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45화 〉용사입니다. 또 다른 용사는 마음이 아픕니다. (45/89)



〈 45화 〉용사입니다. 또 다른 용사는 마음이 아픕니다.

스윽- 레이첼은 현성의 검은 빛깔의 머리칼을 얇디 얇은 손가락으로 걱정스레 쓰러내렸다.


이틀.

현성은 이틀이 지나도록 깨어나지 못 하고 있었다.


왜일까.

레이첼은 간절한 심정으로  눈에 마나를 담아 현성의 몸을 다시  번 훑었다.

그러나 몇 번을 보고  봐도 현성의 몸은 멀쩡했다. 아니, 오히려 맨처음 의식을 잃고 이곳에 왔을 때 보다 건강했다.

몸 곳곳에 있던 멍자국은 사라진지 오래였고. 자잘한 상처 같은 것도 사라졌다.

곁에서 틈만나면 회복 마법을 걸어주었기에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그런데 도대체 왜 현성은 깨어나지 않는가.

레이첼은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이 조급해졌고. 이제는 이대로 영영 깨어나지 못 하는게 아닐까,  불안한 생각에 하루종일 불안감에 시달렸다.

"일어나란 말이다, 현성.."

닿지 않을 말을 간절히 내뱉었다. 하지만 그 말은 현성에게 닿을 리가 없었다. 의식이 없는 사람이 그 말을 듣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에리엘은 슬며시 현성의 손과 자신의 손을 겹치고선 꼭 붙잡았다. 부디 마음만이라도 닿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그리고 그 순간.

덜컥-

굳게 닫혀 있던 문이 느릿느릿하게 열리며 문틈사이로 에리엘이 슬쩍 모습을 드러냈고. 레이첼은 매섭게 눈을 부릅 뜨며 에리엘을 노려봤다.


"...한 번만 더 오면 그 때는 진심으로 혼내겠다고 말하지 않았나?"

어젯밤.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또 다시 현성을 덥치려고 방 안에 침입한 것을 아슬아슬하게 삽입 직전에 막았었고. 협박성이 짙은 경고와 함께 쫓아냈었는데 하룻밤만에 돌아온 것이었다.

저 음탕한 엘프를 어찌 해야될까. 레이첼은 자신의 친구이긴 했지만 에리엘에 대한 평가를 바닥 수준으로 내리며 속으로 고민했다.

끼익-


그런 경고에도 불구하고 에리엘은 묵묵히 문을 열고선 들어왔고. 뒤에선 느닷없이 이로하가 따라들어왔다.

저 여자는 누구인가. 레이첼은 이로하와 초면이었기에 누구인지 조차 몰랐고. 낯선 탓에 경계어린 시선을 이로하에게로 옮겼다.

그리고 이로하는 레이첼의 일방적이고 경계어린 시선에 곧바로 겁을 먹어서는 에리엘의 등뒤에 꼭 붙었고. 슬금슬금 눈을 슬쩍 내비쳐 레이첼을 살폈다.

예쁘고 귀엽다.


이로하가 레이첼을 보자마자 느낀 인상이였다. 어쩜 사람이 저렇게 피부가 새하얗고 비율이 좋을 수 있을까. 에리엘을 처음 봤을 때도 너무도 아름다운 외모에 넋을 놨었지만. 지금은 그것 보다도 더욱 심했다.

여자는 기본적으로 귀여운 것을 좋아한다. 그런데 귀엽고 예쁘기까지 하니 다소 충격을 먹을 수 밖에 없었다. 이로하는 당장이라도 레이첼에게 다가가 친해지고 싶은 욕구가 끌어올랐지만, 주변에서 풍겨져 나오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기에 얌전히 몸을 사렸다.

"그 여자는 또 누군가, 에리엘?"

어쩜 목소리도 저리 귀여울까.

이로하는 새삼스레 놀라며 레이첼을 마음 속에 담았다. 만약 본래 살던 세계인 일본에서 저런 사람이 주변에 있었다면 어떻게든 친해져서 곁에서 자꾸자꾸 끊임없이 이것저것 챙겨줬을 터였다.

"이로하라고. 현성이랑 같이 온 돌연변이. 이 아이가 현성이 걱정된다고 자꾸 졸라대는 바람에 귀찮아서 데리고 왔는데... 괜찮지?"

아, 그렇게 된건가. 레이첼은 에리엘의 소개와 사연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마나를 배척하는 제국이기에 돌연변이라 불리기는 하지만, 어찌됐든 용사다. 제국이 아닌 주변의 다른 왕국에 나타났다면 귀인 대접을 받을 존재들이었다. 또한 용사라는 존재들은 지구라는 곳에서 왔다는 것은 세간에 퍼진 기본적인 상식이었다.

그렇기에 이로하라는 아이에게 현성은 같은 세계에서 온 동족 같은 것일 터였다. 그만큼 유대감이 깊을 것이고 걱정스런 마음이 앞설 것이었다. 그리고 그 마음을 레이첼은 이해했다.

자신 또한 현성에게 그런 감정을 품었으니 말이다.


이걸로 레이첼은 이로하를 향한 경계어린 시선을 풀었고. 선뜻 다가가 먼저 손을 건냈다.

"반갑다. 나는 레이첼이라고 한다. 현성하고는 스승과 제자 사이이니 어색하게 대하지 않아도 된다."

레이첼은 본디 타인을 잘 받아들이는 성격이었고. 이것은 이로하에게로 곧이 곧대로 향했다. 더군다나 본래 엘프라면 다른 종족의 신체가 자신의 몸에 닿는 것을 극도록 싫어하는 편이었으나, 레이첼은 그러지 않았다. 오랜 시간 동안 용사들을 가르처 왔기에 자연스레 그런 가치관이 희미해져갔기 때문이었다.


"타치바나 이로하라고 해요.. 잘 부탁드려요.."

텁, 이로하는 아직까지 어색한 마음에 부자연스럽게 에리엘의 등뒤에서 나와 레이첼의 손을 맞잡았고. 곧바로 레이첼은 마주잡은 손을 흔들며 반가움을 표했다.

그렇게 레이첼은 대 여섯번 손을 흔들고는 자연스레 붙잡은 손을 이끌어 현성에게로 향했다.


"현성을 보고 싶다고 했으니 얼른 가서 보는거다."


"네!?"

이로하는 당황한 소리를 내며 다짜고짜 자신을 잡아당기는 힘을 따라 덩달아 발걸음을 옮겼고. 불과 몇 초만에 침대에 곤히 누워 있는 현성을 마주했다.

고요하게 누워 있는 현성이 눈에 들어오자 가슴이 철렁인다.


"현성은 그 날부터 계속 이렇게 의식을 잃고 누워있다."

의식을 잃었다는 말.


레이첼의 입에서 무뚝뚝하게 흘러나온 말에 이로하는 정신이 아찔해져 순간 다리를 비틀거렸다.

자신 때문에.


 역겨운 남자로 부터 자신을 구하기 위해 나섰다가 험한 짓을 당했다.


현성이 의식을 잃고 누워있다는 것은 브랜드로 부터 소식을 전해듣기는 했다. 하지만  때는 사람이 살해당하는 것을 봐버린 것에 충격을 받아 무감각한 상태였기에 현성의 소식에도 이로하는 정상적인 반응을 하지 못 했다.

그러나 지금, 브랜드의 설득에 이끌려 에리엘을 만나 이렇게 직접 와서 보니 감정이 추스려지지 않았고. 그와 동시에 온몸이 불타오르며 몸부림을 치던 현성의 모습이 뇌리에 스쳐 지나갔다.

"아으..."

얼마나 괴롭고 아팠을까.


그 고통을 생각하니 이로하는 몸 전체에 소름이 끼치며 부들부들 떨려왔고. 그와 함께 눈가가 점점 축축해지기 시작했다.


현성이 누구인가.


이로하에게 현성이란 낯선 세상에서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다.


약에 취해 발정이  자신을 범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옷을 입혀준 고맙고도 믿음직한 사람.

백번 천번 고맙다고 말해도 모자를 사람이 자신 때문에 다쳤다는 그 사실이 이로하는 무척이나 괴로웠다. 차라리 그 고통을 자신이 대신 받았으면 했다. 그러나 이미 벌어진 일, 그런 소원이 이루어질 리가 없었고. 이로하는 서글픈 마음에 훌쩍이며 끙끙 앓은 소리를 내다가 급기야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흐으.. 죄..죄송해요,  때문에.. 히잉.."

이로하는 주체없이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한껏 젖은 목소리로 현성에게 들리지 않을 말을 뱉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물이 뺨을 타고 흐르며 침대보를 적셨다.


그리고 이로하가 갑자기 울음을 터트리자 레이첼은 자신이 뭔가 잘못된 짓을 했나 당황하며 허둥지둥 등을 토닥였다.

그러나 이로하는 그런 레이첼의 손길이 무색하게 느닷없이 침대 위로 올라가 현성을 덮쳤다. 이에 레이첼이 깜짝 놀라 손을 뻗어 막으려고 했으나, 이로하는 그것 마저도 뿌리치고선 순식간에 현성을 껴안았다.

그러고는 현성의 옆에 눕다 싶이 몸을 낮추며 가슴 부근에 얼굴을 가져다댔고. 어깨를 들썩이며 장맛비 같은 울음을 계속 이어나갔다.

"흐윽... 제가 잘못 했으니까.. 히끅.. 일어나요, 얼른..!"


참담한 상황, 모르는 이가 본다면 누가 죽었나 싶을 정도로 이로하는 오열했고.  모습을 지켜봐야만 하는 레이첼과 에리엘은 서로 눈을 마주치며 뻘쭘함에 어색하게 눈꼬리를 떨었다.


그렇게 눈치를 보다가, 보다 못한 레이첼이 이로하를 따라 침대 위로 올라가 이로하의 등위에 조심스레 손을 얹으며 말을 걸었다.

"저..기 일단 진정.."


"진정 못해요..! 현성 씨가 저 때문에 이러고 있는데 어떻게 진정해요?!"


"히끅-!"


감정이 극에 달해 흥분했는지, 이로하는 거칠게 고개를 돌려 레이첼에게 큰소리로 반문했고. 레이첼은 그저 진정시키고자 했을 뿐이었는데 큰소리가 돌아오니 당황스러움에 딸꾹질이 튀어나왔다.

"아니.. 저..그.."

레이첼은 괜히 기가 죽어서 말도 제대로 못 뱉고선 퉁명스레 입술을 삐죽였다.


그래, 차라리 마음껏 울게 놔두자. 레이첼은 쓰게 당하고 나서야, 괜히 진정 시키기 보다는 울다 지쳐 쓰러질 때까지 냅두기로 정했다. 물론 화가날 법도 했으나, 레이첼은 울며불며 매달리는 모습이 안타까워 전혀 내색하지 않고 넓은 마음으로 이해했다.

또한 인간이란 감정 앞에선 이성이 흐릿해지는 생명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도 있었다.

레이첼은 그렇게 결론을 짓고선 이로하를 뒤로하고 얌전히 침대에서 내려왔고. 무심하게 뒤도 돌아보지 않은  에리엘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에리엘이 무슨 일이냐는  시선을 돌렸지만, 레이첼은 단순히 방긋 웃는 것으로 대답하고선 에리엘을 질질 끌며 복도로 나가기 시작했다.


자고로 감정을 추스리기 위해선 혼자 생각하게 두는 것이 정석이라고 들었다. 레이첼은 옛날에 누군가에게 들었던 말을 떠올렸고. 에리엘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뚫어져라 바라봤으나 그 시선을 꿋꿋히 무시하고선 복도로 나왔다.

그러고는 만약 안에서 무슨 일이 생길 수도 있으니, 언제라도 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대기하며 울음 소리가 멈추길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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