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화 〉용사입니다. 엘프가 다이다이 뜨자고 하네요.
으윽, 털썩.
현성은 지치다 못해 온몸이 벌떨 떨릴 지경이 되어선 바닥을 기었다.
아침부터 시작해서 해가 지기 시작할 때 까지, 현성은 대략 4~5번을 마나와 교감을 했다.
"아아, 또 뻗었나..."
적색 바람의 환생이 옆에서 시체 처럼 누워버린 현성의 볼을 손가락으로 쿡쿡 찌르며 말을 내뱉었고. 현성은 깊게 한숨을 쉬었다.
어쩌다가 이 여자랑 하루종일 어울리게 된걸까..
분명히 적색 바람의 환생이 아닌, 다른 영혼들에게 대화하자고 말하였다. 헌데 이 사람들이 미리 짜맞추기라도 했는지 계속해서 적색 바람의 환생만 나왔다.
어찌된 영문인지 물어도 그저 사람 좋은 얼굴로 베시시 웃기만 하는데 현성은 답답해 죽을 것만 같았고. 그것이 지금까지 이어져 하루종일 시달렸다.
중간중간 게속해서 색드립을 날리는데 그것이 얼마나 고달팠던가, 현성은 그 시간을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인내의 시간이라 칭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할꺼니까 들어가요..."
더는 못 한다. 체력도 체력이지만 이것은 정신적으로도 너무 피곤했다. 그렇기에 현성은 교감이 중단됐음을 말했고. 적색 바람의 환생은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다음에 보자고, 후훗."
스륵-
누가 다시 볼까 보냐.
현성은 조금씩 형체가 사라져가는 적색 바람의 환생을 보며 살갑게 손을 흔들었다.
그래도 갈 때는 좋게 보내야 나중에 뒤끝을 안 부리지 않겠는가.
그렇게 현성은 골칫덩어리였던 적색 바람의 환생을 떠나 보냈고. 그 뒤를 이어 레이첼이 다가와 현성의 볼을 쿡쿡 찌르며 말을 걸어왔다.
"현성, 괜찮은가?"
"괜찮아 보여요..?"
적색 바람의 환생이 에리엘과의 일을 말하기까지 했다면 혀깨물고 죽어버렸을 거다.
어쩜 사람이 그렇게 장난기가 많은지, 틈만나면 장난을 쳐오는데 대화를 이어갈 수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정작 제대로 된 대화도 못 하고. 이상하고 괴상한 말만 주고 받다가 시간을 다 보내버렸다.
이렇게 해도 되는건지 안 되는건지는 모르겠으나, 레이첼이 별 말 없던 것을 보면 괜찮을거라 생각했다.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만 하면 되는 건가요?"
"그래, 평소에도 가능하다면 마나와 계속해서 교감해야 된다. 또한 이 책들은 가져가서 무슨 마법이 있는지 살펴보고, 마나와 이에 대해 대화를 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레이첼이 한쪽에 쌓여 있는 책들에게 시선을 주며 말을 했고. 현성은 저것들을 들고 가야 된다는 생각에 점점 회복되던 기운이 쑥 빠졌다.
그런데 마법에 대해서 대화를 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니. 이런건 미리 말해줬다면 좋았을텐데.
뭔가 아쉽긴했지만 배우는 입장이니 싫은 소리는 할 수 없었다. 레이첼도 다 이유가 있겠지, 란 생각으로 넘기면 되는 일이었으니 말이다.
끄응- 현성은 고통스런 기합과 함께 후들후들 떨리는 무릎을 짚으며 몸을 일으켰고. 그와 동시에 뼈 마디마디에서 우드득 소리가 살벌하게 들려오며 뻐근한 통증이 올라왔다..
딱히 몸을 쓰지도 않았는데 왜 이러는 걸까.
"어우, 뭐 하지도 않았는데 몸이 왜 이러는 건지.."
현성은 나지막이 고통을 토로했고. 레이첼은 그런 현성의 등을 옆에서 주먹으로 두들기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점점 몸이 성장하는 거다. 아파도 참아라."
"몸이 성장해요..?"
이건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일까. 내 성장판이 닫힌지가 언제인데.
현성은 알 수 없는 레이첼의 말에 눈을 껌뻑이며 레이첼에게 해명을 요구했고. 레이첼은 별 것 아니라는 듯이 어깨를 으쓱였다.
"마나와 교감을 할수록 신체는 그에 비례해서 성장한다. 원리를 말하자면 복잡하니 그러려니 해라."
뭐... 원리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되게 좋은 현상이다. 매일 매일 이런 행위를 계속하면 별다른 운동 없이도 몸이 성장하는 건데 싫을 리가 없었다.
복잡한 것을 보면 현기증이 나는 병이 있기에 원리는 딱히 궁금해 하지 않았다.
그리고 현성은 문득 한가지 의문이 머릿속에 찾아왔고. 어느 때 처럼 그것을 입밖으로 내뱉었다.
"저 궁금한거 있어요. 요즘 뭘 안 먹어도 배가 고프다던가 허기가 진 느낌이 없는데 원래 이래요?"
"마나를 어느정도 다룰 줄 만 알아도 며칠을 굶어도 상관 없을 정도는 된다. 현성, 너 같은 경우는 적어도 일주일 정도는 아무것도 먹거나 마시지 않아도 버틸수 있을 거다."
와, 실로 엄청난 답변.
일주일을 안 먹고 안 마셔도 버틸 수 있다니.
333 법칙이라고 음식이라면 몰라도 인간은 물 없이는 3일이 최대라고 알고 있었는데, 이것은 가히 상식을 깨는 영역이었다.
좋은게 좋은거니 현성은 한껏 들떠서는 실실 웃었다.
"그런것들을 제외하고도 마나는 신체에 많은 변화를 가져다 주니까, 뭔가 위화감이 느겨지면 대충 마나 덕분이라고 생각하고 웃어 넘겨라. 일일히 설명해주기에는 복잡하니 말이다."
복잡해서 설명하기 귀찮다.
어찌보면 무책임한 말이었지만, 현성 또한 복잡한 것을 대함에 있어 머리가 새하얗게 변하니 레이첼을 이해했다.
"그러면 저는 슬슬 가볼께요."
어찌됐든 현성은 이쯤에서 레이첼과 헤어지기로 했고. 레이첼은 손을 저으며 가보라는 제스쳐와 함께 하품을 내뱉으며 집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현성은 바닥에 널부러진 책들을 쌓아서 안아들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저택 안으로 들어와 방에 도착한 현성은 책들을 침대 옆에 탁자에 올려놨고. 다시 방문을 열어 밖으로 나갔다.
목적지는 이로하가 있는 곳.
시간이 나면 만나로 가겠다고 약속했는데 어제는 바빠서 못 갔으니 오늘은 가야 됐다. 피곤한 감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약속한 것을 어쩌겠는가. 더군다나 무턱대고 뱉은 말에 대해 책임도 져야될테고.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현성은 발빠르게 자리를 옮겼고. 짧지 않은 시간에 걸쳐 이로하가 있는 집앞에 도착했다.
해는 어느샌가 빠르게 저물어 어둑어둑해진 상태, 현성은 문앞에 서서 잠깐 머뭇거렸다. 저번 처럼 덮쳐오지 않을 까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 쯤이면 약효가 떨어지지 않았을까, 란 생각에 덜컥- 문을 열었다.
그리고 안에서 펼쳐진 상황에 현성은 절로 쥐어진 주먹에 힘을 꽉 주고선 인상을 한껏 썻다.
"얌전히.. 얌전히 있으세요.. 다치고 싶지 않으면 말이죠."
그때 그 남자.
그 남자가 이로하의 옷을 험악하게 찢어발겨 버리고는 뭄위에 올라타 겁탈까지 시도하려는 현장이 드러났다.
역시, 그 때도 합의 하에 한 것이 아니라 강제로 했던 거였나.
다음으로 현성은 남자의 밑에 깔린 이로하의 상태를 재빨리 살피기 시작했다.
현재 이로하는 입에 재갈이 물린 상태, 있는 힘껏 반항하고 있던 흔적이 온몸에 남아 있었다. 다행히도 약효는 끝난 상태인 듯 했다.
그리고 현성은 그런 생각과 함께 다른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인기척을 크게 내며 남자의 뒤로 다가갔다.
이에 남자는 그제서야 뒤늦게 고개를 돌려 현성의 존재를 확인했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그러는거 아니야. 쓰레기 같은 새끼야."
그러고는 남자의 머리카락을 손에 쥐고선 이로하로 부터 멀리 끌고갔다.
남자는 당황하며 현성의 손목을 움켜잡고 때어보려 시도했지만, 현성의 악력을 풀어내지는 못 했다.
애초에 힘을 제대로 줄 수도 없는 자세에서 금방이라도 죽여버릴 듯이 강하게 준 힘을 풀 수 있을리 없었다.
우당탕, 현성이 남자를 한쪽 구석의 벽에 집어 던졌고. 남자는 볼품없이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바닥을 굴렀다.
어째서일까.
처음 봤을 때는 그토록 두려워했던 남자였는데 지금은 아무렇지 않았다.
심장도 이상하리만치 침착했다.
현성은 지금의 자신이 낯설었지만 고개를 저으며 잡념을 떨쳐냈다.
당장은 눈앞의 남자에게 집중해야 됐다.
"아아... 그때 그 돌연변이군요. 레이첼 님께서 제자로 거두셨다고는 들었는데.."
남자는 정신을 차리자 마자 몸을 일으키더니 시선을 이리저리 옮기며 현성의 몸 곳곳을 살폈다.
정말로 더럽고 불쾌한 시선, 현성은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왜요. 제가 레이첼 씨 제자가 된게 불만스러워요?"
적의를 그대로 들어내며 현성은 살벌하게 눈을 떴다.
그러자 안 그래도 험악한 편이었던 인상이 더욱 험악해져서는 분위기가 반전됐다.
"그래봐야 당신은 아직 돌연변이 신세, 나중에 어떻게 될 줄 아시고 기어 오르는 건가요?"
"그쪽이야 말로 제가 진짜 제자가 되면 어쩌려고 그러세요? 후회 안 할 자신 있나봐요?"
남자의 공격에 현성은 한치의 물러섬도 없이 대화를 통한 신경전을 이어나갔고. 현성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남자의 인중에서 변화가 일어났다.
아무래도 자신보다 아래라고 생각했던 존재에게 도발을 당한게 조금은 신경에 거슬렸나 보다.
"후우... 그때 그렇게 얌전히 짜져 있으라고 말했는데.. 이왕 이렇게 된거. 한판 뜨실레요? 저는 자신 있는데."
정정, 제대로 신경을 건드렸나 보다. 아인은 활짝 웃고 있었으나, 냉담해 보이는 것을 비롯해서 말투가 험해지는 것이 화가 난게 분명했다.
그리고 현성은 남자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남자 대 남자.
현성 또한 아인만큼은 아니지만, 어느정도 흥분한 상태였기에 제대로 된 판단이 가능한 상태는 아니였다.
그렇기에 현성은 싸움을 걸어오는 남자의 제안을 거부하지 않았다. 분명히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자신이 질게 뻔한데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