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43화 〉용사입니다. 엘프는 사랑에 빠졌습니다. (43/89)



〈 43화 〉용사입니다. 엘프는 사랑에 빠졌습니다.

어색한 공기, 가라앉은 분위기 속.

레이첼은 음란한 광경을 두 눈에 담아내며 순간 사고가 멈췄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잠시일 뿐, 레이첼은 본래의 목적을 깨닫고는 당당하게 에리엘과 현성에게 다가갔고. 에리엘을 손목을 잡고선 거칠게 바닥으로 끌어내렸다.


그러고는 슬쩍 냉담한 시선으로 에리엘을 내려다보며 무뚝뚝하게 입을 열었다.


"에리엘, 나중에 얘기한다."

차갑다.

에리엘은 자신을 쏘아보는 레이첼의 눈빛에 난생 처음으로 눈빛이 차갑게 느껴질 수 있다는 것을 느꼈고. 벗어던져놨던 옷을 다시 주워 입고는 알아서 구석으로 가 무릎을 꿇으며 몸을 사렸다.

그리고 레이첼은 현성의 상태를 살피고자 고개를 돌렸다.


레이첼의 시야에 들어온 현성은 바지가 벗겨진 상태로 하체에는 탁하고 끈적한 액체가 범벅이 되어 있었으며 애액에 절여진 성기를 그대로 노출하고 있었다. 그러나 레이첼은 현성의 성기를 두 눈으로 마주하고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엘프에게는 성욕도 정조관념도 없기에 이것이 평범한 반응이었다.

그저 에리엘은 두 눈에 마나를 담아 현성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 살폈고. 다행히도 멍이 든 부분이 있는 거만 빼면 크게 다친 부분은 없었기에 한시름을 놓으며 한숨을 내셧다.

그래도 하나 뿐인 제자가 험한 꼴을 당하고 돌아오니 마냥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듣기로는 범인은 에리엘의 손에 죽었다고는 했으나, 그것 또한 레이첼은 살짝 마음에 들지 않았다.


딱히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레이첼은 그저 살생이라는 행위를 꺼려할 뿐이었다. 다만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따질 마음은 없었다.


그렇기에 아인을 죽인 에리엘에게 감정을 가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아인의 일과는 별개로 다른 감정이 조금 전에 피어났다.

쿵-


레이첼은 침대에서 폴짝 뛰어 바닥에 착지했고. 에리엘을 향해 환히 웃으며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에리엘, 현성하고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지 솔직히 말해라."

이미 다 알면서도 본인의 입으로 직접 확인하기 위한 물음. 레이첼은 어린아이를 혼내 듯 타이르며 말을 건냈고. 에리엘이 고해성사 하기를 바랬다.

반면 에리엘은 어째서인지 말하기가 힘들었다.


"그... 그게.."


본래라면 아무렇지 않게 답했을 질문이었으나 막상 답을 하려고 하니 말이 목구멍에 틀어막혀서는 밖으로 나오지 않았고. 에리엘은 계속 '그게' 라는 말만 반복하며 안절부절 못 한  온몸을 베베 꼬았다.

상당히 소녀틱한 반응, 이것은 엘프라면 절대로 나올 수 없는 반응이었고. 레이첼은 솔직하게 말을 하지 못 하는 에리엘을 이해할  없다는 듯이 쳐다봤다.

현성과 섹스를 한 것이 분명한데  섹스를 했다고 솔직하게 말하지 못 하는걸까. 애초에 레이첼은 에리엘이 현성과 성적인 관계를 나누는 행위에 대해 딱히 뭐라 할 생각은 없었다.

현성에게만 에리엘과 성적인 관계를 맺지 말라고 말했을 뿐이었지, 에리엘에게까지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어차피 말해도  들어먹을게 분명한데 뭣 하러 말한단 말인가.


그렇기에 레이첼은 에리엘이 현성과 그렇고 그렇 관계, 즉 섹스를 하고자 하던 말던 신경을 쓰지 않을 생각이었다.

레이첼은 그저 현성이 알아서 철벽을 치기를 바라며 신경을 끄고 있었다.

다만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던 현성을 상대로 그런짓을 한 것에 대해 서는 신경을 크게 썼다, 그러나 에리엘이 저런 반응을 보이니 뭐라 말하기가 참으로 애매해졌다.


"왜 말하기를 머뭇 거리는 건가? 직접 본인 입으로 말해라. 섹스를 했다고."


한치의 부끄러움도 없이 레이첼은 당당하게 '섹스'라는 단어를 입에 담았고. 에리엘은 안 그래도 붉어진 얼굴을 더욱 새빨갛게 물들고는 부끄러움에 얼굴을 가렸다.


정말로 이상했다.


레이첼은 에리엘의 왜 저런 반응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평소의 에리엘이라면 당당하게 '섹스' 했다고 말하였을텐데 말이다.

무엇보다도 지금 에리엘이 보여주는 반응은 누가 봐도 '부끄러움' 이란 감정이었고. 이것은 보통의 엘프가 보일만한 감정이 아니었다.

또한 레이첼은 과거에 다른 종족과 자주 어울리던 적이 있었고. 그로인해 감정에 대하여 익히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느정도의 수치심이라던가 부끄러움에 대한 지식이 있었으나 에리엘은 그렇지 못 했다.

레이첼이 한창 다른 종족과 어울리며 용사들을 가르칠 당시, 에리엘은 정령과의 계약에만 몰두하던 시기였으니 말이다. 거기에 더해 레이첼이 알기로는 에리엘이 인간과 교류하는 경우는 가끔가다 취향의 남자를 데려다가 본인의 입맛에 맞게 괴롭혔을  뿐이었다.


그리고  뒤에는 언제나 밤마다 찾아와 그에 대한 감상을 뱉고는 했다.

 한 점의 부끄럼도 없이.

그런 성정의 에리엘이었는데, 지금은  부끄러워 한다는 말인가.

그러나 이러한 감정에 대해 혼란스러운 것은 레이첼 뿐만이 아니었다.

에리엘.

에리엘이야 말로 그 누구 보다도 이 감정에 대해 혼란스러워 하며 깊은 의문이 머릿속에 가득 들이찼다.


감정이란 것이 무색한 자신이었을텐데, 요즘들어 자꾸만 감정의 색이 짙어졌다.

그리고 그것은 현성과 관계를 맺고  후 부터였고. 현성이 곁에 있을 때는 감정이 더욱 생동감 있게 드러났다.

지금도 레이첼 어깨 너머로 넌지시 보이는 현성에게로 시선이 향했고. 자꾸만 가슴이 두근거리며 애가 타는 기분이 들었다.


"얼른 말해라, 에리엘. 색스했다고."

그런 에리엘의 마음속과는 달리, 레이첼은 어느샌가 가까이 다가와 어깨를 강하게 부여잡고선 연달아 말을 쏟아부으며 에리엘을 압박해왔고. 에리엘은 적극적인 레이첼의 행동에 어색하게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려 시선을 회피했다.

그러다 문득, 에리엘은 다시금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엘프에게 구전으로만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

운명적인 만남과 사랑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어쩌면 그것이 사실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분명 그토록 부정하며 스스로를 합리화했던 이야기였는데도 말이다. 그러나 그것 말고는 지금의 자신에 대해 설명할 것이 마땅히 없어 믿을 수 밖에 없었고. 부정할 수가 없었다.


조금 전에 현성과 관계를 나누기 전과 후에도 그러지 않았는가.

현성만 보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몸이 달아오르는데 이것을 뭐라 설명할 수 있을까.


그 이야기가 사실이라고 밖에 에리엘은 더 이상 생각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역시나 자신이 현성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에리엘은 쉽게 인정할 수가 없었다.

이것은 온전히 자존심의 문제, 자존심 하나만큼은 밑도 끝도 없이 높은 에리엘이었다. 엘프가 인간에게 사랑을 빠지다니, 그것만큼 볼품없는 일이 없을 거라 에리엘은 확신했다. 그러나 현성과 맺어지며 보였던 언행들을 생각하면 자존심은 이미  높은 하늘에 떠올라 승천했다고 볼 수 있었다.

으윽, 에리엘은 인정하기는 싫지만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이를 갈며 두 눈을 부들부들 떨었고. 레이첼은 시간이 지날수록 에리엘의 어깨를 잡은 손에 더욱 강하게 힘을 주며 방긋이 웃는 얼굴을 점점 가까이 해왔다.

이제는 솔직하게 말해야만 한다.


에리엘은 잘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간신히 벌렸고. 새침하게 고개를 돌린 상태로 입을 열었다.


"섹스...했어. 현성이랑.. 그것도 엄청 진하게.."

개미가 기어가는 듯, 무척이나 작은 목소리였으나. 에리엘은 분명하게 입밖으로 소리내어 말했고. 부끄러움에 두 주먹을 덜덜 떨릴 정도로 불끈 쥐고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채, 레이첼의 눈치만을 살폈다.


시큰둥한 반응, 레이첼은 에리엘의 고백에 시큰둥하게 무심한 얼굴을 하고선 단호하게 선분홍빛 입술을 움직였다.

"앞으로는 하지 마라."

하지 마라.

무엇을?

레이첼이 하지 말라고 한다면 그것 말고는 무엇이 있겠는가.


에리엘은 너무도 쉽게 무엇을 하지 말라는지   있었다.

섹스, 레이첼은 자신에게 섹스를 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으읏.. 왜..? 왜 하면 안 되는데..?"

에리엘은 눈썹을 축내리며 울상이 되어서는 젖은 목소리로 레이첼에게 간절히 그 이유를 물었다.


그러나 에리엘은 지금 자신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오직 레이첼만이 에리엘의 모습을  수 있었다.


그리고 레이첼의 눈에 비친 에리엘의 모습은 흡사 사랑에 빠진 소녀와도 같았다.

안 그래도 아까부터 현성 쪽으로 자꾸만 시선이 가는 것에 혹시나 했는데, 레이첼은 지금 에리엘의 모습을 통해 확신했다.

에리엘에게 변화가 찾아왔다는 것을.

다만 레이첼의 의지는 굳건했다.

레이첼은 에리엘이 현성과 그런 관계를 이어나가지 않았으면 했다. 레이첼은 자신의 절친한 친우였으며 현성은 소중한 제자였다.


그 둘이 그렇고 그렇 관계를 맺는 것은 아무리 레이첼이라도 마음속  구석이 불편한 것이었다. 또한 무엇보다도 레이첼이 그 둘이 관계를 맺는 것에 대해 불편한 이유가 따로 있었다.


"에리엘, 현성은  제자다. 내 제자를 너의 쾌락의 도구로 이용하지 마라."


쾌락.


에리엘은 남성을 성적으로 괴롭히며 쾌락을 얻는다는 것을 레이첼이 모를 리가 없었다. 다른 종족이 보기에는 변태나 다를  없었지만, 같은 엘프의 시선으로 본다면 그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마땅한 욕구라는 것 없이 살아가는 엘프에게 특정한 상황에서만 얻을 수 있는 쾌락이란 목숨 보다도 귀한 것이었다.


에리엘에게 남성이란 존재는 그저 쾌락의 도구였고. 그렇기에 에리엘이 현성과 관계를 맺는 것 또한 자신의 쾌락의 도구로 이용하는 거라 여겼다. 물론 마냥 그렇다고 하기에는 반응이 뭔가 이상하긴 했지만 말이다.


그리고 에리엘은 레이첼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를 알았다. 레이첼은 자신이 현성을 쓰다버릴 장난감 정도로 여기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에리엘은 그럴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이미 현성이 아니면 만족할 수 없는 몸이 되어버렸다.


또한 아직 확실하지도 않고 인정하기도 싫지만.

어쩌면 자신은 현성에게 사랑이란 감정을 느끼고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싫어.."

그렇기에 에리엘은 한층 더 붉어진 얼굴을 가리기 위해 고개를 아래로 떨구고는 미묘하게 고개를 저으며 레이첼의 말을 부정했고. 이에 대해 레이첼은 눈썹을 한데 모으며 눈매를 날카롭게 했다.

이는 현성을 계속해서 자신의 쾌락의 도구로 사용하겠다는 의미로 들렸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레이첼은 화를 내고자 하지 않았다. 그저 침착함을 유지하며 에리엘을 잘 타이르고자 했다.


"싫다..? 에리엘, 현성은  제자다. 내 제자는 너의 쾌락을 위한 도구가 아니란 말이다."

다시 한  똑같은 말을 되풀이 하며 에리엘에게 자신의 뜻을 전했다.


"싫어."

에리엘의 입에서도 조금 전과 똑같은 말이 튀어나왔고. 오히려 더욱 의지가 확고해졌다.

레이첼은 그런 에리엘이 마음에 들지 않았으며 답답하게만 느껴졌다.


무작정 싫다고 하면 어떡하란 말인가.  싫은 지에 대해 말을 해줘야 이해하고 대화를 할텐데.


"무작정 싫다고만 하지 말고  싫은지에 대해 말을 해줘야 내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니 이유를 말을 해라, 에리엘."

에리엘은 도도하게 팔짱을 끼고선 침착하게 대화를 하고자 했고. 에리엘은 레이첼이 이유에 대해 묻자 무릎에 고개를 파묻고 잔뜩 웅크리고선 어깨를 흠칫 떨었다.

이유.

왜인지 이유에 대해 말하기가 꺼려졌다.


레이첼이 자신의 감정을 이해해줄까, 라는 의문에서 시작된 거부감이었다.

그리고 레이첼은 몸을 떠는 에리엘을 보며 확실히 상태가 이상함을 확신했다.

평소였으면 절대로 보여주지 않았을 흔들리는 모습, 말하기 힘든 무언가가 있다.


레이첼은 그렇게 단정지으며 고슴도치 처럼 무뤂에 고개를 파묻은 에리엘을 꽉 껴안았다.


비록 레이첼은 에리엘 보다 키가 작았기에 온전히 에리엘을 품에 담지는 못 했으나, 에리엘은 그것만으로도 몸의 떨림이 멈췄다.


"나에게도 말하기 힘든건가, 에리엘?"


상냥한 목소리와 다정한 말투. 레이첼은 에리엘의 마음을 열고자 했고. 그것이 효과가 있었는지 에리엘은 슬쩍 고개를 들어 눈썹을 부르르 떨었다.

"그.. 그게.."


 다시 등장한 '그게' 라는 단어.


에리엘은 말하고자 하는 마음이 피어났으나, 아직까지는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현성과 그렇게도 섹스가 하고 싶은건가?"

"으읏..!"

레이첼의 입에서 '섹스'라는 단어가 나오자 에리엘은 다람쥐 마냥 심퉁하게 볼을 부풀렸고. 눈썹을 한데 모으며 레이첼에게 불만스런 감정을 담아 눈을 부라렸다.

아까부터 자꾸 섹스 섹스 거리는데 그럴 때 마다 현성이 떠올라 미칠것만 같았다.


반면 레이첼은 에리엘이 그런 눈빛을 이해할  없었다.


현성과 섹스를 하지 말라는 것에 싫다고 표현하여, 현성과 섹스가 그렇게도 하고 싶냐고 물은 것에 저렇게까지 반응할 일인가 싶었다.

"말해라 현성이랑 정사를 나누고 싶은건가?"

레이첼이 다시 한번 똑같은 말을 뱉었고. 이번에는 표현을 조금 순화 시켰다. 그리고 에리엘은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며 살짝 머뭇거리더니, 이내 철웅성 마냥 닫고만 있던 입을 드디어 열기 시작했다.

"나... 저 남자를 사랑하는 것 같에.. 어떡하지..?"


"...사랑?"

레이첼은 에리엘의 입에서  튀어나온 '사랑' 이란 단어에 집중했다.


사랑이란 단어가 뜻하는 바를 알고 있기는 했다. 문제는 그것을 엘프가 느꼈다는 것이 문제였고. 레이첼은 자신이 잘못들은게 아닌가 싶었다.

그도 그럴것이 엘프가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낄 수 있을 리가 없으니 말이다.

그러나 레이첼은 여태까지 에리엘이 보여준 모습들과  손으로 빨갛게 익어버린 얼굴을 가리고 있는 에리엘의 모습에서 거짓말이 아님을 알았다.

그리고 지금의 상황을 간단히 요약했다.

아, 자신의 절친한 친우가 자신의 소중한 제자에게 사랑에 빠졌구나.


레이첼은 다시금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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