.
토닥, 토닥.
차분히 등을 다독이는 손길을 느끼며 크리스티나는 놓칠 새라 그를 꼬옥 끌어안았다. 그러지 않으면 신기루처럼 산산이 흩어져 버릴 것만 같았다.
“…….”
무언가 말하고 싶은데 아무런 목소리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잘게 떨리는 바닷빛 머리카락을 쓸어준 쥬다스는 작게 한숨을 뱉었다.
그 순간 크리스티나가 답했다.
“그럴게요.”
작은 목소리지만 똑똑히 들렸다. 쥬다스는 등을 토닥이던 손길을 멈추었다.
처음 루바흐에서 만났을 때처럼, 변함없이 강인했다. 차가운 푸른빛과 바위처럼 단단한 심성을 가져 누구에게도 굽히지 않는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여인이었다.
그런 그녀가 유일하게 무너지는 건 단 한 사람 앞뿐이다.
“곁을 따르겠습니다.”
그녀는 오래 전 충성서약을 했을 때와 같지만 다른 마음으로 맹세했다.
“언제나 지금처럼.”
영원히.
* * *
따뜻한 봄바람이 불어올 무렵, 제국은 새로운 소식으로 떠들썩해졌다.
다름 아닌 루바르잔 황태자의 약혼!
사람들은 드디어 들려온 차기 군주의 약혼 소식에 환호했다. 물론 약혼 대상에 대해선 그를 아는 누구도 놀라워하진 않았다. 본인들만 모르는 궁중연담이 이미 황궁 담을 넘어 쫙 퍼져 있었기 때문이다.
‘크리스티나 R.델피아.’
당사자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맺어졌는가와 관계없이 이미 대외적으로 그들은 연인으로 소문나 있었다. 무려 크리스티나와 닮은 인형까지 만들어 곁에 끼고 다니는 쥬다스를 본 사람들이 애틋한 사랑 이야기를 지어냈고, 그로 인해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달렸다.
결과적으로 사람들은 마치 동화 속 해피엔딩을 본 기분으로 기쁘게 황실의 새 인연을 축복했다.
그리고 온 나라가 기분 좋은 소문을 접할 무렵, 바로 그 소문의 주인공인 쥬다스와 크리스티나는 평복을 하고 궁 밖으로 나와 있었다.
“크으.”
둘만 나온 것은 아니었다. 에단과 바이칼이 호위를 위해 동행 중이었다.
그래도 이번에는 지난번 인형상단을 습격했을 때보다 비교적 단출했다. 몰래 따라붙은 그림자 호위들이야 있었지만 대놓고 주변을 경호하는 기사들은 데리고 나오지 않은 탓이다.
두 사람의 뒷모습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걷던 바이칼이 뒤통수에 깍지를 끼며 중얼거렸다.
“아직도 믿기지가 않지 말입니다. 전하께서 말씀하신 ‘황태자비 후보’가 처음부터 크리스티나 님이었다니. 안 그렇습니까, 단장?”
“…….”
에단은 침묵으로 긍정을 표했다. 얼떨떨하기론 늘 주군의 곁을 지킨 그가 뺀질거리기 좋아하는 바이칼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다.
“두 분 다 목석 같으셔서 밀어주기 계획은 완전히 망한 줄 알았는데요. 도대체 어떻게, 컥!”
“주군의 안전이다. 말조심하도록.”
난데없이 상관에게 얻어맞고 배를 움켜쥐고 쿨럭거리던 바이칼이 울컥하여 소리쳤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명치를 칩니까! 잘못 맞고 숨넘어가면 책임지실 겁니까?”
“정정. 제대로 맞아야 숨이 넘어간다.”
“아오, 그 말이 아니잖습니까!”
정말 숨이 넘어가기 직전까지 켁켁거리며 고통에 몸부림쳤으나 에단은 수하의 엄살을 차갑게 무시했다.
바이칼은 기침과 함께 흘러내린 콧물을 팔등으로 스윽 닦으며 투덜거렸다.
“와. 진짜 냉혈한.”
엄동설한처럼 싸늘한 시선이 되돌아왔다.
“……듯 냉혈 아닌 냉혈 같은 단장이시죠. 네.”
당장에라도 검을 뽑을 듯한 차가운 검은 눈동자를 보고 찔끔한 바이칼이 말을 돌리자 에단은 다시 그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도로 주변 경계에 집중하는 검은머리 청년을 보며 바이칼이 푹 고개를 숙였다. 그런 바이칼의 볼을 말랑한 혓바닥이 핥아왔다.
“삐이이.”
“크흑. 너밖에 없다, 플루비.”
나무에 매달린 코알라처럼 그의 품에 꼬옥 안겨 있던 플루비가 삑삑대며 울었다. 그들이 하는 양을 힐끔 돌아본 크리스티나가 작게 한숨을 뱉었다.
그 순간 곁에서 나란히 걷고 있던 쥬다스가 넌지시 물었다.
“많이 신경 쓰이느냐?”
“아닙니다. 전하.”
크리스티나는 당황한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또박또박 답했다. 그러고선 말하자마자 후회했다.
‘아……. 이런 말투는 너무 차가운가?’
친오빠에게조차도 살갑게 굴어본 적 없는 그녀였다. 그러나 크리스티나는 난생처음으로 자신의 딱딱한 말투에 대해 회의감을 느꼈다.
‘함께 여행을 온 약혼녀.’
이전에는 그저 임무일 뿐인 역할이었지만 이젠 진짜였다. 크리스티나는 친우나 호위가 아닌, 쥬다스의 연인으로 이 자리에 함께 따라왔다.
그래서 자리 배치도 당연히 그의 옆.
오랜 시간 상대를 마음 깊이 좋아하고만 있었지, 정작 연애가 무엇인지 모르는 크리스티나로서는 이 자리가 기쁨임과 동시에 상당한 곤욕이었다.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크리스티나의 옆얼굴을 가만히 쳐다보던 쥬다스가 난처하게 웃었다.
“혹여 내가 네게 곤란한 일을.”
“그렇지는!”
화들짝 놀라 큰소리를 내고 말았다. 그 바람에 쥬다스의 말이 뚝 끊겼다. 늘 냉철하던 크리스티나답지 않은 실수였다. 뒤따라오던 에단과 바이칼의 놀란 시선까지 그녀의 뒤통수에 꽂혔다.
“……않습니다.”
“흠.”
알 듯 말 듯 묘한 표정을 짓던 쥬다스가 빙긋 웃었다.
“그렇구나. 아니라면 다행이야.”
“예.”
또 무뚝뚝하게 대답하고 말았다. 크리스티나는 손바닥에 얼굴을 묻고 싶은 걸 가까스로 참았다.
‘하. 나는 정말 멍청하기 짝이 없군. 이래서야 전과 달라진 게 없잖아?’
급속도로 기분이 우울해졌다.
명색이 약혼녀가 되었는데 하는 일은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연심이 변한 건 아니었다.
오히려 견딜 수 없이 신경 쓰였다. 온 신경이 전부 그에게로만 향해 곤란할 정도였다.
예전에는 그저 눈길 한 번 주기만을 바랐다. 그의 곁에 있다면 부러울 것 하나 없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그 곁에 서고 나니 조금씩 욕심이 났다.
조금 더 가까워졌으면.
조금만 더 다정한 사이가 되었으면.
그렇게 바라다가도 막상 그가 자신을 마주 보고 웃어주면 모든 생각이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크리스티나는 그의 곁에 선 후에야 비로소, 한 사람이 마음속에 가득 찬다는 말을 이해했다.
약혼을 맺고 나자 평소에는 당연하게 생각했던 행동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했다. 연인다운 말투, 연인다운 분위기, 그리고 연인다운 행동.
예컨대 손을 잡는다든가.
어쩔 줄 모르고 내린 시선이 그의 손에 닿았다.
‘손. 잡아도 될까…….’
크리스티나는 홀린 듯 손을 가져가다 정신을 차리고 다시 거두었다. 몇 차례 더 망설이길 반복한 뒤, 그녀는 결국 심호흡을 후 내뱉었다.
그리고 결연한 음성으로 쥬다스를 불렀다.
“전하.”
“음?”
맑은 금빛 눈동자를 마주하자마자 목소리가 턱 막혀 버렸다.
“소…….”
모기만 한 소리를 낸 크리스티나가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소, 손.”
“손?”
쥬다스는 의아한 표정으로 한 손을 들어 올렸다.
거기까지 말한 크리스티나의 얼굴이 화르륵 달아올랐다. 이 순간만큼은 인형으로 되돌아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내가 지금 무슨 망발이지!’
기껏 끌어모았던 용기가 눈 녹듯 사라져 버렸다.
“손금! 이라도 봐드릴까요? 아무래도 조용한 여행길이 적적하실 듯하여.”
“……손금?”
망했다.
크리스티나는 참담한 심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애로운 약혼자는 그녀의 엉뚱한 발언에도 그저 부드럽게 대답해 주었다.
“손금읽기는 해동에서 사용하는 점이라 듣긴 하였는데.”
“해동에 관하여 조사하던 차에 서책에서 보았습니다.”
쥬다스는 기꺼이 손을 내밀었다.
“그럼 내 운명도 한번 봐주겠느냐?”
아무리 약혼녀라곤 하나 감히 황태자의 운명을 읽겠다고 주장한 꼴이 되고만 크리스티나가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그리할 만큼 대단한 지식은 아닙니다. 재미로 보기에 좋은 정도입니다.”
“괜찮다. 그저 여행길의 적적함을 달래기 위함이니.”
쥬다스는 빙그레 웃으며 덧붙였다.
“재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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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그렇게도 좋냐 멍청이들아 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