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화 〉용사입니다. 그런데 머릿속이 새하얗네요
그 뒤로 마차는 쉼없이 달렸다. 마부는 자신도 찔리는게 있었는지 묵묵히 마차를 이끌 뿐이었고.
브랜드는 잠에 들었는지 팔짱을 낀 채로 눈을 감고 고개를 숙인 상태였다. 기절한 여성은 이따금씩 흘리는 신음 소리 말고는 깨어날 기미 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 속에서 현성은 그저 멍하니 브랜드를 바라봤다.
처음에는 이렇게 바라보고 있으면 눈을 감고 있었는데도 그만 쳐다 보라고 했었는데. 아무 말도 없는걸 보면 정말로 잠에 든 것 같았다.
어쩌면 아예 신경을 꺼버린걸 수도 있고.
어찌됐든 현성은 비릿한 냄새에 마비된 코를 문지르며 억지로라도 잠을 청하기로 했다.
어차피 할 짓도 없으니까.
***
아침은 생각보다 빠르게 다가온다.
히이잉.
끼이익.
말이 울음 소리를 내며 속도를 줄이자. 그에 따라 마차도 천천히 멈춰섰고. 이윽고 마부가 마차의 문을 열어 브랜드와 현성을 깨웠다.
현성은 잠에서 깨어나 비몽사몽한 눈으로 주변을 살폈다.
역시나 꿈은 아니었다. 설마 했는데 그럴 리가 있나. 현성은 자신의 처지를 떠올리며 있는 힘껏 기지개를 폈다.
우두둑.
뻐의 마디에서 소리가 남과 동시에 시원한 느낌이 찾아왔고. 현성은 잠을 완전히 떨쳐내며 정신을 차렸다.
정신을 차린 현성은 우선 여성을 살폈다.
숨소리가 고른걸 보니 상태가 양호한 듯 했다.
지금 쯤이면 약효도 다 끝났을 것 같은데 깨워야 될까?
현성은 나름의 고민을 하다 일단은 깨우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러고 나서 현성은 바깥으로 나왔다.
밖으로 나오자 뙤약볕이 현성을 반겼고. 눈부신 와중에도 얘기를 나누고 있는 브랜드와 마부에게 다가갔다.
"이번만 봐주도록 하지. 다음부터는 조심하도록."
아무래도 브랜드에게 질타를 받고 있는 중인 듯 했다.
"좋은 아침이에요."
그들에게 현성은 먼저 인사를 건냈다.
그러나 돌아오는 반응은 마냥 좋지 않았고. 그제서야 현성은 자신이 취급이 좋지 않은 신분임을 깨닫고는 멋쩍게 웃어넘겼다.
그런 현성을 브랜드는 무덤덤한 눈빛으로 한 번 스윽 훑었고. 자신의 붉은 머리칼을 뒤로 넘기며 입을 열었다.
"아무튼간에 돌아가면 똑바로 보고 하도록."
"암요, 당연히 그래야지요. 헤헤."
돌아가면?
마부는 이제 돌아가는걸까?
현성은 둘의 대화를 듣고는 생각에 잠겼다.
마부가 돌아간다는 것은 이곳이 엘프의 영역이라는 얘기일텐데. 사람은 커녕 벌레 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이봐, 가서 짐 챙겨."
브랜드가 멀그러니 서있던 현성에게 말을 걸어왔고. 현성은 짐을 챙기로 가기 전에 브랜드에게 한가지 질문을 꺼냈다.
"그 여성 분은 어떡해요?"
아, 브랜드는 여성의 존재를 깜빡하고 있었는지 탄식했고. 아무말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둘은 사이좋게 마차에 다시 들어왔고. 현성은 우선적으로 짐을 먼저 챙겼다.
그러는 사이 브랜드는 여성을 내려다 보며 생각이 잠긴 듯 턱을 쓸어내리다가. 이내 결정했는지 여성을 가볍게 들어올려 어깨에 얹혔다.
"쓰읍... 도착하고 나서 깨우는게 낫겠네."
목적지까지 얼마나 남았는 지는 몰라도 현성은 브랜드의 말에 어느정도 동의했다.
당장에 여성을 깨워봤자 한차례 난리가 날게 뻔했으니까. 그렇게 된다면 일정이 늦춰지는건 안 봐도 비디오였다.
차라리 도착하고 나서 깨우면 진정 부터 시키고 상황을 설명하기만 하면 됐다.
이러나 저러나 나중에 깨우는게 편했다.
"얼른 나가. 빨리 출발해야 되니까."
현성은 브랜드의 말에 이번에도 별 말 없이 따랐다.
그러나 등을 돌려 나가려는 순간, 의자 밑에 번쩍 거리는 것이 보였고. 현성은 곧바로 그것을 꺼내들었다.
"...검?"
그것의 정체는 다름 아닌 검.
현성은 검이 왜 의자 밑에 있던건지 의문이 들었다.
처음에는 브랜드의 것인가 했었지만. 브랜드의 허리춤에는 이미 검 한자루가 꼽혀 있었다.
그렇다면 이것은...
"하.. 그 새끼가 진짜 뒤지려고 작정했나."
오우야, 현성은 지켜보기만 하다가 느닷없이 욕설을 뱉는 브랜드의 목소리에 순간 흠칫했다.
여기서 '그 새끼' 는 듀란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마 급하게 짐을 챙기다가 미쳐 챙기지 못한 듯 했다.
"이거... 어떡하죠?"
현성은 검지 손가락으로 검면을 쓸어내리며 브랜드에게 물었다.
"어떡하긴... 챙겨야지."
아, 챙기는 구나. 그런데 마부에게 맡기면 되는거 아닌가? 현성은 머릿속에 든 의문을 숨기지 않았고. 그에 대한 대답은 질문이 채 끝가기도 전에 돌아왔다.
"수습이라고 해도 기사의 검을 마부 따위에게 맡기면 쓰나. 쓰레기 같은 놈이라고 해도 명에 때문에라도 챙겨야지."
기사에게 검이 가진 의미가 큰 듯 했다. 말마따라 명예와 큰 관련이 있는 거겠지.
"일단 너가 가지고 있어. 괜히 어설프게 다룰 생각은 하지도 말고."
어차피 이걸 휘두를 생각 조차 없었다. 척 봐도 위험해 보이는 날붙이를 무턱대고 휘두를만큼 현성은 어리석지 않았다.
그렇게 현성은 검과 주머니를 챙겨 밖으로 나왔고. 브랜드도 여성을 챙겨 마차에서 나왔다.
그러자 마부는 기다렸다는 듯이 말머리를 돌려 왔던 길을 되돌아갔고. 현성과 브랜드는 본격적으로 숲이 시작되는 입구에 남겨졌다.
"여기서 부터는 위험하니까 바짝 붙어 있어."
들어가기 전 부터 들려오는 경고. 현성은 이유 조차 모른 채 바짝 긴장했고. 브랜드는 허리춤에서 검을 꺼내 공격에 대비했다.
여기서부터는 제국령에서 벗어나는 곳.
숲에 들어서는 순간부터는 그리 강하지는 않지만 각종 몬스터들이 언제 어디서 습격해 올지 모르는 곳이었다.
목적지인 엘프의 영역에 도달하려면 이 숲의 일부를 통과해야만 했다.
브랜드 혼자서라면 상처 하나 없이 통과했겠지만, 지금은 현성을 비롯해서 유사 짐짝까지 매고 있는 상태.
죽을 정도로 위험한건 아니지만, 오늘은 특히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가자."
브랜드가 한 발자국을 내딛으며 외쳤고. 현성이 그 뒤를 따라 엉거주춤 따라나섰다.
***
서걱-
섬뜻한 소리에 현성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이걸로 벌써 서른번 째, 숲에 들어온 순간 덮쳐오기 시작한 괴물들은 브랜드의 검에 두동강이 난 채로 시체가 되어 대량의 피와 함께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리고 현성은 그것들을 차마 마주할 수 없었기에 잔뜩 겁 먹은 채로 살기위해 브랜드의 뒤를 바짝 쫓아갔다.
"후욱, 씹새끼들. 오늘 따라 많이 깝치네."
브랜드도 점점 지쳐가는지 거친 숨을 내쉬었다.
이거... 안전하게 도착할 수는 있는걸까? 현성은 불길한 생각이 머리속에 들었으나 금방 지워냈다.
부정적인 생각은 정말로 상황을 부정적으로 이끄는 법이었으니까.
그 순간.
"씨발, 피해!"
브랜드가 다급히 현성에게 소리를 내질렀고. 현성은 그대로 생각과 함께 몸이 멈췄다.
그리고 현성은 옆에서 빠르게 다가오는 작은 체구의 녹색 괴물과 눈이 마주쳤다.
"키헤헤!"
괴물은 현성을 잡았다고 생각했는지 기분 나쁜 웃음을 보였고. 현성은 안 그래도 멈춰버린 머리가 새하얗게 번지는 것을 느꼈다.
퍽-
고통.
그러나 그 고통을 느끼게 만든 이는 괴물이 아니었다.
서걱-
다시 한 번, 서른 한 번 째 괴물이 바닥을 나뒹굴렀다.
"씨발, 정신 안 차려? 뒈지고 싶은거 아니라면 그 검이라도 휘두르라고!"
브랜드가 바닥에 엉망진창으로 쓰러진 현성을 향해 흥분한 상태로 외쳤다.
그도 그럴것이 오늘 따라 유난히 습격해오는 몬스터들의 숫자와 빈도 수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분명히 예전에 왔을 때는 이것의 반만큼도 안 됐는데.
브랜드는 아직 엘프의 영역까지 한참이나 남았음에도 벌써부터 급격히 줄어드는 체력에 초조했다.
아무래도 한 명을 업고 싸우는건 아무리 자신이라도 무리인 듯 했다.
그렇다고 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미치고 환장할 따름이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역겹더라도 듀란을 데려오는 거였는데.
하지만 후회해봤자 소용 없는 노릇.
브랜드는 숨을 크게 한 번 내쉬며 말했다.
"후우, 여기서 잠깐 숨 좀 죽이고 간다. 그렇다고 경계를 늦추지는 마."
쉴 수 있을 때 쉬어야 되는 법, 브랜드는 일단은 잠깐 휴식을 취하고 가기로 결정했다.
다행히도 놈들도 동료들이 많이 죽으니 저들끼리 눈치 싸움이라도 하는 듯 망설이는 동향을 보였다.
포위망을 좁혀오고 있기는 했지만 그래봤자 고블린.
뚫는 것은 너무나도 쉬웠다.
그러나 여전히 문제는 남아 있었다.
"이봐, 너. 검 같은거 다뤄본 적 없지?"
브랜드의 물음에 현성은 당연하게도 고개를 저었다.
식칼을 들어본 적은 있어도. 얼추 일미터는 되어 보이는 검을 들어본 적이 있을리가 없었다.
"씨발, 그러면 대충 아무렇게나 휘둘러."
어차피 방법을 알려줘봤자 머리만 복잡해진다. 브랜드는 무책임한 말이었지만 그렇게라도 하라고 했다.
때로는 본능에 의존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었으니까.
브랜드는 슬슬 다시 출발하고자 했다. 그러나 진지한 표정으로 듀란의 검을 집어든 현성의 모습에 발걸음을 멈췄다.
"...한가지 생각나는게 있긴 해요."
...
브랜드는 못 미덥긴 했지만 어디 한번 들어나 보기로 했다.
자신이 있으니 제안을 하는걸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