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화 〉용사입니다. 분위기가 무겁네요.
현성은 떠나기 전, 에리엘에게 부탁하여 옷한벌을 새롭게 구해 밖으로 나갔고.
레이첼이 기다리고 있을 건물로 향했다.
가는 길은 그리 어려운 편은 아니었기에 현성은 해매는 일 없이 건물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렇게 마지막 모퉁이를 드는 순간, 현성은 갑자기 튀어나온 한 인형과 몸을 부딪혔고.
다행히도 넘어지지는 않았으나 현성과 부딪힌 이는 쿵, 소리를 내며 흙바닥을 굴렀다.
그리고 현성은 자신과 부딪힌 이가 레이첼임을 확인하고는 너무 늦은 것에 대해 미안한 마음이 듬과 동시에 손을 내밀었다.
"죄송해요. 제가 많이 늦었죠?"
텁
"알면 됐다. 어차피 늦잠을 자서 많이 기다리지도 않았고."
레이첼이 내민 손을 붙잡고 몸을 일으켰고. 옷에 묻은 흙을 털어내며 답했다.
척 봐도 빈말임이 분명했으나 현성은 왜인지 레이첼이라면 정말로 그랬을 것 같아 그저 멋적게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그러면 어제 하던걸 마저 해볼까요?"
어서 빨리 청소 부터 하자. 현성은 늦은만큼 더 빠릿하게 움직이고자 했고. 레이첼은 기다렸다는 듯이 두 손으로 현성의 손목을 잡고선 끌어당겼다.
"기다리는 동안 음식을 준비해놨으니 먹고 하자!"
아, 음식까지 준비해놨던 걸까.
역시 일찍부터 기다리고 있던게 맞았나 보다.
현성은 뒤늦게 나마 알았으니 그나마 다행이라 여겼고. 그만큼 더 열심히 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런데 설마 어제 그 식기를 그대로 쓰지는 않았겠지?
현성은 괜히 식중독이라도 걸릴까봐 가슴이 쫄렸다.
***
레이첼이 차려준 음식은 의외로 멀쩡했다.
그냥 스튜 같은 국물류에 고기를 구운 것이 전부였고. 맛도 평균 이상의 것이었다.
헌데 왜일까.
...
이 산더미 처럼 쌓인 음식들은.
현성은 레이첼이 더 먹으라며 가져온 음식의 양에 당혹스러웠다.
본래 살던 곳인 한국도 인심이라면 빠지지 않는 국가인데,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어디서 소라도 잡아온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말이다.
"어디 잔치라도 해요..?"
이 동네 엘프들이 열댓명은 모여야 해결되지 않을까 싶었고. 레이첼은 오히려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고선 들고 있던 포크로 고기를 쿡 찔렀다.
"보통 인간은 이 정도 먹지 않나?"
절대 무리.
어디서 그런 말도 안 되는 얘기를 듣고 온걸까.
현성은 강한 부정의 뜻으로 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저것은 대식가 너튜버들이 와도 못 먹을 양이었다.
"음... 내가 잘못 알고 있던걸까?"
레이첼은 특유의 짧은 금발 머리를 손으로 둘둘 말며 곤란하다는 듯이 말했고. 현성은 질겁한 눈으로 한가득 쌓인 음식들을 바라봤다.
"평범한 인간은 아무리 많이 먹어도 이거 세조각이 끝일걸요?"
손바닥 두뼘만한 스테이크였으니 어쩌면 세조각도 무리일 수 있겠지만. 현성은 지금 그게 중요한게 아니었다.
"이거.. 어쩔거에요? 또 버리게 생겼는데."
분명 어제 그토록 많은 양의 음식을 버렸던 것 같은데. 또 버리게 생겼다.
"그치만 아까워. 정성스레 만든건데 한동안 전시용으로 놔둬도 될 것 같지 않나?"
하아...
되도 않는 소리를 하고 있다. 이 엘프는 도대체 정신머리가 있는거야 없는거야.
"아깝죠. 아깝긴한데, 이걸 전시용으로 놔두는건 좀 아니지 않아요? 벌레도 꼬일거고 냄새도 날테고..."
현성은 최대한 논리적으로 설득하고자 했다. 그러나 레이첼은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또 이상한 소리를 뱉었다.
"그거는 원래 그래서 괜찮다!"
빠직, 현성은 답답함이 한계치까지 올라왔다.
"그럴거면 청소를 왜 하는 걸까요? 참 의문이죠?"
대놓고 욕은 못 하겠고. 현성은 애써 미소를 지으며 굳이 빙빙 말을 돌림으로써 눈치를 줬다.
레이첼은 그제야 자신이 잘못했다는걸 아는지 고개를 숙이며 시무룩하게 입술을 삐죽였다.
"그치만 내 정성이..."
정성...
그래 정성을 생각하면 그럴만도 한데. 그래도 안 되는건 안 되는거다.
하지만 시무룩해 하는걸 보면 괜히 마음이 약해진다.
"후... 둘이서 최대한 먹어보고. 그래도 남으면 버리는걸로 해요. 그러면 되죠?"
"그러지 뭐..."
결국 현성은 최대한 레이첼의 뜻에 맞춰 합의점을 찾았다. 레이첼은 시무룩함을 숨기지 않았다.
사실 현성도 아깝긴 했다.
저 정도 양이면 고아원의 아이들 전부가 배불리 먹고도 다음날까지도 먹을 수 있는 양이었으니 말이다.
...
잠깐만.
현성은 곧 자신의 생각이 짧았음을 느꼈다.
그냥 다른 이들한테 나눠주면 되는 것 아닌가?
음식이 많이 남았으면 주변에 나누어 주면 되는 노릇.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정 버리는게 싫으면 주변에 나눠 주던가요. 버리는 것 보다는 그게 낫지 않을까요?"
현성은 재차 얘기를 꺼냈다. 물론 말을 바꾸는 것과 마찬가지였기에 살짝 레이첼의 눈치를 보면서 말이다.
그러나 레이첼은 시시각각 표정이 변하는게 보일 정도로 두 팔을 활짝 피며 환호했다.
"그래!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한거지!? 현성 너는 천재다!"
천재라니. 그건 너무 과한 과찬인 것 같은데...
아무튼 좋은게 좋은거니까.
"지금 당장간다! 현성, 출발하자!"
아주 파이팅 넘치는 모습으로 두 주먹을 불끈 쥐며 자리를 박찬다.
보기는 좋다만...
"이걸 둘이서 어떻게 들고가요?"
현성이 한가득 쌓인 음식을 손가락으로 게슴츠레 가리키며 물었다.
저 음식을 둘이서 들고가기란 절대로 불가능했다.
적어도 자신이 가진 상식으로는.
그러나 레이첼은 뭐가 문제냐는 듯한 제스쳐를 취하고는 음식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레이첼의 손 주위로 연두색의 연기 같은 것이 일렁거렸고. 그 연기는 음식을 향해 날아갔다.
부우웅-
이윽고 연기가 닿자 음식의 든 식기가 공중으로 떠올랐고. 현성은 순간 이게 뭔가 싶었지만 이것이 마법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자. 가자!"
레이첼이 신명나게 손을 앞으로 뻗으며 문을 박차고 나갔고. 음식 또한 레이첼을 따라 공중에 붕 뜬 채로 날아갔다.
아, 청소도 해야 되는데.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이 현성도 레이첼을 따라 나섰고. 문밖에서는 레이첼이 현성을 기다리고 있었다.
킁킁-
그때 레이첼이 갑자기 현성의 몸에 코를 가까이대며 냄새를 맡기 시작했고. 현성은 에리엘과 나눴던 정분의 냄새가 몸에 남아 있을 것 같았기에 저도 모르게 슬쩍 뒷걸음질을 쳤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모르는 것 같았는데 왜 지금...
현성은 계속 코를 킁킁대는 레이첼의 모습에서 불안감이 들었다.
"으으.. 현성, 너한테서 역한 냄새가 난다. 돌연변이는 씻지도 못 하는건가? 옷은 갈아 입은 것 같은데..."
다행히도 레이첼은 정액의 비린내를 느끼지 못하는 듯 했다.
그런뎨 내게서 그렇게 역한 냄새가 나는걸까?
현성은 그런 생각과 함께 손목 부근을 코에 가져갔고. 이내 코를 찌르는 역한 냄새에 구토감이 올라와 켁켁 거렸다.
고작 며칠 안 씻었을 뿐인데 무슨 냄새가...
현성은 이상하다 느꼈지만. 며칠간 있었던 일을 생각하니 냄새가 안 나는게 이상하다는걸 깨달았다.
땀은 기본이고 괴물들의 피를 뒤집어 쓰기도 한데다가 레이첼의 집을 청소하면서 그 역한 냄새가 몸에 베이고도 남았을테니까.
이쯤되면 냄새가 안 나는게 이상했다.
또한 에리엘은 이리도 냄새가 나는데 어떻게 관계를 나눌 수 있었던 건지도 의문이었다.
당연히도 현성은 찝찝함에 씻고 싶은 기분이 온몸에 들었다. 하지만 과연 그 누가 자신을 씻게 해줄 지가 의문이었다.
그 누가 뭐래도 자신은 돌연변이인데.
"몸을 씻고 싶기는 하죠... 그런데 씻을 곳이 있을까 싶네요."
현성은 자신의 처지에 한탄하며 한숨을 쉬었고. 이에 레이첼은 자신의 가슴을 오른손으로 툭툭 치며 눈썹을 좁혔다.
"나만 믿어라! 내 친구라면 도와줄거다! 안 되면 내가 어떻게든 설득해서라도...!"
아, 이건 가슴이 뭉클해질 정도의 감동이 몰려온다.
자신과 레이첼의 사이는 고작해야 가르침을 대가로 청소를 해줄 뿐인 관계인데, 잠깐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을 도와주겠다는 레이첼에게서 현성은 고마움을 느꼈다.
그런데 레이첼의 친구라면...
***
익숙한 방.
분명 나올 때는 어지럽혀 있었는데 그새 말끔하게 치워져 있었다.
지그시.
건너편에 에리엘이 눈웃음을 지으며 노골적으로 시선을 보내온다.
현성은 그 시선의 의미를 알기에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고. 그러는 와중에도 레이첼은 한껏 텐션이 업된 상태였다
"오랜만이다, 에리엘!"
바로 옆집인데도 자주 만나는건 아닌 모양.
"그래, 오랜만이네. 잘 지냈어, 레이첼?"
에리엘의 눈웃음이 이번엔 레이첼을 향해갔고. 현성은 그 사이 잠깐 숨을 죽였다.
"나야 잘지냈다. 에리엘은 잘 지냈나!?"
"음... 잘지냈지, 후후."
음흉한 웃음 소리를 흘리며 에리엘의 시선이 다시 현성에게 향했고. 현성은 이번만큼은 그 시선을 똑바로 마주했다.
괜히 피했다가는 레이첼이 눈치챌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느닷없이 무슨 일로?"
그러자 에리엘이 시선을 거두며 턱을 괴며 레이첼을 향해 물었고. 레이첼은 여전히 공중에 떠있는 음식을 천천히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쿵-
살살 올려놨음에도 무게가 막중한 탓인지 큰 소리가 방안을 채웠고. 에리엘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가는게 보였다.
"그건 왜...?"
"선물!"
분명 에리엘의 표정은 좋지 않은게 보이는데 레이첼은 너무도 순진무구한 표정이었다.
그런데 설마 저걸 다 준다는 얘기인가? 에리엘이 무슨 짬통도 아니고. 어떻게 저걸 다 먹는단 말인가.
현성이 속으로 눈치라고는 전혀 없어 보이는 레이첼을 탓하고 있자니. 이윽고 간신히 표정을 웃는 얼굴로 바꾼 에리엘이 두 주먹을 꽉 쥐고선 여유로운 척 입을 열었다.
"...고마워. 애들 밥으로 챙겨줘야겠네."
애들 밥으로 챙겨준다?
말 그대로 정말로 애한테 준다는 얘기는 아닌 것 같고. 키우는 애완동물한테 준다는 뉘앙스인 듯 했다.
저택도 넓은데 애완동물이 있다고 해서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그래서 용건은 그게 끝?"
"아니? 하나 더 있다."
눈치만 없는게 아니라. 염치도 없는걸까.
현성은 당당히 용건을 추가하는 레이첼의 모습에 존경을 표했다.
사람이 어쩜 저렇게 마이페이스일 수가 있을까.
"후우... 그래서 남은 용건이 뭔데?"
에리엘이 이마를 짚고 한숨을 토하며 얘기를 꺼냈고. 레이첼은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다리를 흔들며 곧장 대답했다.
"내 제자가 씻고 싶다는데 욕조 좀 쓰게해줘."
...?
제자?
뭔가 표현이 생소하긴 했지만 그러려니 했다.
뭔가를 배운적은 없었으나 어떻게 보면 제자가 맞을테니까.
헌데 왜 에리엘이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하게 레이첼을 바라보는 걸까.
현성은 갑자기 무거워지는 분위기에 당황하며 다리를 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