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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화 〉용사입니다. 다들 울적한가 봅니다. (26/89)



〈 26화 〉용사입니다. 다들 울적한가 봅니다.

끼익-


둘이 들어갔던 방의 문이 열리고. 레이첼이 천천히 걸어 복도로 나왔다.

그런데 어쩐 이유인지 고개를 숙인 상태로 훌쩍 거리고 있었다.

안에서 무슨 대화가 오갔는지는 모르겠으나, 현성은 레이첼이 울고 있다는 것이 더욱 중요했다.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하는가.

문득 브랜드가 엘프는 허락없이 몸을 만지는걸 싫어한다고 했던게 기억이 났다.


그렇기에 섣불리 위로했다가는 미움을 받을  같았기에 차마 손을 내밀지 못 하고 머뭇거렸고. 결국엔 목소리로 위로의 한마디를 전했다.


"괜찮아요..?"

괜찮냐는 말, 그 한마디에 레이첼이 반응을 보였다.

텁-


불쑥 튀어나온 손이 현성의 손목을 감쌋고. 레이첼의 물에 젖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단 집으로 가는거다..."


집으로.

현성은 레이첼을 조심히 이끌며 걸음을 옮겼다. 서서히 집에 가까워 질수록 레이첼의 울음이 멎는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렇게 집에 도착하여 문을 열고 들어오자, 레이첼은 언제 그랬냐는 듯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아니, 그런 척을 했다.


"우리에게는 쉴 시간이 없다! 앞으로의 계획을 설명할테니 잘 듣도록 해라!"


다소 어색한 말투에서 애써 밝은  연기를 하는게 느껴졌다. 그러나 굳이 짓고 넘어갈 생각은 없었다. 본인이 감추고 싶어하는 눈치인데 그것을 억지로 들춰낼 수는 없는 법이었다.

현성은 최대한 아무것도 모르는 척, 순진무구한 눈으로 레이첼을 바라봤고. 레이첼은 왼쪽 검지 손가락 하나만을 남기고 나머지 손가락을 다 접으며 입을 열었다.


"일주일 뒤에 나는 너를  제자로 들이는 것을 허락 받기 위해 황제를 만나러 갈거다."


일주일 뒤, 헌데 혼자 가겠다는 뜻인가? 모르겠으면 물어봐야 되는 법.

현성은 주저없이 질문을 건냈다.

"혼자 갈건가요?"

"그래, 혼자서 갈거다."

아, 혼자서 가는거구나. 그런데 위험하지 않으려나?


현성은 걱정스런 마음을 담아 눈빛을 보냈고. 레이첼은 그와 반대되는 눈빛을 보내왔다.

"다 생각이 있으니 걱정마라."


생각이 있다.


그러니 걱정 말라.


하지만 인생이 어디 생각대로 되나. 현성은 레이첼을 못 믿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걱정이 가시지가 않았다.


"돌아오는건 맞죠?"


"운명이 닿는다면 다시 만날  있을거다."

뭐야 그게.


현성은 걱정스런 마음으로 내뱉은 말에 애매모호한 말을 내뱉는 레이첼이 얄궃게만 느껴졌다.


빈말이라도 돌아온다고 말하면 어디가 덧이라도 나는걸까.

"어찌됐든. 앞으로 일주일 동안 같이 생활하면서 이것저것 알려줄 생각이니 그렇게 알아라."

일주일 동안 같이.


그 말은 즉슨, 이 집에서 같이 생활한다는 얘기?

남녀칠세부동석, 남녀가 한 지붕 아래 같이 사는 것은 현성에게는 조금 그랬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현성은 자세히 물어보고자 했다.

"이 집에서 같이 생활한다는 말인가요?"


"음... 아무래도 불편할테니. 내가 에리엘에게 부탁해서 방을 구해주겠다."

오, 여기서 친구 찬스를 쓰는구나. 그런데 에리엘의 얘기를 거리낌 없이 꺼내는 것을 보면 둘이 원만하게  해결했나 보다.

그럼 적어도 싸워서 흘린 눈물은 아니라는 얘기겠지.

어찌됐든 앞으로 일주일 동안 마법을 배운다고 생각하니 알딸딸 했다.

나도 강해질 수 있는걸까?

많이는 안 바란다. 그저  한몸을 지킬 정도의 힘만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현성은 들뜬 마음에 절로 입꼬리가 올라갔고. 몸을 일으켰다.


"오늘부터 하는거죠?"

"그래, 오늘부터다."


시간대가 어떻게 되는 지는 모르겠으나 해가 저물고 있는 상황.


현성은 일단 짐부터 챙겨 오는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짐이라 해봐야 별건 없지만 그래도 있으면 좋으니까.

"그러면 저 짐 좀 챙겨올게요."


"그러도록 해라. 나도 준비를 하고 있을테니."

현성이 몸을 일으키며 말하자 레이첼도 몸을 일으키며 답했다.


이에 현성은 방긋 웃고선 밖으로 나섰다.


그렇게 잰걸음으로 걸으며 본래 지내던 건물로 돌아왔다.

레이첼의 집 보다 조금 더 나은 수준의 건물.

현성은 그 문앞에 서서 짧게 호흡을 내뱉었다.

이로하.

자신과 같은 처지의 여자.


약에 취해 험한짓을 당한 여자.


 여자가 이번에는 제정신인 상태이기를 바랬다.


지난 번 처럼 정신을 놓고 덮쳐오면은 곤란했다.

계속 그런 식의 행동이 반복되면 온전한 상태일 때에는 온갖 괴로움에 시달릴 테니까.

덜컥-


현성은 문을 조심스레 천천히 열었고. 곧바로 들어가지 않고 안의 상황을 살폈다.

히끅- 흐윽-


바로 건너편에서 바깥으로 울음 소리가 새어 나왔고. 갈색 단발의 여자, 이로하가 얼굴을 무릎에 묻은 채로 떨고 있는게 보였다.

아무래도 뒤늦게 정신이 돌아온 모양이었다.

후우, 현성은 들어가야 될지 말아야 될지 고민했다.


허나 여자의 손에 힘없이 쥐어진 날붙이를 발견하는 순간, 고민할 것도 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탁-


문을 닫았고.  소리가 안을 채웠다.


여자는 그 소리에 몸을 흠칫 떨었고. 서서히 고개를 들어 현성을 죽은 눈으로 바라봤다.


왠지 불길한 예감.


현성은 여자의 상태가 마냥 좋지 않다는 것을 느꼈고. 여자가 돌발 행동을 하지 않도록 최대한 조심했다.

그렇기에 처음부터 가까이 가지 않고 멀리서 말을 걸었다.


"괜찮아요..?"

괜찮냐는 말.


 말을 건내자 이로하는 힘껏 고개를 저었다.

"아으.. 으으!"

알 수 없는 신음. 하지만 여자는 자신에게 거부감이 들지 않는 듯 했다.

보통은 그런 일을 겪고 나면 사람 혹은 적어도 남자만 봐도 발작을 일으키는 경우가 많았기에 그나마 다행인 경우였다.

"제가 다가가도 될까요?"

말을 하면서도 두 손을 들어올리며 아무런 적의가 없음을 밝힌다. 허나 여자는 고개를 더욱 거세게 저었다.


접근하는 것은 무리인 듯 했다.

하지만 서둘러 손에 쥔 검을 빼앗아야만 했다. 자칫하면 자살 시도로 이어질 수도 있었다.

또한 이대로는 레이첼에게 돌아갈 수가 없었다.

힘들어하는 이를 어떻게 혼자만 남겨두고 떠난단 말인가.


현성은 그럴  없었다.


그렇기에 현성은 아예 자리를 잡고 앉아 멀리서 여자를 안심 시키고자 대화를 시도했다.


"너무 경계하지 않으셔도 돼요. 저도 그쪽이랑 같은 처지거든요."

일단 경계심 부터 차근차근 거둬낸다. 이로하는 현성이 자신과 같은 처지임을 알리자 두 눈이 거쳤다.


몰랐다는 반응.

하지만 믿지 않는 듯 여전히 경계하는 모양새였다.


"한국이라고 알아요? 저는 한국에서 왔어요. 이름은 오현성이구요."


한국.

이로하는 한국이라는 단어가 현성에게서 나오자 고개를 갸웃거렸고. 이내 조금 마음을 연것인지 손을 저으며 자신에게 가까이 오라는 제스쳐를 취했다.


이에 현성은 이로하가 놀라지 않도록 몸을 천천히 움직였고. 이로하의 바로 앞으로 다가가 마주보고 앉았다.

"그쪽은 이름이 뭐에요?"

이름.

이미 알고는 있어도 본인의 입으로 직접 듣는 것이 친해지는데 도움이 되었다.

적어도 현성은 그랬다.


이윽고 이로하는 입을 살짝 살짝 벙긋 거리다가 마음을 다잡는지 목소리를 내었다.

"이로하... 타치바나 이로하에요......"

타치바나 이로하.


일본어는 몰랐지만 좋은 어감의 예쁜 이름이었다.

헌데 목이 쉬었는지 쇳소리가 났다. 이유는 굳이 생각치 않아도 알 것만 같았다.


"어감이 좋네요. 일본 사람이신가요?"


현성은 최대한 좋지 않은 부분을 피해가며 대화를 이끌었다.


각종 폭력에 상처를 입은 아이들을 대상으로 봉사를 가본 경험이 있었기에 어떻게 해야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네, 일본 도쿄에서 나고 자랐어요..."

일본 도쿄라면 언제 한 번 여행을 가고 싶었던 곳이기도 했다.

딱히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거리도 가깝고 표값도 싼 편이었으니까.


아무튼 현성은 어느정도 마음을   같았기에 슬슬 친해지는 단계로 넘어가기로 했다.

스윽-

현성은 슬쩍 손을 내밀었고. 이로하는 그것을 멍한 눈으로 바라봤다.


"악수해요. 앞으로 친하게 지내요."

아...


이로하는 작게 소리를 내었다.


현성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남자.

이로하는 이 남자를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지난 밤에 부렸던 추태 또한 선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스스로 소중한 곳을 벌리고 온몸으로 유혹하던 자신의 모습을.

그 변태스러운 장면을 떠올리니 이로하는 수치스러움에 얼굴을 붉혔다.

그러면서도 눈앞의 남자를 바라봤다.

자신의 유혹에도 극구 넘어오지 않고 완강하게 만류하던 모습.

이로하는  모습을 잊을 수가 없었다.


또한 마지못해 자신을 끌어 안아주던 남자의 온기는 너무도 따뜻했었다.

이 남자라면 믿어도 되지 않을까.


자신을 끝까지 챙겨주지 않을까.

이로하는 현성에게 기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이런 험한 세상에서 홀로 살아남고 싶지 않았다.

현성 같이 착한 남자가 곁에 있다면 어떠한 역경도 버텨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이로하는 현성이 내민 손을 붙잡았다.


그리고 현성이 밝은 미소를 보이자 이로하는 왜인지 울컥한 마음에 현성의 품에 달려들었다.

따뜻한 체온.

이로하는 사람의 온기가 너무도 느끼고 싶었고. 위로 받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은 부모님도 친한 친구 마저도 없었다.

당장 의지할  있는 사람은 현성 말고는 없었다.


비록 만난지 얼마 되지도 않았지만 이로하는 저도 모르게 현성에게 의지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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