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5화 〉용사입니다. 엘프는 각오합니다. (25/89)



〈 25화 〉용사입니다. 엘프는 각오합니다.

현성은 레이첼의 제안을 받아들인 뒤, 레이첼과 함께 에리엘을 만나러 갔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현성이 의식을 잃기 전 있었던 일의 오해를 풀겸 자신의 계획을 설명함과 동시에 설득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에리엘이 있을 방문을 여는 순간.

이미  줄 알고 있었다는 듯이 에리엘이 튀어나오더니.

"레이첼만 들어오고 너는 빠져 있어."


라는 말을 남기며 현성이 들어오는 것을 막아섰고.

레이첼은 일단 에리엘의 말을 수긍해줄 생각인지 현성을 향해 기다리고 있으라는 듯이 눈빛을 보내왔다.

현성은 어차피 자신이 있든 없든 크게 상관이 없을 거란 생각에 둘의 의지를 따랐고. 둘은 현성을 복도에 남겨두고 방안으로 들어갔다.





***


에리엘의 저택 집무실.


에리엘과 레이첼은 의자에 앉아 서로를 바라봤다.


이윽고 둘은 각기 다른 음료를 한 모금 들이켰다.

에리엘은 홍차를 레이첼은 술을.

"단도진입적으로 말한다. 아까 그 남자, 현성을 내 제자로 들일거다."

레이첼이 먼저 입을 열어 자신의 의지를 표했고.  뒤를 이어 에리엘이 항론했다.

"후... 레이첼. 말이 되는 소리를 해. 그 남자는 돌연변이야. 죄인이라고."


죄인, 에리엘은 현성을 죄인이라 부른 후에 왜인지 모를 가책이 느껴졌다.

어째서일까. 그 이유를 모르겠다.

하지만 에리엘은 과거에 그런 일을 겪고도 제자를 들이고자 하는 레이첼이 걱정이 됐다.


왜 애지중지 키우던 제자에게 배신을 당하고도  다시 제자를 들이려는 건가. 그토록 오랫 동안 마음 아파 했으면서.

현성이 레이첼을 배신할 것이라 생각치는 않았지만, 그래도 인생은 모르는 일이었고. 에리엘은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미연에 방지하고자 했다.


"알아. 그래서 오랜만에 그 녀석을 만나러 갈거다."

그 녀석.

누군가를 지칭하는 단어가 튀어나오자 에리엘은 들고 있던 찻잔을 옆으로 거칠게 던졌다.

쨍그랑-


찻잔이 깨지는 소리가 방안에 울려퍼졌고. 에리엘은 두 손으로 얼굴 전체를 쓸어내렸다.


"제바알... 레이첼, 설마 지금 그 새끼를 만나러 가겠다는 거야?"


 새끼.

에리엘은 레이첼이  녀석이라 말한 이를 알고 있었고. 에리엘은 그를 '그 새끼'라 칭했다.


스승인 레이첼을 배신하고 제국을 건설한 황제.


대륙 최고의 정령술사 실피드를 말이다.


에리엘은 그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치가 떨렸고. 레이첼은 묵묵히 온화하게 웃음을 지었다.

"만나면 안 되는 이유도 없다. 그래도 스승인데 모질게 굴지는 않을테고."


멍청한 소리, 레이첼의 태평한 말에 에리엘은 욕짓거리를 뱉으려다 참았다.


"레이첼, 너 아직도 정신 못 차렸어?  새끼가 너한테 어떻게 했는지 잊었냐고."


배신도 그냥 배신이 아니다.

실피드는 스승의 피를 거머리 보다도 지독하게 빨다가 도망친 놈이었다.


"그걸 어떻게 잊을 수 있나? 하지만 과거는 과거일 뿐, 신경쓰지 않는다."


하, 에리엘은 마음을 굳게 먹은 듯한 레이첼의 모습에 답답함을 느꼈다.


과거는 과거일 뿐이라니,  누구 보다도 과거에 얽매이면서 사는 주제에.


자신의 제자에게 배신 당한 충격으로, 술에 지독하게 빠져 살면서 말이다.

에리엘은 도무지 레이첼의 사고방식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 상태의 레이첼을 설득하기란 불가능함은 알고 있었다.

옛날부터 고집 하나는 심했으니까.

그러나 이대로 레이첼이 실피드를 만나러가게 둘 수는 없었다.


"그냥 제자를 두고 싶은거야? 그러면 내가 구해줄테니까  녀석은 버려. 나도 이 이상은 용납 못 해."


오현성.


자신과 관계를 맺은  남자에게는 미안하지만. 에리엘에게는 레이첼이 먼저였고. 레이첼이 구태여 현성을 선택할 필요가 없다 생각했다.

그렇기에 에리엘로써는 굳이 현성을 제자로 두어 레이첼이 실피드를 만나게 둘 바에는, 차라리 다른 제자를 구해 주는게 현실적인 방안이었다.

아마 이 정도면 레이첼도 수긍하리라.


에리엘은 레이첼이 고개를 끄덕이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레이첼은 그런 에리엘의 기대를 깨고 고개를 가로로 저었고. 에리엘은 순간 인중에 힘이 들어가는게 느껴졌다.

평소 다혈질이 있었기에 에리엘은 쉽게 흥분을 하는 성향이 있었고. 이 순간에도 마찬가지였다.

"뭔데. 그 남자가 아니면 안 된다 이거야? 설마 둘이 정분이라도 났어? 그런거야?"

폭언.


뒷일 따윈 생각하지 않고 무작정 속에 응어리  말을 뱉어냈다.

그러나 레이첼은 별 감흥없이 시큰둥하게 에리엘을 바라봤다.

이는 에리엘이 다혈질이 있음을 알기 때문이었고. 이번만큼은 괜히 싸우고 싶지는 않아 유하게 넘어가고자 하는 마음이 컸기 때문이었다.


"후... 미안해. 갑자기 또 이러네."


에리엘이 자책감에 인중을 꾹꾹 누르며 선뜻 사과를 전했다. 싸우기 싫은 것은 에리엘도 마찬가지였다.


"에리엘, 너의 마음은 이해한다."


레이첼이 분위기를 환기 시켰다.


레이첼도 에리엘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오랜 시간을 친구로 지내왔는데 모를 리가 있을까.


더군다나 에리엘이 걱정하는 것도 당연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실피드와 관련된 일이었으니까.


허나 레이첼은 이미 각오했다.


현성을 제자로 들이기로.

"그래서  그 남잔데? 이유가 있을거 아냐."

자포자기한 심정.

아예 말뚝을 박고 꿈쩍도 안 하는 레이첼에게 에리엘이 먼저 나가 떨어졌다.

그저 적어도 이유라도 알고 싶었기에 마지막으로 말을 꺼냈고. 레이첼은 다ㅅ금 현성의 몸상태를 떠올리며 온몸이 떨릴 정도의 전율을 느꼈다.


분명히 심각한 내상을 입었어야 할 신체가 멀쩡했고.

뿐만 아니라 마나가 주변에 떠도는 것을 넘어서, 신체 내부에 들어가 순환을 하고 있던  기이한 장면.

그것은 레이첼이 수백년을 살아오는 동안 단  번도 본적이 없던 것이었다.

마나라는 것은 본디 자연에 떠다니는 존재, 절대로 누군가의 신체 안에서 머무는 법이 없었다.

더군다나 마나들 중에서도 순수한 마나들만이 그 속에 머물렀다.


그리고 레이첼은 그것을 보자 마자 느꼈다.

현성이라는 용사가 가진 재능을.

어쩌면 현성은 먼훗날 마왕 루시드와  휘하의 악마들로 부터 이세계를 구원할 존재일 수도 있다고.

비록 이것을 미리 말한다면 자만에 빠질까 두려워 다른식으로 말을 전했지만 말이다.


"현성은 훗날 세계를 구원할 용사다."

간략하게 그 사실을 에리엘에게 전했고. 에리엘은 레이첼이 전해온 말에 순간 몸이 굳는 느낌이 들었다.


실피드에게 배신 당하기 전, 대륙의 대마법사들 중에서도 손꼽히던 존재가 레이첼이었다.

또한 수많은 용사들의 재능을 개화시켜준 용사들의 스승이라 불리었던 존재였다.

비록 실피드가 황제가 되면서 마법을 배척하는 정책을 펼친 순간부터 역사의 뒷편으로 사라지게 됐지만 말이다.

그래도 레이첼이 이 정도로 말할 정도면 현성이 가진 재능은 대륙 제일의 마법사이며 아직까지도 현역으로 활동 중인, 현자에 버금 가는 수준을 기대해 봐도 무방했다.

"그 말 확실하지?"

에리엘은 직접 듣고도 믿기지가 않아 다시 한 번 물었고.

"내 안목은 틀리지 않는다."


곧바로 확실하고 확신이 담긴 대답 돌아왔다.

이윽고 에리엘은 레이첼의 뜻을 따르기로 했다.


이것은 세계의 운명과 관련된 일, 복잡하게 얽힌 개인사가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허나 그래도 걱정은 됐다.


황제가 되자마자 마법을 배척하는 정책을 펼쳐왔던 실피드가 과연 곱게 레이첼의 제안을 받아 줄 지가 의문이었다.

만약 대마법사들과의 협약이 아니었다면 모든 마법사들을 죽이고 남았을 터였다.

"좋아. 대신에 나도 같이가.

에리엘은 그런 놈한테 레이첼을 혼자 보낼 수는 없었다.

적어도 같이 가야 안심이  것만 같았다.


하지만 레이첼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안 된다. 혹시나 그 녀석이 날 붙잡고자 한다면 방해가 될 뿐이다."


방해.

그래, 에리엘은 레이첼과 실피드에 비하면 자신은 한없이 약한 존재임을 상기 시켰다.


절대적으로 본다면 에리엘도 강하다고 볼 수 있었으나 비교 대상이 대륙 최강의 정령술사와 대마법사였다.

둘의 싸움에 에리엘이 낀다면 죽음은 확정이었다.

에리엘은 오랜만에 무기력함을 느꼈고. 어쩔 수 없이 현실을 수긍했다.

울고 불며 억지를 부릴 나이는 한참 지난 상태였으니 말이다.

"그래도 마중은 해도 되지?"

"마중은 언제나 환영이다."

둘은 오랜만에 웃으며 대화를 마무리 짓는 분위기를 이어갔다.

이윽고 에리엘이 마지막으로 팔짱을 끼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언제 출발할건데?"


에리엘은 떠나기 전날에 같이 식사라도 하고자 했다. 헌데 레이첼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눈을 감고선 생각에 빠진 모습을 보였다가. 이내 눈을 떳을 때에는 왜인지 슬픈 웃음을 지었다.

마치 마지막을 준비하는 사람처럼


"일주일 뒤, 혹시 모르니까 기본적인 것들을 가르쳐주고 이것저것 챙겨주고 나서 떠날거다."


혹시 모른다.


에리엘은 레이첼이 최악의 상황까지 대비하고 있음에 입술을 꽉 깨물었다.

아무런 도움을   없는 자신이 너무도 미웠다.


물씬 가슴이 아파왔고. 에리엘의 눈썹이 축 처지며 눈망울이 젖어 들어갔다.


"우리... 다시  수는 있는거지?"

눈물 젖은 목소리. 에리엘은 무덤덤하게 말하고자 했지만, 어쩌면 가까운 미래에 다시는 못 보게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눈물을 참기가 힘들었다.

이에 레이첼도 에리엘의 모습에 울컥했는지 얼굴을 붉혔고. 애써 눈빛을 마주하며 말을 꺼냈다.


"...운명이 닿는다면 다시 볼 수 있을거다."


운명이 닿는다면.


애매모호한 표현.


레이첼은 자신의 미래에 대한 질문에 확답할  없었다.

실피드가 자신을 어떻게 대할지 아무리 생각해도 감이 안 잡혔다.

차라리 도망이라도 치는게 나을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면 실피드는 여태까지 예외로 두었던 엘프의 영역 마저 손을 뻗칠게 분명했다.

어떻게든 되겠지.


레이첼은 스스로를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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