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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화 〉용사입니다. 스승은 엄하네요. (30/89)



〈 30화 〉용사입니다. 스승은 엄하네요.

레이첼이 거의 평생을 걸쳐 연구해온 것.

그것은 마나에 대한 고찰.


목적은 단순했다, 마나란 무엇이냐는 것.


그 연구 과정에서 마나가 지성체와 같이 생각을 하고 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냈고.


몇몇 대마법사들이 마나와의 교감을 통해 영혼을 불러내는 것에 성공하면서, 마나라는 것이 죽은 이들의 영혼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까지 알아냈다.

그렇게 연구의 목적을 달성할 때까지 정말로 단 한 발자국을 남긴 상태.


하지만 연구는 몇 십년이 지나도록 닿을 듯 말 듯한 상태로 아무런 진전이 없었다.

그리고 그런 와중에 제자인 실피드가 배신을 하고 황제가 되어 마법을 배척하는 정책을 펼치면서 연구는 강제적으로 폐기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그 뒤로 레이첼은 사실상 연구에 대해 완전히 포기하였고. 배신의 충격으로 하루하루 술에 의존하며 살아왔다.

하지만 지금.


레이첼은 현성에 의해 모습을 드러낸 동토의 용병 구루카를 보며 다시금 희망을 느꼈다.


제국의 마법사들은 대부분 타국으로 쫓겨난 상황, 현재 제국의 영역 안에서 마법을 다룰  아는 것은 레이첼 밖에 없었다.


그런데 현성이라는 변수가 생겼다.


이것은 다신 없을 기회, 이 기회를 놓친다면 평생을 후회하리라.


레이첼은 의지를 불태웠다.


"구루카여. 그대의 본질은 무엇인지 묻고 싶다."


본질.

마나는 무엇 때문에 생겨났으며, 어떻게 기적을 만들어내는가.


레이첼은 마나의 본질을 알고 싶었고. 그 모든 이유에 대해 알고 싶었다.

허나 레이첼의 물음에 구루카는 곤란하다는 듯이 눈을 감고선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지만 나는 모르오. 아마 내 동지들, 그 누구에게 물어도 대답을 듣지는 못 하겠지."


아아, 이 남자도 똑같은 대답.


이미 이런 식의 대답은 오래 전에 마법이 활발하던 시대에 여러번 들어봤다.

레이첼은 그러면서도 남자의 마나를 탐구하고자 했다.

그렇기에 레이첼은 두 눈에 마나를 모아 구루카의 곳곳을 탐색했다.


그러자 눈에 보이는 순도 높은 마나.

그것도 아주 맑은 색에 가까운 마나가 구루카의 몸을 구성하고 있었고. 레이첼은 눈앞의 남자가 살아생전 매우 뛰어난 무력의 소유자였음을 짐작했다.

어쩌면 레이첼, 자신 보다도 강했을 수도 있었다.

이윽고 레이첼은 구루카의 신체를 이루고 있는 마나를 본격적으로 탐구하기 시작했다.

마나란 도대체 무엇이기에 기적을 일으키는가.


어떤 이유로 이 세상에 나타났는가.


순수한 탐구욕, 레이첼은 구루카의 마나를 유심히 살피며 두 눈에 담았고. 그것을 온전히 이해하고자 했다.

구루카의 마나는 순도가 높았기에 더욱 많은 것을 담아내고 있었다.


그러나 레이첼은 그 과정에서 그 무엇도 얻을  없었다.


망각 그리고 퇴화.

마나를 이해하기 위해선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했다. 하지만 하루하루 음주를 빼먹지 않다 보니 두통으로인해 완전히 집중을 하는 것이 어려웠고. 또한 레이첼은 본인이 연구해온 많은 것들을 잊어버린 상태였다.

몸상태도 최악.

연구는 처음 부터 다시 시작해야 될 상황.


모든것을 포기한 채 살아왔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레이첼은 무의미하게 보내온 지난 날을 후회했고. 그런 레이첼에게 구루카가 시큰둥하게 눈을 뜨며 말을 건냈다.

"나는 슬슬 돌아가야 될 것 같소. 이제 한계인 것 같으니."


한계.


레이첼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고개를 돌리자 아니나 다를까 현성이 무릎을 꿇고선 숨을 거칠게 내쉬고 있었다.

영혼을 소환하는 것은 많은 체력을 요구하는 것.


아주 짧은 시간이었으나 현성에게는 힘든 시간이었을 터였다.

이윽고 구루카는 천천히 현성의 앞에 섰고. 등을 탁- 하고 강하게 치고선, 특유의 호탕한 웃음을 보였다.


"흐하하, 아직은 허약하구만. 다음에 볼 때는 강해져 있기를 바라오.  세상은 녹록치 않으니."


스르륵-


구루카는 마지막 말과 함께 점차 형상이 흐려졌고. 다시 마나의 형태로 돌아가 현성의 주변을 맴돌며 서서히 사라졌다.


그러자 현성은 약간의 체력이 다시 돌아옴을 느끼며 한숨을 토했다.

딱히  하지도 않았는데 지치는 감각은 정말이지 괴랄했다.

또한 마나란 것이 죽은 이들의 영혼이라는 것에 갖은 의문이 들었다.


분명  세계에 신이라는 존재가 있는데 왜 영혼이 이곳에 남아 있는가.


보통 이런 류의 소설이나 영화를 보면 환생을 하거나 지옥 혹은 천국 같은 곳에 보내던데 말이다.

"괜찮은가, 현성?"

옆에서 레이첼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현성은 서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곳에는 뚱한 표정을 하고 있는 레이첼이 보였다.

아, 맞다.


현성은 구루카가 터트리고  폭탄을 기억해냈다.


"...괜찮지 않은  같은데요?"

자신 보다는 레이첼의 얼굴이 말이다.


현성은 뒷말을 삼키며 애써 활짝 웃었고. 레이첼도 덩달아 활짝 웃었다.


"일어나라."

명령 아닌 명령.


현성은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신기하게도 기진맥진한 상태였는데도 레이첼의 말 한마디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괜찮은 것 같은데. 거짓말이었던 건가?"

레이첼은 멀쩡하게 일어나는 현성의 모습에 혹여나 거짓말을 한게 아닐까 의심스런 눈초리를 보였고. 현성은 등뒤로 식은땀을 흘렸다.


그게 그런 뜻으로 말한게 아니였는데 말이다.

허나 사실대로 말을 할 수는 없으니 그저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헛웃음을 흘릴 뿐이었다.


"웃는가?"

그런데 레이첼은 그것 조차 용납 못 하는지 차갑게 냉소를 지으며 현성을 몰아세웠고. 현성은 쭈꾸미 마냥 잔뜩 움츠러들어서는 기가 껌벅 죽었다.


"차렷."

아아, 제대로 걸렸다. 고등학교에 다닐 때나 듣던 말을 이곳에서 들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러면서도 몸은 착실히 레이첼의 말을 따랐다.

이윽고 레이첼은 현성을 괘씸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팔짱을 꼈다.


현성이 누구와 관계를 나누던 상관은 없었다.


성욕이 없는 엘프와는 달리 현성은 성욕이 존재하는 인간이었으니까.


더군다나 관계를 나누는 것은 자신이 억압할  있는 행위가 아니었다.

다만 레이첼이 이렇게 현성을 향해 화를 내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그 상대가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의 둘도 없는 친구인 에리엘이었기 때문이었다.

허나 에리엘의 취미가 그렇고 그런것임을 레이첼 또한 알고 있었기에, 현성이 하고 싶어서 한 것이 아님을 대충 이해하고 있었다.


또한 레이첼은 엘프라는 종족이 무척이나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음을 알았다.

그렇기에 한창 때의 나이인 현성이 에리엘이 작정하고 유혹을 하면 버틸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래도 자신의 제자가 유일무이한 친구와 성적인 관계를 나눴다는 것이 불편했다.


아무리 스승이라도 제자의 정사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건 무리수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불편한건 불편한 것이었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씨게 혼을 내고 꾸중을 줬다가는 그것 또한 선을 넘는 행위였다.


그렇기에 레이첼은 지성을 가진 종족답게 대화를 통해 해결하고자 마음 먹었다.


"현성."


"넵!?"

잠깐 침묵을 유지하던 레이첼이 어떠한 징조도 없이 말을 걸자 현성은 신경을 곤두세운 채로 자동반사에 가까운 반응으로 곧장 대답했다.

"에리엘과는 어떻게 정사를 맺게 된건가?"


...


"네?"

적나라한 질문.

현성은 예상치 못한 질운에 자신이 잘못 들은건가 싶어 저도 모르게 반문했고. 레이첼은 변함없는 표정으로 다시 똑같은 입모양을 보였다.

"에리엘과는 어떻게 정사를 맺게 된건가?"


오우야...

현성은 레이첼의 적나라한 질문이 잘못 들은게 아님에 한탄했다.


아무리 화가 나도 그렇지 그런걸 물어보면 어떻게 대답하겠는가.

말하다가 수치사만  해도 다행이겠다.

현성은 진심으로 고개를 좌우로 빠르게 돌리며 강한 부정을 표했고. 이에 레이첼은 환한 눈웃음과 함께 현성의 손을 붙잡았다.


"정 안 되면 에리엘에게 가서 물어볼거다."

에리엘.


그 이름이 나오자 현성은 불안감에 치를 떨었다.

과연 에리엘이 자신 처럼 입을 다물고 있을까?

아니다.

에리엘이라면 없던 일까지 만들어내서 하나의 야설을 만들어낼게 뻔했다.

그렇다면 차라리...

솔직하게 전부 털어넣는게 맞나?

아니, 그래도 성생활까지 말하는건 부끄러운데...


...

"그...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는데..요?"

"어쩌다 보니..?"

으득-


으윽, 영 아닌 것 같아서 많은걸 생략해서 말을 해봤더니 마주잡은 손에 악력을 준다. 근육이라고는 일도 없어 보이는데 왜 이렇게 아픈걸까.

이윽고 현성은 억울함에 입술을 삐죽였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지 않은가...


더군다나 첫관계였던만큼 특별한 기억으로 간직하고 싶었다.


또한 어떻게 관계를 나눴던 상대방의 허락도 없이 남에게 얘기를 할 수 있을까.

에리엘의 성정이 괴팍하기는 했으나 현성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현성이 단호하게 입을  닫고 있자 레이첼도 끝까지  생각은 없었는지 짧게 한숨을 쉬고는 힘을 주던 손을 놓아주었고. 그와 동시에 입을 열었다.

"현성, 말하기 싫은건가? 싫다면 말하지 않아도 된다."


본인이 싫다는게 어쩌겠는가.

레이첼은 그리 모진 성정이 아니었기에 현성을 이해하는 걸로 했다.

또한 보통의 인간은 성관계에 대하여 보수적인 편인 것으로 알고 있었기에 어느정도 납득은 할 수 있었다.

다만, 한가지는 확실히 하고 싶었다.


"대신 앞으로는 에리엘과 그런 짓은 하지 않았으면 한다."


에리엘만 아니면 된다.


레이첼은 그것만 지켜준다면 상관은 없었다.

반면 현성은 이게 맞나 싶었다. 보통 이런 상황은 연인들 사이에서나 연출될  같은 것일 테니까.


하지만 현성은 당장의 상황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기에 은연 중에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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