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36화 〉용사입니다. 이 여자는 누군가요. (36/89)



〈 36화 〉용사입니다. 이 여자는 누군가요.

후우, 현성은 심호흡을 한  하며 마음의 준비를 했다.

이번에는 부디 그 입을 다물어줬으면 좋을텐데.

"...다 들었죠? 얼른 나와요."


다시 벽에 등을 기대어 이쪽을 바라보는 레이첼을 슬쩍 살핀 뒤, 현성은 조심스레 나지막이 마나에게 말을 건냈다.


그러자 주변을 열심히 맴돌던 하얀 연기들 중에서 작은 빛무리가 튀어 나왔고. 그것은 빛을 뽐내며 점점 커지더니 이내 인간의 형상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현성은 그 속에서 나타난 인물을 보며 눈썹을 한데 모았다.


여자.

구루카가 아니라 왠 여자가 나타났다.


태닝이라도  듯 건강하게 탄 구릿빛 피부와 진한 붉은 색의 어깨까지 내려오는 머리카락, 마치 레게 음악을 하는 사람 처럼 머리를 묶은 것이 굉장히 독특해 보였다.


그와 더불어 눈매가 올라가 있어 전체적으로 날카로운 인상이기는 한데, 다가가기 어려운 인상이 아니라 되게 말썽꾸러기 같은 인상이었다.

또한 옷차림이 다소 개방적이었다. 언뜻 봐도 손 안에  잡히지 않을 듯한 가슴을 붕대로 묶고 그 위에 갑옷을 둘렀으며 하체 또한 음부와 그 보다 살짝 아래인 허벅지 윗부분까지만 붕대로 감은 상태에다가 거기에 갑옷을 덧 입었을 뿐이었다.

어찌됐든 결론적으로 이 여자도 미녀였다.


그렇게 현성의 눈에 첫인상이 자리잡은 순간, 갑자기 여자가 장난스레 입꼬리를 올리며 손을 건냈다.

"반갑다. 나는 들판의 폭풍, 적색 바람의 환생이라고 한다."


들판의 뭐..?


 여자, 방금 뭐라고 자신을 소개한걸까.

현성은 당황스러운 감정을 가까스로 티를 내지 않으며 침착함을 유지했다.

도대체 구루카는 어디가고 다른 사람이 나타난 걸까... 어찌됐든 이 사람도  몸안에 있는 마나이긴 하겠지.


현성은 그런 생각과 함께 뻗어오는 여자의 손을 맞잡았고. 여자는 힘차게 손을 흔들며 반가움을 표했다.

인상 부터 에너지가 넘치게 생기긴 했는데, 행동도 그렇다.


헌데 정말로 못 들어서 그런데,  여자... 자기 이름을 뭐라고 소개했더라? 당황하는 바람에 제대로  들었다.


얼핏 듣기에는 굉장히 특이한 이름이었던 것 같기도 했다.

"저기 죄송한데.. 제가 이름을 잘 못 들었거든요. 다시 얘기해 주실수 있을까요..?"

현성은 예의상 사과와 함께 죄송하다는  머리를 긁으며 재차 여자를 향해 물었고. 여자는 다시금 자신을 소개했다.

"들판의 폭풍, 적색 바람의 환생이라고 한다."


역시나 굉장히 특이한 이름.

듣는 순간 김수한무두루미와거북이가 떠오르는 이름이었다.


"아... 들판의 폭풍이 성이고, 적색 바람의 환생이 이름인건가요..?"

현성은 다소 어색한 말투로 살갑게 웃으며 말을 건냈고.  여자는 고개를 강하게 저으며 현성의 말을 정정했다.

"들판의 폭풍은 이명, 적색 바람의 환생이 내 이름이다."

아...

현성은 적색 바람의 환생이 제대로 정정함에 입을 벌리고 눈을 크게 뜨며 놀라운 감정을 그대로 표출했다.

이명이라, 생각해 보니 구루카도 동토의 용병이니 뭐니했던 것 같기도 했다. 대충 그런 의미겠지.


현성은 그렇게 이해하며 적색 바람의 환생의 말을 납득했다.

하지만 여전히 상당히 긴 이름인 것은 분명했다.

적색 바람의 환생, 어렸을  했던 게임의 npc인 발가락 펴고 일어서가 떠오르는 이름이었다. 그리고 그 npc가 아메리카 원주민을 모티브로 뒀다는 것이 느닷없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대략적인 생김새라던가 분위기가 아메리카 원주민 같기도 했다. 직접 만나본 적은 없지만 말이다.

어찌됐든 현성은 이왕 이렇게 된거, 적색 바람의 환생과 대화를 하며 교감을 해보기로 했다.

그러면서도 적색 바람의 환생이 아침에 있었던 일을 모르는  했기에 한시름 놨다는 생각을 품으며 대화를 시도했다.

"적색 바람의 환생 씨도 제 마나인거죠?"


별 생각 없이 뱉은 질문, 괜히 복잡한 얘기로 시작하는 것 보다 별볼일 없는 얘기로 시작하는게 대화함에 있어 서로 부담감도 없고 편한 법이었고. 적색 바람의 환생은 현성의 질문을 듣자 마자 일초의 지체되는 시간 조차 없이 대답을 꺼냈다


"그렇다. 나는 너의 마나, 너의 힘의 원천이자 동료다."

힘의 원천이자 동료.

틀린 말은 아니지만 저런 식으로 표현하니 내가 뭐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현성은 괜히 마음이 들뜨는 바람에 표정이 풀어졌고. 점점 올라가는 입꼬리를 진정시키며 대화를 계속 이어나갔다.

"적색 바람의 환생 씨는 하고 싶었던 말 같은거 없나요?"

마땅히 물을 것이 없었기에, 현성은 대화의 주도권을 적색 바람의 환생에게 넘겼고. 적색 바람의 환생은 잘록하게 튀어나온 자신의 허리를 짚으며 미리 예상이라도 해놓았던 것인지 곧장 입을 열었다.


"현성, 너는 너무 약하다. 그러니 내가 친히 강해지는 비법을 가르쳐 주겠다."


생각하는 기미 조차 안 보이고 바로 말한 것을 감안하면 아무래도 약한 것이 불만이었나 보다.

하지만 현성도 본인이 약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대뜸 면전에서 직접 들으니 기분이 급격히 다운되는 듯 했다. 그래도 뜬금 없기는 해도 강해지는 비법을 가르쳐준다니 본의 아니게 귀를 기울이게 됐고. 이윽고 적색 바람의 환생은 현성의 두 어깨 위에 두 손을 올리며 얼굴을 가까이 했다.

그리고 적색 바람의 환생의 얼굴이 가까워짐에 현성은 살짝 얼굴을 붉혔다. 너무 갑작럽게 나타난 지라 느끼지  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 에리엘이나 레이첼 정도는 아니더라도 부담스럽긴 했다.

다만 적색 바람의 환생은 자신이 심장 폭행범이라는 것을 모르는건지 진지한 얼굴로 인중을 모았다.


이제 말하려는 모양, 적색 바람의 환생의 입술이 움직이는게 코앞에서 보였고.  내용에 현성은 부담스럽던 뭐가 됐던간에 짜게 식은 눈으로 적색 바람의 환생을 바라봤다.


"수련, 끝없는 수련만이 강해지는 비법이다."

수련.


살면서 누군가에게 몇  들어볼까 말까한 단어, 하지만 수련의 뜻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터였다.

헌데 수련이란 것이 원래 강해지고자 하는 행위인데 너무도 당연한 말이 아닌가.

"우와, 정말 몰랐던 사실이네요. 알려주셔서 감사해요"


현성은 영혼이라고는  줌도 없는 리액션을 할까 하다가, 그래도 생각해서 말해준 것일텐데 조금의 생기만큼은 담아서 반응했고. 적색 바람의 환생은 개운하다는 듯 코앞에서 잇몸을 보이며 환하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가까이에서 직관한 현성은 적색 바람의 환생은 웃는 모습이 매우 아름다운 여성임을 느꼈다.


적어도 웃는 모습만큼은 레이첼과 에리엘 보다도 매력적이게 보였고. 적색 바람의 환생은 그 상태에서 느긋하게 말을 건냈다.


"후후, 극소수의 측근들에게만 가르쳐 주었던 비법이니 고마워해라."


...

한국에서 저런 말을 했다간 제삿상에 제첩국 올리겠다는 말을 듣고도 남았을텐데. 적색 바람의 환생은 한국에서 안 태어난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될거다.


"다른 할 말은 없어요?"

다음으로 현성은 다시 대화를 이어나가기 위해 말을 걸었다. 교감이라는 행위가 정확히 무엇을 해야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대화를 많이 하면 되는 거겠지. 그도 그럴 것이 레이첼도 딱히 별 말 없이 지켜보고만 있을 뿐이니 말이다.

"음, 잠깐 귀 좀 대봐라."


귀를 대보라는 말, 현성은 뭔가 싶었지만 별 일 아닐거라는 생각에 귀를 적색 바람의 환생에게 내밀었고. 얼마 안가 적색 바람의 환생이 내뿜은 듯한 뜨거운 숨결이 귀에서 느껴졌다.

이에 현성은 순간적으로 당황하여 얼굴을 붉히며 황급히 적색 바람의 환생과 거리를 벌렸고. 적색 바람의 환생은 뭐 하냐는 시선을 보내며 현성에게 직접 다가갔다.


"뭐하는지 모르겠다만.. 얼른 대라. 시간이 얼마  남았다."

시간이 얼마 안 남았다.

현성은 그 말을 듣자 어쩐지 몸에 힘이 없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대화를 나눈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이러는걸까. 현성은 다소 허탈감과 함께 마지못해 귀를 적색 바람의 환생에게 대주었다.

후우-


뜨거운 숨결이 귀에 닿았응나 현성은 이번엔 당황하지 않고 얼굴만 붉혔다.

"...아침 일찍부터 앙앙 대는 소리를 내면 어떡하나. 덕분에 좋은 구경을 했다, 흐흐."

"...네?"

어라..? 방금 이 여자 뭐라고 한..


현성은 적색 바람의 환생의 말에 얼굴이 굳었다.


몰랐던게 아니라 모르는 '척'을 했었던 거였다?


현성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적색 바람의 환생을 보고자 했고. 현성이 고개를 돌리는 순간, 적색 바람의 환생은 레이첼 쪽으로 등을 보이며 몰래 현성의 아랫도리를 손으로 훔쳤다.


"뭐... 이 물건 정도라면 나라도 앙앙될 것 같지만 말이다, 흐흐."

에리엘과는 다른 의미로 퇴폐적이고 적나라한 음담패설.

"아니.. 그, 좀 부담스럽.."

현성은 부끄러움과 수치스러움에 슬그머니 고개를 내렸다. 그러나 그것 또한 별로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어느샌가 당차게 일어서버린 자신의 아랫도리를 마주하게 됐으니 말이다.


또한 온몸에서 힘이 사라지는 듯한 느낌과 함께 현성은 앞으로 고꾸라졌고. 적색 바람의 환생은 현성을 자연스레 받아서 자신의 품에 강하게 끌어안았다. 다행히도 갑옷 때문에 가슴의 감촉이 전해지지 않았기에 현성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적색 바람의 환생은 얼굴에 대놓고 장난기와 색기를 드러내며 입을 열었다.

"이런... 벌써 끝인가? 일찍 끝이 나는 남자는 별로니 조금 더 연습하도록 해라, 흐흐."

중의적인 표현. 현성은 그것을 못 알아들을만큼 둔하지 않았다.


이 여자, 앞으로 다시는 부르지 않을거라고 현성은 각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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