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화 〉용사입니다. 엘프는 삐뚤어졌습니다.
이튿날, 현성은 찌부둥한 몸을 일으키며 잠에서 깨어났다.
열러진 창밖을 보니 아직 해가 뜨지 않아 어두운 상황, 아직도 달이 하늘 위에 떠있는게 보였다. 해가 떠있을 때도 하늘이 참 맑았는데, 밤하늘 또한 참으로 맑았다.
한국과는 다르게 별이 무수히 보이니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이윽고 현성은 침대에서 벗어나 이불을 개어놓고 복도로 나섰고. 저택의 복도는 아직 새벽이어서 그런지 그 누구도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저택의 구석진 곳에 있는 방이라 없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현성은 복도를 걸으며 마음가는 대로 방향을 정했다. 그러고 보니 이곳에 와서 마음 편히 돌아다녀 본 적이 없었던 것 같았다.
그렇게 저택의 곳곳을 누비다 보니 현성은 어느덧 나가는 문에 도달했고. 밖으로 나와 바로 정면에 보이는 정원으로 다가갔다. 누가 관리하는 지는 몰라도 참으로 아름다웠다.
상쾌한 풀내음, 문득 현성은 머릿속에 에리엘의 살내음이 떠올랐다. 에리엘의 살 냄새도 풀내음이 났었는데...
아니, 내가 무슨 생각을..
첫 경험이라서 그런가, 자꾸만 떠오르는건 어쩔 수 없었지만. 그래도 소중하게 간직하고 싶은 마음이었기에 아무 때나 떠오르고 싶지 않았다.
현성은 고개를 저으며 머릿속에 떠오른 것들을 떨쳐내고선 정원 안을 걷기 시작했다.
이런 저런 꽃이 많았으나 꽃에 대해 무지했기에 그저 예쁘다는 생각만 들 뿐이었다. 이런 아름다운 정원을 관리하는 사람이라면 분명 마음 씨도 고울 것 같았다.
그러다 문득, 현성의 시야에 흙바닥에 떨어져 있는 꽃 하나가 들어왔고. 무의식적으로 허리를 숙여 그것을 손에 쥐었다.
"아앗..."
손에 쥐자마자 느껴지는 따끔한 느낌, 현성은 그 느낌에 꽃을 떨어뜨렸고. 슬쩍 손바닥을 펴보니 엄지에서 피가 나는게 보였다.
언뜻 보니 줄기에 가시가 있던 모양이었다. 이에 현성은 피가나는 손가락을 입에 물어 피를 빨며 무심하게 꽃을 다시 주워들었다.
이번엔 다치지 않게끔 잘 봐가며 들었고. 꽃은 척 봐도 장미 같았다. 하지만 색이 연분홍색인 것이 특이했다.
현성은 장미는 종류가 다양하다고 들었기에 대충 그러려니 했다.
그리고는 무심하게 장미를 유심히 살피며 앞으로 걸어가려는 순간, 현성은 앞에 드리워진 그림자에 걸음을 멈췄다.
"어머... 일찍 일어났나 보네..?"
에리엘.
별다른 인기척은 없었는데 에리엘이 눈앞에 있었다. 뭔가 이런 곳에서 느닷없이 만난 것에 당황하긴 했으나, 이 저택의 주인이 에리엘인데 뭐가 문제일까.
그런데 왜인지 에리엘의 표정이 울적해 보였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걸까? 현성은 괜스레 걱정스런 마음이 들었고.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에리엘의 인사에 방긋 웃으며 응답했다.
"네, 오늘은 일찍 눈이 떠졋네요. 에리엘 씨도 일찍 일어 나셨네요?"
"그래. 오늘 따라 잠이 안 오더라고, 후후..."
잠이 안 온다니. 지금이 정확히 몇 시인지는 몰라도 현성은 푹 잠들다 일어난 상태였다. 적어도 새벽 3~4시는 됐을텐데 그렇다면 에리엘은 이 시간까지 잠을 안 자고 있던걸까?
현성은 에리엘에게 정말로 뭔 일이 있었다는 것을 확신하다 싶이 했다. 하지만 선뜻 물어볼 자신이 없었다.
과연 자신이 에리엘에게 그런걸 물어볼 정도로 가까운 사이인가, 라는 생각 때문에.
비록 성적인 관계를 나누었다고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상황의 흐름에 따라 벌어진 일이었지, 서로가 서로에게 친밀감을 느낀 상태에서 호감을 품어 한 행위가 아니었다.
현성은 선뜻 다가가지 못하는 자신의 상황에 답답함을 느꼇고. 에리엘은 현성이 그런 생각을 품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는지, 슬그머니 손을 위로 올려 현성의 뺨을 쓸어내려 왔다.
그러고서는 부드러운 눈웃음과 함께 선분홍빛을 띄는 입술을 움직였다.
"오늘 따라 울적하네.. 같이 좀 걸을까?"
넌지시 툭 던진 같이 걷자는 말.
그 말이 뭐라고 가슴이 두근거릴까.
현성은 마치 매혹에 당한 듯 거부할수 없는 매력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에리엘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부드럽게 입꼬리를 슬며시 올리며 현성의 손을 맞잡고선 걸음을 이끌기 시작했다.
그렇게 둘은 몇 분동안 아무 말 없이 정원을 누볐고. 긴 침묵 속에서 먼저 입을 열어 적적함을 깬 것은 에리엘이었다.
"저택 생활은 어때? 지낼만 하려나?"
집주인이 세입자에게 할 법한 말. 어찌보면 현성은 손님이나 마찬가지였기에, 에리엘은 최대한 현성의 편의를 봐주고자 했다.
물론 그것보다도 자신의 둘도 없는 친구인 레이첼의 제자라는 점이 더욱 강력하게 작용하긴 했다.
반면 현성은 에리엘이 내뱉은 말에서 느껴지는 배려심에 가슴이 따듯해지는 느낌을 받았고. 그 감정을 표정과 말로써 드러냈다.
"저에게 너무 과분할 정도로 좋아요. 선뜻 방을 내주셔서 고마워요, 에리엘 씨."
진심을 그대로 표현해서 그런지 어느샌가 현성의 얼굴에는 무척이나 밝은 미소와 함께 행복함에 젖어 있었고. 에리엘은 그것을 멍하니 바라봤다.
우울감.
레이첼과 얘기를 나누고 난후, 친구와 영원한 이별을 맞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우울감에 젖어 있었다.
그런데 현성과 대화를 나누면서 어딘가 마음이 풀리는 느낌이 들었고. 문득 현성과 나눴던 진한 정사를 떠올렸다.
현성이 레이첼의 제자가 되면서 잊으려고 했건만, 왜 지금에서야 그 적나라한 기억들이 떠오르는 걸까.
그때 그 느낌.
쾌락과 즐거움.
가슴 한구석이 텅빈 느낌이 꽉 채워지던 그 느낌.
그 느낌이 계속해서 떠오른다.
지금도 텅빈 느낌에 공허함마저 느껴졌다.
우울감 때문인지 더욱 크게만 느껴진다.
에리엘은 슬쩍 현성의 아랫도리가 있을 바지춤을 바라봤다.
분명 험상궃게 생긴데다가 냄새 마저 역하였는데 왜 자꾸 떠오르는걸까.
에리엘은 자신의 상태를 스스로 조차 이해할 수 없었다. 세상에 널린 수많은 남자들 중 하나, 특별한 거라고는 자신의 처음을 내주었다는 것 뿐일텐데 왜일까.
인간에게는 처음이라는 것이 중요하게 여겨질지 몰라도, 엘프에게는 아니었다. 인간들이 흔히 말하는 정조관념이라는 것이 엘프에게는 없으니까.
그렇다면 이 감정은 무엇 때문이란 말인가.
"잠깐만..."
급기야 에리엘은 걸음을 멈추며 현성을 멈춰세웠고. 현성은 그 목소리에 앞으로 나아가려다가 몸을 돌렸다.
그러나 그 반동 때문인지 에리엘의 몸이 앞으로 끌려왔고 현성의 품에 안착했다. 이윽고 현성은 자신이 실수로 에리엘을 끌어 당겼다는 생각에 살며시 밀어내고자 했다.
하지만 밀어내려는 현성의 손을 에리엘이 다급히 붙잡았고. 이에 당황한 현성은 밀어내려던 손을 멈추고 고개를 천천히 내려 에리엘을 바라봤다.
헌데 어째서인지 에리엘의 얼굴이 상기되어 있음에 현성은 그것을 멍한 눈으로 시선을 고정 시켰다.
뜬금없는 생각이었지만 무척이나 아름다워 보였다.
또한 묘한 상황에서 저런 표정을 지으니 괜스레 에리엘과의 뜨거웠던 정사가 떠올랐고. 현성도 에리엘 처럼 얼굴을 불그스름하게 상기 시켰다.
자신이 이런 여자와 관계를 나눴다는게 정말로 믿기지가 않았다.
"잠깐만... 이대로 있을까..?"
어느덧 그 상태가 지속되자 에리엘은 눈썹을 파르르 떨면서 다소 어색한 말투로 말했다. 이에 현성은 침묵으로 긍정을 표했다.
그렇게 서로의 체온을 나누며 현성과 에리엘은 서로의 몸이 점점 뜨거워져 가고 있음을 느꼈다.
그리고 에리엘은 지금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자신은 왜 현성을 밀쳐내지 않았는가. 왜 그 품에 안김으로써 느껴지는 체온을 즐기고 있는걸까. 어째서 심장이 간지러운 걸까.
도대채 왜 자신의 몸은 현성을 갈망하고 있는 걸까.
엘프에게는 성욕이 없다. 그렇기에 이것이 성욕일 리가 없다.
그 순간, 에리엘은 문득 엘프들 사이에서 구전으로만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를 떠올렸다.
엘프가 평생에 단 한 번 밖에 만날 수 없는 운명의 사람과 만나 사랑에 빠지는 순간, 여타 다른 생명체들과 같이 사소한 것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게 된다는 이야기.
유치해서 하품이 나올 지경인 낭만 투성이인 이야기였다.
그 어떠한 것에도 흥미를 못 느끼는 종족이 사랑에 빠진다니, 말도 안 되는 이야기.
그렇기에 그냥 무시한 채로 여태까지 살아왔는데...
왜 지금 이 남자를 보며 얼굴을 붉히고 가슴을 두근거리고 있단 말인가. 또한 이 애타는 마음은 무엇인가.
에리엘은 이 모든 것들은 인정할 수 없었다.
고작 인간에게 이런 감정을 느낀다니, 그것은 에리엘이 자존심이 허락치 않았다.
그래서 그런지 에리엘은 이 감정을 삐뚤어지게 받아들였다.
자신은 그저 이 남자와 관계를 나누는 것에 엘프 특유의 괴팍한 성정이 과하게 반응하는 것일 뿐이라고.
아, 그렇게 생각하니 편했다. 마음이 너무도 편안했다.
생각이 정리되니 에리엘은 특유의 음흉한 눈빛을 보이며 현성의 아랫도리에 손을 넣고는 근처의 나무로 밀어넣다 싶이 했다.
툭-
현성의 등이 나무의 기둥에 부딪히는 소리가 아무도 없는 고요한 정원에 퍼졌고. 에리엘은 입맛을 다시듯 입술을 교태롭게 핥고는 현성의 귀에다 입술을 가까이 대며 입을 열었다.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