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화 〉용사입니다. 엘프는 비겁하네요.
현성은 저택의 주인이 에리엘이라는 사실에 놀라면서도, 따라 오라는 말에 어제 처럼 쫄쫄 따라갔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저택의 고풍스러운 방 안.
후룩-
현성은 에리엘이 사람을 시켜 대접해온 차를 들이켰다.
은은하게 달면서도 씁쓸한게 홍차맛 음료와 비슷한 맛이 났다.
"그래서... 무슨 용무로 온걸까? 돌연변이 주제에, 후후."
에리엘이 음흉하게 웃으며 장난스레 말을 건내왔다. 현성은 적어도 에리엘의 목소리에서 적의나 비꼬는 듯한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안도감을 느꼈다.
"으음... 상의를 벗고 있는걸 보면. 혹시 저번에 못 한걸 마저 하고 싶어서 찾아 온건가?"
취소.
장난인 것 같기는 했으나 에리엘은 다른 의미로 위험했다.
"그런거 아니에요..."
현성은 멋적게 웃으며 에리엘의 장난을 넘겼다. 이에 에리엘은 다소 놀란 듯, 자신의 머리를 쓸어내리던 손을 멈췄다.
더군다나 뭔가 아쉬워하는 눈치였기에 현성은 식은땀을 흘렸다.
솔직히 말해서 저번 처럼 맨몸으로 유혹해온다면 버틸 자신이 없었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지금도 지난 번의 일이 자꾸만 떠올라 약간 뻣뻣해진 상태였기에, 다리를 꼬는 것으로 애써 숨기고 있는 중이었다.
"흐음... 의외네. 인간 남자라면 이미 덥치고도 남았을텐데."
에리엘은 이런 짓을 한 두번 해온게 아니였는지 경험에서 우러 나온 듯한 말을 꺼냈다.
현성은 딱히 할 말이 없었기에 웃음 짓는 것을 고수했고. 에리엘은 왜인지 모를 음흉한 눈빛을 보였다.
"자꾸 그러면 덮치고 싶은걸?"
어라...? 이게 아닌..
뭔가 잘못된 느낌. 현성은 느닷없이 불길한 예감이 닥쳐옴에 따라 다소 부자연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하아... 생각만해도 재밌을 것 같에."
일어나는 순간, 또 다시 튀어나온 재밌다는 표현.
에리엘은 상기된 얼굴로 현성을 보며 입맛을 다시고 있는 상태였다.
먹힌다. 에리엘의 유혹에 넘어가 먹혀버릴거다.
현성은 천천히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에리엘의 손짓 한 번에 움직임이 저절로 멈췄다.
몸 전체를 짓눌러오는 압박감. 현성은 자신의 의지대로 몸이 움직이지 않음에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이게 뭔지는 몰라도 마법 같은 것이리라.
"이리로 와."
명령조로 뱉어진 말, 현성은 저절로 몸이 움직임에 당혹감을 느꼈다.
의지와는 상관없이 움직여지는 감각은 정말이지 불쾌했다. 하지만 현성은 아무런 반항 조차 할 수 없었다.
탁-
몇 번의 걸음 끝에, 현성은 에리엘의 앞에 서게됐다.
스으윽...
"흣.."
에리엘의 차가운 손이 현성의 가슴과 복부를 어루 만졌고. 현성은 불쾌하면서도 척추를 타고 흐르는 짜릿함에 신음을 뱉었다.
그저 만지기만 했을 뿐인데도 소리가 튀어나오다니.
현성은 자신의 몸이 이토록 예민했나 싶었다.
"좋지?"
나지막이 건내는 그 말에 현성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너무 좋다.
그저 손길 한 번일 뿐인데도, 약에 취한 이로하의 적나라한 유혹 보다 강력한 자극이 전해진다.
그렇다고 해서 이로하의 외모와 몸매가 절대 못 난게 아니었다. 오히려 남자들이 꿈꾸는 이상형에 가까웠다.
짧은 단발 머리에 고양이 상의 얼굴. 보조개에 주근깨가 있긴 했지만, 오히려 하나의 매력적인 요소로 넘길만한 정도였다.
거기에 섹시한 인상을 주는 구릿빛 피부와 작은 체구에서 오는 특유의 귀여운 매력까지 있었다.
더군다나 가슴은 남자들이 원하는 너무 크지도 빈약하지도 않은 딱 알맞는 크기.
아마 사회에서 봤다면 첫눈에 호감을 품을만한 외모였다.
그러나 에리엘은 그 모든것을 압살했다.
인간 대 인간으로 느낄 수 있는 호감이라면 몰라도 성적인 매력에서 오는 호감은 이로하는 절대로 에리엘을 이길 수 없을 터였다.
그 사실을 증명하듯 현성은 어느샌가 바지 속까지 들어와 거대해진 자지를 어루만지는 에리엘의 손을 뿌리치지 못 했다.
"흐윽..!"
쾌락.
왜 이 엘프의 손길은 이토록 좋단 말인가.
여자 경험이라고는 에리엘과의 일 밖에 없는 현성이었지만, 이 느낌이 결코 평범한게 아니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갈 것 같아..? 후후."
"흐윽... 그, 그마안!"
절정감.
남자라면 절대로 참을 수 없는 그 어마어마한 것이 파도를 치며 올라왔다.
현성은 간신히 초인적인 정신을 발휘하여 다급히 외쳤고. 에리엘은 기다렸다는 듯이 장난스레 웃으며 손을 바지속에서 빼냈다.
그제야 되돌아오는 이성에 현성은 뒤로 두 발자국 물러났다.
사정 직전까지 되어서야 멈춘다니.
위험한 여자.
현성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에리엘에 대한 인상이 심어졌다.
"저한테 왜 이러는 겁니까...?"
본능에서 오는 거부감.
에리엘을 향한 현성의 말투가 차갑게 변했다.
"실컷 즐겨놓고 왜 그러는건지 모르겠네?"
즐겼다고 말하면 할 말은 없었다. 유혹을 했다고 해도 넘어간 것도 잘못이 있긴 있으니까. 하지만 현성은 무언가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무엇인지 시원하게 밝힐 수는 없었으나 느낌상 그랬다.
예를 들어 마법 같은...
"뭐... 이런 것도 재밌네."
재밌다니. 도대체 뭐가 재밌다는걸까.
현성은 에리엘의 언행을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됐고. 앉기나 해. 얘기는 마저 해야지."
이렇게 끝?
현성은 상황이 흘러가는 것에 이상함을 느꼈다.
그런 음란한 행위를 하고도 에리엘은 그저 약간 상기된 얼굴로 즐거운 듯한 표정을 지을 뿐, 너무도 태평했다.
자신은 정신이 나갈 것 같은데 말이다.
"앉아. 세 번 말하게 하지 말고."
위압감. 어떻게 단순히 말을 내뱉을 뿐인데 위압감을 느끼게 만드는 걸까.
현성은 당장이라도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얌전히 에리엘의 말을 따랐다.
보나 마나 조금 전과 같은 마법으로 똑같은 짓을 버릴테니까.
현성은 그 불쾌한 감각을 다시금 느끼고 싶지 않았다.
"후우, 그래서 용건이 뭔데?"
드디어 본론. 여기까지 오는데 너무도 험난한 과정을 거쳤다. 현성은 본래의 용건을 입밖으로 꺼냈다.
"레이첼 씨를 만나러 왔는데요."
이번에도 까칠한 말투. 현성은 에리엘을 향한 경계심을 낮추지 않았다.
허나 에리엘은 그것 마저도 흥미롭다는 시선으로 바라봤고. 현성은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흐르는 느낌에 몸서리를 쳤다.
"레이첼? 너가 레이첼을 어떻게 알지?"
반문.
당연히 자신이 왜 레이첼을 아는지 에리엘이 알리가 없었다.
"어제 우연히 만났는데요?"
다만 구태여 상세하게 설명할 이유는 없었기에 간략하게 나마 넌지시 말했다.
"우연히 레이첼을 만났다라... 둘이 만나서 뭐 했는데?"
으음... 레이첼이 말하길 이 저택의 주인이 친구랬으니. 에리엘과 레이첼은 친구 사이.
설마 내가 자신의 친구한테 몹쓸 짓이라도 할 줄 알고 저런 질문을 하는가 싶었다. 몹쓸 짓이라면 레이첼의 집을 방치한게 몹쓸 짓 그 자체였지.
그러나 현성은 에리엘에게 단단히 화를 품은 상태였다.
그렇기에 물어본다고 곱게 말해 줄 생각 따위는 없었다.
그렇게 말을 하지 않고 침묵하고 있으니 에리엘이 반응을 보였다.
"말하기 싫어? 그러면 나도 못 보내주는데..."
으윽, 되도 않는걸로 협박을 해온다. 벌써 시간이 많이 지체 된 것 같은데..
현성은 어쩌면 레이첼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 놈의 자존심이 뭐라고 현성은 말하기가 싫었다.
현성은 단단히 입을 다물었고. 에리엘을 향해 결의에 찬 눈빛으로 응답했다.
"뭐야, 지금 반항하는 거야? 재밌네..?"
눈썹을 치겨 올리며 에리엘도 두 눈을 빛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장난감이 된 것 같은 착각이 들정도로 일방적인 그 시선에 현성은 은근히 겁을 먹었다.
"좋아, 나도 어느정도 장단을 맞춰주도록 할까?"
저 말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대답을 들을 수 있다는 건가. 현성은 슬슬 상황이 잘못 되감을 느꼈다.
차라리 그냥 말할걸 그랬나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불안한 예감이 들었고. 이는 첫 신경전부터 패배한 모양세였다.
하지만 현성은 은근 승부욕이 강한 편이었기에 쉽게 물러설 생각은 없었다.
"내기나 할까? 내가 정하면 형평성이 어긋날테니..."
뒷말은 하지 않고 시선을 보내온다.
종목은 내가 정하라는 얘기, 현성은 깊히 고민했다.
자신이 에리엘을 이길만한 게 뭐가 있을까.
그렇게 몇 분간 고민한 결과, 현성은 종목을 정했다.
조금은 얍삽하다고 볼 수 있는 걸로.
"넌센스 퀴즈라고 알아요?"
"넌센스 퀴즈?"
아니나 다를까 에리엘은 모르는 듯한 눈치. 현성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걸로 승부한다면 필히 이길 수 있다고 확신했다.
"언어유희라고, 말장난을 이용한 문제를 내면 되는건데. 알아요?"
현성은 그래도 게임의 규칙을 설명하지 않는 것은 비겁하다 느꼈기에 어느정도 설명을 해줬고. 에리엘은 제대로 알아 들었는 지는 몰라도 눈썹을 모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시작할 차례. 현성은 공사판의 아저씨들로 부터 전수 받은 각종 아재 개그들 중에서 뭘 낼지 고민을 하며 입을 열었다.
"자, 그러면 제가 먼저.."
"음, 뭔 소리야?"
하지만 도중에 끼어든 에리엘에 의해 현성의 말은 도중에 끊겼다.
"왜요? 더 설명이 필요해요?"
왜 말을 끊은걸까. 현성은 친절히 아량을 베풀어 이유를 물었고. 에리엘은 불리한 상황이 분명한데도 여유로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종목은 너가 정했으니. 공평하게 문제를 내는건 내가 해야되지 않겠어?"
아, 그러네.
현성은 이길 생각에 미쳐 생각치 못한 곳에서 불상사가 나타났다.
하지만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 종목은 자신이 정했으니 문제를 내는 것은 에리엘에게 넘어가는 것이 맞았다.
"그렇게 해요. 지금 바로 문제 낼건가요?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면.."
"아냐, 괜찮아. 바로 할게."
문제를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면 줄 생각이었는데, 이미 생각해 놓은건지 거절한다.
그러고 보니 규칙을 따로 정했던가?
현성이 순간 의문이 드는 찰나. 막을 세도 없이 에리엘의 선분홍빛 입술이 움직였다.
"세상에서 가장 괴팍하고 역겨우면서 그 무엇 보다도 아름다운 생명체가 뭔지 알아?"
괴팍하고 역겨우면서 아름다운 생명체.
앞에 붙은 표현을 제외하고도 뭔가 이상했다.
넌세스가 맞는 것 같기는 한데... 왜 뭔가를 비난하는 것 같지?
뭐, 딱히 상관은 없으려나.
이윽고 현성은 에리엘이 말하는 생명체가 무엇일까 생각했다.
인간?
강아지?
고양이?
아니다, 전부 아니다.
때려 맞추기 식으로 생각하면 셋 중 하나는 맞았지만. 꼭 한 두개씩 빗나갔다
아무리 단순하게 생각해보려고 해도 뭔지 감 조차 안 잡혔다.
"음... 시간을 너무 오래 쓰는거 아냐?"
생각을 하다 보니 집중을 해버린 것인지 시간이 꽤 지난건가.
이런 퀴즈 종목에서 시간을 많이 쓰는건 안 됐기에, 현성은 양심상 두 손을 들어올리며 항복을 표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네요."
이걸로 1패. 현성은 자연스레 자신의 차례를 잡으려고 했다.
"이제 제가 낼 차례.."
그러나 에리엘이 음침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또 한번 현성의 말을 끊었다.
"내가 이겼는데 왜?"
이겼다니, 그게 무슨.
고작 한 판을 했을 뿐인데.
"적어도 삼세판은 해야죠."
이런 승부는 삼세판이 국룰인데 말이다.
"삼세판? 그런 규칙은 없었던 걸로 아는데."
아, 규칙. 현성은 규칙을 정하지 않았던게 이렇게 흘러갈 줄은 몰랐기에 당황했다. 그러나 미리 규칙을 설명하지 않은 것도 자신이었다.
그래도 이대로 지는건 뭔가 억울했기에 어떻게든 설득 시키고자 했다.
"그러면 제가 너무 불리하잖아요. 공평하게 삼세판으로 해요."
"내가 왜? 종목을 정한거 너인데 뭐가 불리하다는 얘기지?"
아니, 그건 맞는데...
퀴즈 같은 게임을 단판으로 하면 당연히 문제를 먼저 내는 사람이 이기는게 정상이지 않은가.
현성은 어이가 없었다. 분명히 에리엘 또한 이 사실을 알텐데 모르는 척을 하고 있는 듯 했다.
음침하게 웃는걸 보면 분명했다.
아무리 봐도 처음부터 설계를 한게 아닌가 싶었다.
그냥 배 째고 뻐팅길까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정말로 배를 째버릴 것 같았기에 얌전히 납득했다.
어차피 어제 레이첼과 있었던 일을 말하는 것에 불과한데 굳이 그런 리스크를 감수할 필요는 없었다.
"말할게요, 됐죠?"
"그래, 친히 들어주도록 할까나?"
재수없는 엘프.
현성은 속으로 에리엘을 욕하며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