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화 〉용사입니다. 포상이 후하네요.
아무 의미도 없이 하루가 지나가고. 현성은 잠에서 깨어나 꼼꼼하게 몸을 풀었다.
오늘부터 시작.
원래대로라면 어제 부터 시작이었으나, 돌아온 시각이 늦은 밤이었기에 어쩔 수 없이 오늘 아침으로 미뤘다.
방은 레이첼이 말한대로 에리엘의 저택에 있는 수많은 방들 중에서 하나를 얻었고. 간만에 씻고 자서 그런지 매우 개운하고 말끔해진 상태였다.
그렇게 저택을 나가 레이첼의 집 앞으로 가니 바닥에 대자로 누워있는 단신의 여자가 보였고. 척 봐도 레이첼임을 알 수 있었다.
레이첼은 왜 저러고 있는 걸까. 현성은 발걸음을 가볍게 옮겨, 그 옆으로 다가가 무릎을 굽혀 레이첼을 가까운 거리에서 내려다 봤다.
"뭐하고 있어요?"
"마나를 보고 있다."
본다고? 마나가 어디에 있다는 소리지?
현성은 레이첼을 따라 대자로 누워 멍하니 하늘을 바라봤다.
헌데 보이는 것은 맑은 하늘과 둥둥 떠다니는 구름 뿐, 마나로 보이는 것은 쥐뿔도 없었다.
"레이첼 씨의 눈에는 마나가 보여요?"
현성이 감 조차 잡히지 않음에 호기심이 생겨 레이첼을 향해 고개를 돌려 물었고. 레이첼은 무덤덤하게 눈을 감으며 입을 열었다.
"아니, 보이지 않는다."
"네?"
마나를 본다면서, 마나가 보이지 않는다니. 명백한 어불성설이었다.
하지만 레이첼이 아무 의미 없이 이런 말과 행동을 보일 것 같지가 않았다.
"마나는 어디에나 있다. 지금도 우리들의 몸 주변에 머물러 있고."
으음, 뭐랄까 철학적인 말 같은데. 아리송했다.
"오로지 마법사가 의지를 담아 발현 시켜야만 마나의 형체가 보인다. 이렇게..."
'이렇게'
레이첼의 그 말과 함께 주변의 연두색의 연기 같은 것이 피어났다.
현성은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었고. 손아귀에는 그 무엇도 잡히지 않았다.
헌데 레이첼의 말에는 한가지 어폐가 있었다.
분명히 마법사 마나에 의지를 담아야만 형체가 보인다 하였는데.
"지난 번에 제 마나는 어떻게 보고 만진거에요?"
현성은 레이첼과의 첫만남을 회상하며 질문을 던졌고. 레이첼은 가볍게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좋은 질문. 그 이유는 간단하다."
"간단해요?"
"그래, 용사는 기본적으로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존재. 그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힘을 다를 줄 안다."
허어...
현성은 얼빠진 감탄사를 뱉었고. 레이첼의 설명에 오히려 머리가 더욱 복잡해졌다.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힘을 다룰 줄 안다니.
자신만 해도 마나를 다룰 줄 모르는데, 말이 안 됐다.
"저는 다룰 줄 모르는데요?"
더 생각할 것도 없이 머릿속의 의문을 뱉는다. 이에 레이첼은 검지를 좌우로 흔들며 혀를 찾다.
그 모습이 꽤나 얄궃으면서도 귀여웠다.
"너는 마나를 이미 다룰 줄 안다. 다만 너 스스로가 모르고 있을 뿐."
이것 또한 아리송한 대답.
알려줄 거라면 시원하게 알려줬으면 좋겠으나. 애매하게만 알려주며 감질맛 나게 만든다.
은근히 스스로 깨닫도록 만들려는 것 같은데...
"으음, 참으로 아둔한 제자다."
"...아둔한 제자라서 죄송하네요."
뭐라 할 말이 없다. 모르겠는데 어떡하라는 건지...
안 그래도 머리가 그리 좋은 편이 아닌데.
현성은 입술을 삐죽이며 불만스레 눈을 감았다. 하지만 눈을 탁 치는 손길에 다시 뜰 수 밖에 없었고. 트인 시야로 바로 위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레이첼이 보였다.
후욱-
가까운 거리.
현성은 레이첼의 얼굴이 너무 가까움에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레이첼에게 이성으로서의 호감이 있는 것은 아니었으나 엘프는 심장에 위해한 외모의 소유자들이었다.
당연히 레이첼도 현성의 심금을 울릴 외모를 가지고 있었고. 현성은 흔히들 말하는 쑥맥은 아니었지만, 이런 식으로 레이첼이 행동하면 얼굴을 붉힐 수 밖에 없었다.
"뭐하나, 현성? 어디 아프기라도 한가?"
레이첼이 걱정스러운 맘에 인상을 찌푸리며 더더욱 현성에게 얼굴을 들이밀었고. 급기야 시선을 피하기 위해 돌렸던 고개 마저도 반강제로 다시 되돌리며 두 눈을 마쳐왔다.
"얼굴이 붉다. 잠자리가 춥기라도 했나?"
순수한 걱정, 레이첼은 현성이 아픈 것 같자 되려 자신이 눈꼬리를 내리며 울상을 지었다.
현성은 그 모습을 보며 인터넷에 도는 장화 신은 고양이 짤을 떠올려냈다.
안 그래도 고양이 상의 얼굴이었기에 묘하게 닮아 보였다.
이윽고 현성은 서서히 심장을 진정 시켰고. 전혀 내색하지 않고 레이첼을 살며시 밀어냈다.
"아무 것도 아니에요."
아무 것도 아닌게 아니었지만 사실 그대로 뱉어내는건 조금 그랬다.
"아프면 아프다고 솔직하게 말해라. 너의 몸이 아프다면 내 책임일 가능성이 크다."
아무래도 어제의 그 일 때문에 더욱 이런 행동을 취하는 듯 했다. 어물쩡 넘어갈 수도 있었으나 끝까지 책임을 지려는 모습에 살짝 감동 먹었다.
하지만 정말로 아픈 것이 아니기에 현성은 살포시 웃으며 레이첼을 진정 시켰다.
"저 정말로 괜찮아요."
"으으.. 그치만!"
쉽게 믿지 않는 눈치. 레이첼은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으며 볼을 부풀렸고. 의심의 눈초리로 현성을 바라봤다.
그 모습에 다시 한 번 현성은 심장이 가려워지는 느낌과 함께 머리를 쓰다듬고 싶은 충동이 들었고. 그 충동을 간신히 지워내며 레이첼의 걱정을 지워내고자 했다.
"제 몸인데 왜 제가 거짓말을 하겠어요. 아프면 아프다고 솔직히 말할 테니까, 걱정마요. 스승."
현성은 분위기를 풀고자 장난스레 마지막에 '스승' 이라는 말을 덧 붙였고. 그와 함께 눈웃음을 지었다.
이 정도면 레이첼도 걱정을 지울 것 같았다.
헌데 레이첼은 현성의 예상 보다는 사뭇 다르게 반응했다.
"스.. 스승?"
'스승' 이라는 말을 되내이며 얼굴을 붉힌다.
현성은 레이첼이 왜 그러는가 싶은 마음에 고개를 갸웃거렸고. 레이첼은 더 나아가서는 입꼬리를 이마에 닿을 듯이 올리고는 씰룩거렸다.
스승이라는 말이 그렇게 좋은걸까?
잠자고 있던 장난기와 호기심이 슬금슬금 시동이 걸리는 느낌.
남자라면 누구나 동감할만한 감정이 올라온다.
이건 참을 수 없다.
"왜 웃어요, 스승?"
현성은 발동된 장난기를 서슴 없이 뿜어냈고. 이에 레이첼의 얼굴이 더욱 붉어지더니 입꼬리가 올라가다 못해 표정이 풀려버렸다.
그냥 한 번 장난을 더 쳤을 뿐인데, 반응이 이렇게나 좋을줄이야.
이건 조금만 더 하면 위험할 것 같았다.
현성은 장난에 목숨을 거는 성격이 아니었기에 짧았던 장난을 멈췄고. 레이첼의 두 어깨를 잡고선 약하게 흔들었다.
그러자 레이첼은 정신이 돌아왔는지 멍한 눈으로 현성을 바라봤고.
"아..?"
입에서 당황한 소리를 내뱉었다.
"앞으로 스승이라고는 절대로 안 불러야겠네요."
장난스런 말투로 현성이 약올리 듯이 말을 뱉자 레이첼의 얼굴엔 슬며시 홍조가 들었고. 레이첼의 한껏 당황한 듯 경악스러운 표정으로 주먹을 들어올렸다.
아, 이거 한 번 당해봤던 것 같은데, 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따악- 맑고 경쾌한 소리와 함께 이마에 빨간 자국이 생겼다.
"으으.. 그렇다고 때릴 것 까지는 없잖아요."
사실 맞을 짓을 하긴 했지만, 레이첼의 주먹은 상당히 매웠다. 몸에 딱히 근육은 없어 보이는데 희한했다.
"한 번만 더 장난치면 그때는 안 봐줄거다!"
레이첼이 눈을 치겨뜨며 경고 아닌 경고를 해왔고. 현성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알겠다는 듯이 행동했다.
장난을 즐겨하는 편도 아니고, 반응이 이정도로 심한데 굳이 다시 할 생각은 없었다.
"어찌됐든. 이어서 계속 하겠다. 집중해라."
"네, 집중할게요."
다시 시작되는 가르침의 현장.
레이첼은 현성의 앞에서 자신의 손을 내보였고. 현성은 그 손을 바라봤다.
"보통은 마나를 보고 느끼며 교감하는 것에서 부터 시작한다."
보고 느끼며 교감한다.
이것은 마치 살아있는 생명을 대하는 자세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에 대해선 이어진 레이첼의 말을 통해 알 수가 있었다.
"또한 마나는 우리들과 마찬가지로 생각과 의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불순한 마음을 품은 이들은 절대 다룰 수 없는 힘이다."
생각과 의지를 가지고 있기에 불순한 마음을 품은 이들은 다룰 수 없다니
그냥 단순히 다루기 힘든 힘인줄 알았으나 조건이 많이 까다로웠다.
또한 저 말대로라면 마나를 다룬다는 것은 그 사람이 선한 인격을 가지고 있다는 하나의 증표와 마찬가지란 생각이 들었고. 레이첼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용사는 다르다."
다르다니, 무엇이?
현성은 자연스레 의문을 품었다.
"어떻게 다른거죠?"
"용사들은 선행 과정을 거치지 않아도 마나가 알아서 교감을 해온다."
알아서 교감을 해온다고? 하지만 현성은 그런 느낌을 전혀 받지 못 했다. 애초에 마나를 보지도 느끼지도 못 하는데 알 수가 없다.
...
어라?
뭔가가 뇌리를 스치며 깨달은 것 같은 느낌.
"그렇다면 저는 마나를 보고 느끼는 과정을 그냥 넘긴 상태라는 건가요?"
"오, 그래. 정확히 맞췄다."
머리에 든 생각을 꺼내 말하니 레이첼은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을 해왔다. 그러면서도 대견하다는 듯이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어왔고. 현성은 당황하면서도 그 부드럽고 따스한 감각에 슬그머니 몸을 맡겼다.
180 초반의 현성이 150 중반의 레이첼에게 쓰다듬을 받는 모습은 꽤나 어색한 장면이었지만 현성은 포상으로 받아들이며 그러려니 했다.
그렇게 잠깐의 포상이 끝나고.
레이첼은 앞으로 현성이 해야될 것에 대해 물어왔다.
"앞으로 뭘 해야될 것 같은가?"
앞으로 해야될 것.
이것에 대한 대답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당연히 마나를 보고 느껴야 되지 않을까요?"
현성은 망설임 없이 자신감 있게 정답을 외쳤고. 레이첼은 이번에도 대견하다는 듯이 웃으며 머리 위에 손을 얹고는 부드럽고 자상하게 쓸어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