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34화 〉용사입니다. 스승이 금주를 한답니다. (34/89)



〈 34화 〉용사입니다. 스승이 금주를 한답니다.

쏴아-


저택의 구석에 마련된 욕탕. 현성은 그곳에 있는 욕조에 몸을 담갔다. 비록 차디찬 물이었지만 현성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런것 보다도 머릿속에 빼곡히 찬 다른 것에 온 신경이 쏠렸기 때문이었다.


에리엘.


결국에는 또 다시 에리엘과 정사를 나누었다. 현성은  사실에 본인 스스로 가책을 느꼈다.


완전히 이성을 잃지 않았다. 문득 에리엘과 나눴던 야릇한 장면이 뇌리에 스쳐지나갔고. 현성은 아랫도리가 점점 부풀어오르는게 느껴졌다.

무려 세번이나 정애을 토했으면서 아직도 멀쩡히 서는 것을 보면 참담한 기분이 든다.


그리고 에리엘이 마지막에 했던 말...


'오늘 밤에도 내 방으로 와.. 내일도 모래도.. 인정하기는 싫지만. 나, 너가 싫지만은 않거든.'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에리엘의 마지막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


현성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앞서 오늘 밤에도, 내일도 모래도 계속해서 자신의 밤으로 오라고  것은 아마도 성적인 관계를 맺기 위함이라는 것임을 예감했다.


하지만 마지막 말의 의미는?


싫지만은 않다고?

싫지 않다는 말을 좋아한다는 뜻으로 받아드릴만큼 현성은 멍청하지 않았다. 그것은 세상을 이분법으로만 바라보는 사람이나 할 법한 생각이었으나.


그러나 분위기 상으로 보면 그것은 고백 같기도 했다.

그런데 갑자기 고백?


착각일 가능성도 있겠지만 심장이 빠르게 요동치는 것은 어쩔  없었다.


...

앞으로 에리엘을 어떻게 대해야 되는거지?

하나도 모르겠다.


애초에 자신과 에리엘이 어떠한 관계인지 정의 조차 내리기 힘들었다. 그저 대화 몇 번 나누다가 정사를 나누었을 뿐, 별다른 일은 없었다.

헌팅, 원나잇? 이런 것은 단언코 아니라고 확신했고. 연인, 애인 이런 사이도 아니라고 확신할  있었다.


촤르르-


욕조에서 몸을 일으키자 이에 물이 요동을 치며 밖으로 흘러나온다. 그리고 현성은 욕조에서 나와 곱개 접어진 천으로 몸을 닦아냈다.


그렇게 옷을 챙겨 입은 후, 현성은 천천히 밖으로 걸어나왔다.

시간이 많이 지났는지 하늘에 해가 쨍쨍하게 떠 있었고. 다시금 걸음을 옮겨 레이첼의 집으로 향했다.


똑똑-

문앞에 서서 문을 두들기니 안에서 분주한 소리가 들려왔고. 현성은 다소 복잡한 마음으로 레이첼이 나오길 기다렸다.


약속을 한지 얼마나 됐다고 그런 일을 저질렀으니 죄책감이 들기 마련이었다.

레이첼에게 사실대로 말해야되는 걸까? 현성은 그것 부터가 걱정이었다.

나중에 들켰다가는 정말로 큰일이 날 것 같았다. 또한 현성은 레이첼에게 미움을 받으면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에 지레 겁을 먹었다.

애초에 이 저택에 머물 수 있던 것도 레이첼 덕분이었으니까. 솔직하게 말하고야 싶지만은 그 후에 일어날 일이 현성의 두려움을 자극했다.

다른 것도 아닌, 어쩌면 앞으로의 처후가 달린 일이었으니 당연했다.


덜컥-

문이 열린다.

"왔는가, 현성..?"


잠을  잔건지, 아니면 잠이 덜 깬 것인지 방금  일어난 듯이 눈가를 비비는 비몽사몽한 모습의 레이첼이 보였다.

"잘 잤어요?"


살갑게 웃으며 말을 거니 레이첼은 눈을 비비던 손을 치웠고. 그러자 눈밑으로 두텁게 내려온 다크써클이 보였다.

밤새 무슨 일이 있었길레 하룻밤 사이에  지경이 된걸까... 괜스레 걱정스런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라도 있어요? 상태가 영 아닌데.."


현성은 자연스레 레이첼의 산발이 된 머리를 정리하며 물었고. 레이첼은 그 손길을 허락하며 크게 입을 벌려 하품을 했다.


"잠을 못 잤다... 피곤해.."

잠을 못 잤다는 것은 척 봐도   있는 사실이라서 그걸 물어본건 아니었는데..

"왜 잠을 못 잤는데요?"

"술을 안 마셨더니 잠이 안 와서 그렇다."


피곤해하면서도 물어보면 대답은 잘해준다. 그런데 술 때문이라니. 레이첼은 술이 없으면 잠을 못 잘 수준으로 알코울 중독자인 거였나?

그런 것 치고는 평소엔 굉장히 멀쩡해 보였기에 전혀 생각치  했다.

"평소에는 술을 마셔야 잠이 오나봐요?"


"...술 없이는  잔다."

본인도 말하기 부끄러운 얘기라는건 아는지 말하면서 얼굴을 붉히고는 고개를 돌린다. 이건 그나마 다행인 부분, 자신의 잘못을 아니 고칠 여지는 있다는 얘기였다. 그래도 오늘만  마신 것일 수도 있었기에 아직 다행이라 여기지는 않았다.


"앞으로 술 안 마시게요?"

살가운 말투로 계속 말을 걸었고. 레이첼은 어느정도 정리를 해둔 머리를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계속은 아니고... 한동안은 안 마실거다."

이왕 금주를 할거면 확, 해버리지.  동안만 안 마시는건 무슨 시츄에이션일까. 그럴꺼면  하러 금주를 한단 말인가.


현성은 레이첼의 언행을 도통 이해할  없었다.

"왜 한동안이에요? 이왕 할거면 계속하는게 좋잖아요."

현성의 입장에서는 지극히도 당연한 물음. 허나 레이첼은 고개를 거세게 도리도리 흔들며 극구 반대했다.


"그건 죽어도 싫다. 차라리 죽고 말지."


와우. 금주를  바엔 차라리 죽어버린다니. 예상치 못하게 레이첼의 진정한 애주가의 면모와 지독한 알코울 중독자의 면모를 함께 봐버렸다.


본인이 싫다는데 강요할 수도 없는 노릇. 그래도 당분간은 금주를 한다니 그것만이라도 다행이라 여겼다. 그래봤자 말짱 도루묵이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하루가 이틀이 되고 이틀이 일주일이 되며 일주일이 한달이 되듯이, 옆에서 계속 자극하다 보면 완전히 금주할 가능성이 있을 터였다.

물론 이것은 일이 잘풀릴 때의 얘기지만.

"언제까지 금주하게요?"

현성은 대화를 다시 이어갔고. 레이첼은 이번엔 턱을 쓸어내리며 고민하는 듯한 표정과 행동을 보이다가 입을 열었다.


"음... 계획대로 순탄하게만 흐른다면 몇 년, 아니면 그보다 더 오랫동안 할 예정이다."


....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말이 전혀 아무렇지 않은 것아 아니었다.


상상도 못한 스케일.

엘프는 오래 산다고 하니 몇  쯤이야 아무것도 아닌걸까?

이건 또 색다르게 느껴지는 부분이었다.


"혼자서 가능하시겠어요?"

자고로 중독은 혼자만의 힘으로 벗어나기 어려운 법이다. 오죽하면 도박, 알코울, 흡연  다양한 중독 치료 센터가 있겠는가. 그렇기에 현성은 레이첼을 돕고자 말을 꺼냈고. 레이첼은 손은 그대로 턱을 쓸어내리면서 눈썹을 한데 모아 잠깐 고민하는 듯 하더니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

"만약 평소에 내가 술을 먹으려고 하면 말려주는  정도는 필요할 것 같다. 잠들기 전에는 내가 어떻게든 참아 보겠다. 아마도..."


근엄하게 말을 한 것 치고는 끝맺음이 너무 연약한  아닌가 싶다. 다만 도움을 요청하니 군소리 안하고 고개를 끄덕여 긍정의 뜻을 표했다. 어차피 레이첼에게 거의 하루종일을 배우니 그정도 쯤이야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한가지 궁금한 부분이 남아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왜 술을 끊으려는 건가요? 무슨  있어요?"

술을 끊고자 하는 계기. 계기가 있을 텐데 현성은 그것이 궁금했다.

별 이유는 없고 단순한 호기심 대문에 레이첼을 향해 물었고. 레이첼은 어깨를 으쓱였다.

"앞으로  일이 산더미 같이 쌓였는데, 이 몸상태로는 답도 없을 것 같아서 그런다. 집중도  되고 체력도 딸리고 아무튼 그렇다는 거다."


술이 신체에게 주는 전형적인 악영향.

오랜 기간 저렇게 마셔왔다면 분명 몸 어딘가에 암이 생기고도 남았을텐데,  정도 증상 뿐인 것을 보면 엘프의 몸은 선천적으로 많이 건강한 듯 보였다.

그런데 앞으로 할 일이 산더미 같이 쌓였다는 것은 아마도 황제를 만난다는 것과 앞으로 나를 가르치기 때문일 듯 했다.

"됐고, 얼른 어제 하던 거나 마저해라. 마나를 보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으니 오후가 되기 전까지는 끝낼 수 있을 거다."

아, 마나.

....

어라..?


현성은 갑자기 머릿속에 든 한가지 생각에 머릿속이 띵한 느낌과 함께 온몸이 굳었다.

마나.


어제 구루카가 분명히 자신을 계속 지켜보고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이런 미...친

현성은 까맣게 잊고 있던 사실에 얼굴이 불그스름하게 변했다.


구루카와 같이 자신의 주변을 맴도는 이들에게 적나라한 현장을 생생하게 라이브로 보여줬다는 말인가.

현성은 부디 마나들이 프라이버시를 존중하여 눈을 가렸기를 바랬다. 마나인 상태에서 눈이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리고 그렇게 있자니 레이첼이 현성의 뺨을 툭툭 치며 얼굴을 가까이 해왔고. 현성은 깜빡 놓고 있던 정신을 차렸다.

"뭐하는가, 현성? 농땡이 부리지 말고 빨리 해라."


"아... 네, 그래야죠."

그래, 생각해보니 다시 안 부르면 그만인 일이었다. 현성은 그렇게 생각하며 어제 처럼 바닥에 앉아 마나를 느끼고 보고자 했다.


그러면서 머리를 굴려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어제는 마나를 다루고자 하는 의지가 강했기에 실패했으며 마나와 대화하고자 했기에 의도치 않은 다른 현상이 일어났다.

그렇다면 단순히 마나를 보고자 생각하면 되는 것이 아닌가.

현성은 지극히도 일차원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괜히 복잡하게 머리를 굴려봤자 소용이 없음을 어제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현성은 마나의 형태를 상상하며 레이첼 처럼 하고자 의지를 품었고. 그러자 현성은 주변에서 서서히 무언가 보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얼마 안가 현성은 그것이 진짜임을 확인했다.


스으으...

하얀색의 연기.


흰색의 연기가 현성의 몸 곳곳에서 일렁거렸고. 마치 축하한다는 듯이 주변을 빙빙 돌며 요란스럽게 움직였다.

정말 허무하리 만치 손쉽게 마나를 보는 것에 성공했다. 이렇게 쉬운거였다니, 그동안 자신은 무슨 짓을 해온걸까. 괜스레 허탈감이 들었다.

그나저나  마나들 속에 구루카와 같은 사람들의 영혼이 들어있다는 얘기가 아닌가? 현성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고. 뭔가 그렇게 생각하니 그로테스크한 기분이 들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오! 생각 보다 빨리 성공했다, 장하다 현성. 곧바로 다음 차례로 넘어가도 될 것 같다."


칭찬을 받으니 뭔가 인재가 된  같은 느낌에 가슴이 뛴다. 이게 뭐라고 가슴이 뛰는걸까.


헌데 신이 이 몸안에 용사 천명 분의 제자가 있다고 말한 것을 생각하면 택도 없이 느린게 아닐까?

...


그렇게 생각하니 한참 멀었구나 싶어 우울감이 들었다.


뭐, 어떻게든 될거라 믿는다. 언제는 우울하지 않았던 적이 있던가.

현성은 그렇게 결론 지으며 느긋하게 몸을 일으켰고.



그 순간, 현성은 레이첼이 허공에 손을 뻗는 것에 시선이 따라갔고다.

어디서 많이  듯한 장면.


텁-

그 뒤로 하늘에서 나타난 병 하나.


저것은 무엇일까.


굳이 봐야 알겠는가.

"금주 한다면서요, 스승..?"

말한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부터 술을 찾으십니까, 하하.


현성은 속마음 까지는 밖으로 내뱉지 않았고. 다른 의미로 살갑게 웃었다.


그러자 레이첼은 아차 싶었는지 병을 바닥에 떨어트렸고. 쨍그랑, 소리가 주변을 채웠다.

"...버릇이다."


...

"이번만 봐줄게요."

이거, 뭔가 벌칙이라도 걸어야 될 것 같다. 금주를 선언 해놓고 벌칙 같은 것이 없으니 목표 의식이 흐릿한 것 같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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