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화 〉용사입니다. 엘프의 제자가 될 것 같습니다.
방안에 가득찬 무거운 공기.
지극히도 낯선 천장.
현성은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천장에 이곳이 어디인가 싶었고. 누운 상태이던 몸을 일으켜 주변을 살피려는 순간, 자신을 덮쳐오는 누군가로 인해 당황에 빠졌다.
"현성, 괜찮은가!?"
바로 턱밑에서 들려오는 레이첼의 목소리.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짙은 술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으나 한잔 거하게 걸친 듯 했다.
허나 현성은 딱히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처음 봤던 순간에도 해가 짱짱한데도 술에 취한 상태였으니 말이다.
"뭐에요, 갑자기?"
"흐윽- 내가 다 잘못 했다! 미안하다!!!"
어이쿠야, 기차 화통이라도 삶아 드셨나.
현성은 고막이 터져라 목청껏 소리를 내지르는 레이첼에 의해 순간 얼굴을 찌푸렸고. 곧이어 머리에 띵한 느낌이 감돌며 기억이 점점 돌아왔다.
레이첼의 분노에 쓰러진 자신의 모습, 그렇게 신과 만나 대화를 나눴던 것.
마지막에 무언가 경고를 한 것 같았으나 뚜렷하게 기억이 나지 않았다. 무언가를 조심하라는 것 같기도 했는데...
현성은 지끈 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인상을 구겼다.
이에 레이첼은 고통스러운 듯한 현성의 모습에 우왕좌왕 손을 어쩌지 못하다가 결국에는 현성을 다시 침대에 눕혔다.
"안정! 안정을 취하는게 제일이다!"
안정을 강조하면서 눈을 부릅뜨며 두 손을 모은다. 그 모습에 현성은 슬며시 웃음을 지었다. 날카롭고 예민하게 생긴 외모와는 달리 완전히 반대되는 행동이 귀여웠기 때문이었다.
에리엘과는 반대되는 인물이었다.
에리엘은 외관상으로는 순해 보임에도 그 성격은 괴팍하기 짝이 없으니 말이다.
"괜찮아요. 그냥 잠깐 두통이 와서 그래요. 지금은 멀쩡해요."
멀쩡하다는 말, 허나 레이첼은 믿지 않는 눈치였고. 오히려 볼을 빵빵하게 불리며 눈을 찡그렸다. 아마도 자신이 거짓으로 말을 한다 생각하는 모양세였다.
그야말로 의심의 눈초리가 따로 없었다.
"진짠데요..."
"거짓말. 평범한 인간이 내 마나를 버틸 수 있을 리가 없다."
평범한 인간.
현성은 스스로를 과연 평범한 인간이라 볼 수 있는가 싶었다.
그래도 용사인..
아, 그러고 보니 신이 나에게 용사 100명 분의 재능이 있다고 했던 것 같았다.
현성은 일말의 기억이 돌아오자 뭔가 개운해진 기분에 가슴을 쓰러내렸다.
그런데 이러한 행동을 레이첼은 또 다른 고통을 호소하는 신호로 봤는지 다급히 가슴에 올려진 손을 치우고, 자신의 손을 올렸다.
그리고 그 손에서 피어나는 연두색의 연기.
현성은 이것이 마나임을 느꼇고. 레이첼은 한동안 눈을 감은 상태로 집중하는 모습을 보이더니, 이내 조막만한 한숨을 내뱉으며 천천히 눈을 떳다.
"...뭐야?"
당혹의 감정이 그대로 느껴지는 말.
레이첼은 눈썹을 한데 모으며 현성의 몸을 지그시 쳐다봤다.
아무래도 뭔가 이상이 있는 건가 싶었다.
현성은 다소 불안한 생각이 엄습했다. 혹시 자신의 몸에 안 좋은 변화가 생긴 것일까봐.
허나 현성의 걱정은 잠깐의 사소한 헤프닝에 불과했다.
"왜 멀쩡하지..? 어떻게? 이게 말이 되나?"
멀쩡하다.
그 말은 즉슨, 자신의 몸이 매우 건강한 상태라고 말하는 듯 했다.
현성의 마음속에 불안감이 사라지고 안도감이 올라왔다.
"봐요. 저 멀쩡하잖아요."
현성이 소매를 걷어내며 자신의 근육을 드러냈다.
건강함을 강조하는 행위, 하지만 레이첼은 그런것에 관심이 없는 듯 눈길 하나 주지 않았고. 오히려 현성을 난감하게 만들 발언을 뱉었다.
"현성. 옷 좀 벗어봐라. 아무래도 제대로 확인해봐야 될 것 같다."
옷을 벗으라니.
뭔가 어감이 이상했다.
하지만 레이첼이 오로지 자신의 건강을 확인하기 위해 뱉은 말임을 알기에 얌전히 상의를 벋었고. 현성의 두드러진 근육질 몸매가 드러났다.
공사판에서 일을 하다 다친적이 많았기에 자잘한 흉터가 있었으나 레이첼은 별로 신경 쓰이지 않는건지 묵묵히 다시 한번 가슴 위에 손을 올렸다.
맨살에 여성의 손이 올려지는 기분. 분명히 남자라면 환장할 상황이었으나. 현성은 그런 것 보다는 레이첼의 손이 차가워 몸서리를 쳤다.
엘프들은 체온이 인간보다 낮은 걸까? 레이첼의 손길도 차가웠던 것 같았는데.
현성은 다소 신기한 경험에 속으로 나름대로의 추측을 더했고. 그러는 사이 레이첼은 조금 전의 그 행위를 다시 행하고 있었다.
허나 이번에도 마찬가지.
레이첼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을 멍하게 뜨며 고개를 저었다.
"내 마나에 그대로 노출 당했는데 내상 하나 없다니. 이게 말이 되나?"
레이첼의 뭐라 말을 했지만, 현성은 왜 그러는지 조차 알 수 없었다.
마나에 노출 당하면 위험하기라도 한걸까? 라는 사소한 의문이 들 뿐이었다.
그렇기에 현성은 레이첼 모습에 위화감을 느꼇고. 슬글슬금 눈치를 살피며 말을 걸었다.
"저... 멀쩡하면 안 되는 건가요...?"
"원래대로라면 심한 내상에 몇 달을 치료해야 됐을거다..."
으에, 현성은 레이첼의 말에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질겁했다.
심한 내상은 또 뭐고 몇 달 동안 치료를 해야 된다니.
상상만해도 끔직했다. 마나라는 것은 무슨 독극물이라도 된단 말인가.
현성의 지식으로는 그렇게 밖에 생각치 못 했다.
"다행이라면 다행이겠지. 헌데 너무 멀쩡해서 오히려 더 걱정되서 그런다. 아무런 증상이 없다가 나중에 문제가 터지는 경우도 적지 않게 있으니 말이다."
너무 멀쩡해서 걱정된다니. 그만큼 자신의 몸이 말이 안 되는 상태라는 듯 했다.
본래 세계를 기준으로 비교 하자면 냉장고에 1년 동안 방치된 우유를 마시고도 설사를 하지 않는 그런 느낌인걸까.
비유가 엉성했지만 그렇게 생각하니 뭔가 확 와닿는다.
"...저 괜찮은거 맞죠?"
"당장은 괜찮다. 하지만 시간을 들여서 경과를 봐야 될 것 같은데..."
머뭇거리는 모습.
레이첼은 느닷없이 턱을 쓸어내리며 깊은 고민에 빠졌다.
무엇을 고민하는가, 현성은 마음을 조리며 레이첼을 바라봤고. 그렇게 체감상 10분이라는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레이첼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현성. 내가 제안을 하나 하겠다."
제안, 제안이라는 말에 현성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귀를 쫑긋 세웠다.
레이첼이 제안이라니, 뭔가 상상이 잘 안 갔다. 무엇을 제안하려는 건지도 모르겠고.
"무슨 제안이요?"
현성이 레치첼의 말에 반문했고. 레이첼은 고민을 끝낸 후에도 망설이는 것인지 입술을 열었다 닫기를 반복하며 말하기를 머뭇거렸다.
그러다 다시금 굳게 다짐을 했는지 결의에 찬 눈빛으로 현성을 두 눈을 마주했다.
"현성. 내 정식 제자가 되지 않겠는가?"
"...제자요?"
제자. 현성은 그 단어를 기억하고 있었다. 에리엘을 화나게 만들었던 그 단어.
헌데 레이첼은 이미 자신을 제자라고 표현하지 않았던가. 현성은 여실히 의문을 들어냈다.
"이미 제자인 거 아니엇나요?"
"그것과는 다르다. 그 때는 단지 기본적인 것만을 가르쳐 줄 생각이었다."
...
뭐가 다른거지? 그리고 그런 것 뿐이었다면 에리엘과는 무엇 때문에 싸웟던걸까.
현성은 한가득 의문이 머릿속에 들어차기 시작했고. 이를 눈치챈 레이첼은 슬금 슬금 눈치를 보더니 기어가는 목소리로 말을 덧 붙였다.
"사실 에리엘에게 장난을 치고 싶었던 것도 있었다... 물론 화를 낸 것은 분명한 실수였으니 오해는 하지마라!"
마지막에는 얼굴을 상기시키며 언성을 높인다.
그렇다면 장난을 치다가 어쩌다 보니 서로 감정을 붉히게 됐다는 얘기인걸까.
무슨 어린애들도 아니고...
현성은 화가 나기 보다는 어이가 없음에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하도 어이가 없다보니 화가날 틈이 없었다.
"하아... 그렇다면 지금은 무슨 뜻으로 한 말인거죠?"
다만 현성은 레이첼의 실수로인해 벌어진 일에 대하여 딱히 책임은 묻지 않았다.
실수로 한 행동에 화를 낼만큼 현성은 야박한 성격이 아니었으며. 맨처음 눈을 떴을 때 진심으로 걱정하던 모습 때문이라도 그럴 수 없었다.
이윽고 레이첼은 헛기침을 하며 현성의 물음에 응답하였다.
"크흠. 그말은 즉슨, 현성 그대를 정식 제자로 받아들여. 내 마법을 전부 전수해주겠다는 의미다."
자신의 마법을 전수해주겠다.
현성은 이것이 어느정도 수준의 발언인지는 몰랐어도. 결코 가벼운 의미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레이첼이 보여주었던 그 위용은 현성의 머릿속에 분명하게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위에서 무언가에 짓누르는 듯 했던 중압감에 몸이 버티질 못하는 것은 물론 숨 마저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던 그 순간의 기억이 다시금 떠오르자 현성은 고개를 저으며 머릿속에 떠오르는 기억을 털어냈다.
이윽고 현성은 레이첼의 제안에 대하여 어떻게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일단 현성은 레이첼이 싫지 않았다. 오히려 호감을 품었다.
적지 않은 시간을 함께 보내면서 레이첼이라는 사람을 알게 됐고. 어느샌가 정이 든 상태였다.
또한 레이첼은 성격이 희한하긴 했지만 사람은 착했다.
결론적으로 현성은 레이첼의 제안이 반가웠다. 가뜩이나 친인척 하나 없는 곳에 덩그러니 떨어진 상태였는데 이런 식으로 좋은 인연이 생기는 것에 대하여 거부감을 느낄만한 이는 없을 거라고 확신했다.
허나 현성은 딱 하나, 걸리는 점이 한가지 있었다.
현재 자신은 돌연변이로 제국의 죄인의 신분을 가지고 있는 상태. 가까운 미래에 돌연변이 숲으로 추방당할 운명인데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였다.
"그게 되요? 저는... 돌연변이 잖아요. 돌연변이는 제국의 죄인이라고 들었어요. 그런데 어떻게 제자가 된다는 말이죠?"
근본적인 문제.
허나 레이첼은 자신만 믿으라는 듯 가슴을 당당히 피며 코웃음을 쳤다.
"그것은 내가 제국의 황제와 직접 대면하여 해결하겠다. 너는 걱정하지 말고 대답만 하면 된다."
제국의 황제.
현성은 황제라는 직위가 거진 절대권력의 소유자임을 알고 있었다.
아무리 현성이라도 진나라의 진시황제 정도는 알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레이첼이 그런 황제와 직접 대면하여 해결했다고 하니 약간의 괴리감이 느껴졌다.
레이첼이 과연 그런 직위와 힘을 가지고 있는가.
적어도 현성이 보기에는 레이첼은 그저 엘프의 영역에서 살고 있는 한 명의 엘프일 뿐이었다.
하지만 레이첼의 당당한 표정을 보면 결코 허풍이 아님을 느낄 수 있었다.
현성은 레이첼을 믿어 보고 싶기는 했다. 어차피 모 아니면 도, 되면 되는 것이고 안 되면 안 되는 것이었으니까.
그러나 현성은 레이첼이 어떻게 될까 두려웠다.
레이첼이 내뱉은 발언은 황제와 직접 담판을 둔다는 것, 이는 자칫하면 불이익을 당할 수도 있는 행위였다.
그런데 과연 자신에게 그 정도의 가치가 있는 것일까?
현성은 의문이 들 수 밖에 없었다.
"제가 뭐라고 그렇게 까지 해요? 그냥 이대로 헤어지면 되는 건데..."
그렇기에 현성은 죄책감 때문에라도 물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레이첼은 잠깐의 머뭇거림도 없이 활짝 웃어 보이고는 현성의 손을 마주잡고 얼굴을 붉히며 입을 열었다.
"내 실수로 너에게 심각한 해를 입힐 뻔했고. 잠정적인 위험을 가지게 만들었으니, 응당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된다. 또한 나는 그대가 마음에 든다. 현성은 나와 헤어지고 싶은건가?"
화악-
현성은 레이첼이 한 말의 앞부분을 들으며 가슴이 뭉클해지는 듯 했으나, 마지막에 튀어나온 고백 비스무리한 발언에 얼굴을 붉혔다.
레이첼도 엘프인만큼 너무도 매력적이고 아름다운 미인이었다. 그렇기에 저런 표정으로 저런 말을 하면 심장에 치명적일 수 밖에 없었다.
어찌됐든 현성은 레이첼을 믿기로 했다.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거부하면 그것은 아니될 짓이었다.
"될게요. 레이첼 씨의 제자가 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