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46화 〉용사입니다. 기사는 배신을 합니다. (46/89)



〈 46화 〉용사입니다. 기사는 배신을 합니다.

 다시 이틀.


그 시간이 지나도록 현성은 아직까지도 의식을 되찾지 못 했고. 레이첼은 점점 상황이 잘못 흘러가고 있음을 느꼈다. 그리고 그렇게 느끼고 있는 것은 레이첼 뿐만이 아니었다.

"어떻게 할건데?"


이제는 자연스레 레이첼의 옆에 따로 의자를 가져와 앉아 있던 에리엘이 과일 하나를 집어들며 물었고. 레이첼은 급속도로 술이 땡겨왔다. 그동안 필사적으로 참아왔는데 머리가 복잡해지면서 도저히 술을 마시지 않고는 못 버틸 것 같았다.


본래 계획대로라면 일주일에 걸쳐 현성에게 마나를 실전에서 활용하는 것 까지 가르쳐줄 생각이었다. 현성이 가진 재능을 생각해보면 일주일 정도면 충분하다 생각했고. 설령 자신이 잘못 된다고 하여도 그 정도만 가르쳐 놔도 어디가서 객사는 하지 않을테니 말이다.

그런데 현성이 사흘이라는 시간 동안 의식을 잃은 상태에 빠져있는 바람에 모든 계획이 엇나갔다.

더군다나 문제가 하나  추가됐다.

"정말로 어떻게 할겁니까? 제국 측에 말도 없이 그런 선택을 하면 제 입장도 곤란해지는데요."


브랜드.

제국의 기사, 붉은 머리카락의 브랜드가  사건에 대해 조사하면서 더욱 복잡해졌다.


브랜드에게 현성과 자신의 관계를 들킨데다가, 제국의 황제를 만나 설득하겠다는 얘기도 들켜버렸고. 당연히 브랜드가 그런 얘기를 곱게 받아들일 리가 없었다.

애초에 레이첼은 개인적인 감정으로 깊게 생각하지 않고 제자로 들이기로  것이었으며. 실피드와 대화를 하러 간다는 것 또한 일방적으로 찾아간다 정한 것이었지 제국과는 전혀 합의된 내용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제국의 인물인 브랜드의 입장에서는 곤란할 수 밖에 없었다.

그 이유로는 돌연변이는 돌연변이 숲에 보낸다, 이것이 기본적으로 돌연변이 왕과 협의된 내용이었고. 그런데 레이첼의 하려는 행동은 그 기본적인 부분을 멋대로 어기는 행위였다.

또한 설령 제국의 황제인 실피드가 그것을 허락한들 넘어야 될 산은 하나 더 존재했다. 제국 보다도 더 거대한 산이 말이다.


브랜드는 못 마땅하게 벽에 등을 기대며 레이첼의 대답을 기다렸다.


"일단 미리 정해놓은 대로 진행하긴 할거다. 다만 현성이 이대로 의식을 못 찾는다면,  방법을 찾아내야 되겠지만 말이다."


일단 레이첼은 계획대로 실피드를 만날 생각이었다. 현성이 의식을 잃은 상태라고는 하나, 건강이나 생명이 위험한 것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실피드를 설득함으로써 확실한 안전을 보장 받고, 그때가 되어서 현성의 의식을 되찾을 방법을 찾는게 맞았다.


다만 브랜드는 레이첼의 대답을 듣자 마자 '역시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돌연변이에 관한 규율의 주도권은 돌연변이 숲에 살고 있는 돌연변이 왕이라는 괴물에게 있는 것이었지, 제국에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 레이첼은 돌연변이 왕을 완전히 배제하고 행동하려 하고 있었다.

"좋습니다. 폐하를 만나 현성을 제자로 들이는 것을 허락 받는다고 칩시다. 그렇다면 돌연변이 왕은 어떻게 할겁니까? 어찌됐건 현성은 돌연변이, 협의된 내용에 따라 돌연변이 숲으로 보내야 한다는 말입니다."


브랜드는 논리정연하게 레이첼의 계획에 빈틈을 건드렸고. 이것은 레이첼의 정곡을 찔렀다. 확실히 돌연변이 왕은 절대 무시할  없는 존재, 하지만 레이첼도 따로 생각해둔 것이 있었기에 주저없이 반문했다.


"돌연변이 왕은 못 된 성정이 아니다. 그러니 대화를 요청하면 받아들여 줄터, 실피드를 설득하면 곧바로 찾아가 대화를 해 볼 생각이다. 애초에 돌연변이 왕이 협약을 맺은 이유 또한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니 말이다. 왠만하면 허락해줄 거라고 생각한다."


돌연변이 왕, 레이첼은 그를 직접 만나본 적이 있었다. 제국의 극심한 마나 배척 정책에 반하여 그 누구 보다 빠르게 힘을 모아 협약을 맺은 대마법사들 중의 한 명이었으니 말이다. 물론 레이첼은 실피드의 배신으로 영역 안에서 폐인 같이 살고 있었기에  때 당시에 만난 것은 아니었다. 그저 그보다 더 전에, 대마법사 집회에서 만나 잠깐 대화를 나눴을 뿐이었다. 그리고  때 당시의 기억으로 돌연변이 왕의 성격이 폭력적이지 않았던 걸로 기억했다.


또한 굳이 이런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니더라도. 기본적으로 마나는 악한 심성을 가진 이에게 힘을 빌려주지 않는다. 그렇기에 레이첼은 돌연변이 왕이 자신의 부탁을 들어줄 것이라 확신하다 싶이 했다.


"결국에는 이상론일 뿐이군요."


브랜드가 레이첼의 반박을 들으며 결론을 지었다.


이상론. 브랜드가 듣기엔 레이첼의 말은 그저 모든 일이  잘될 것이라는 확신에 가득 찬 이상론에 불과했다. 솔직히 말해서 브랜드는 실피드가 레이첼의 부탁을 들어줄거라 생각치 않았다.


카인드니안 제국의 황제, 실피드는 마나를 극심하게 싫어하는 마나 혐오주의자였으니 말이다. 더군다나 실피드가 스승인 레이첼을 배신하고 제국을 세워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는 것은 역사서에는 적혀 있지 않았지만, 거의 모든 제국민들이 익히 알고 있을 정도로 유명한 일화였고. 스승을 배신한 실피드가 자신을 찾아온 스승의 부탁을 들어 줄지에 대한 대답은 처음부터 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나도 안다. 그래서 지금부터 만에하나 잘못됐을 경우에 대비할 생각이다."


"휘유, 그거 제 앞에서 말해도 되는 겁니까?"

짝짝-

브랜드는 레이첼의 솔직한 발언에 휘파람을 불며 박수를 쳤다.

그도 그럴것이 브랜드는 제국의 편, 그런 브랜드의 앞에서 대놓고 만약을 대비한다고 말하는 것은 적 진영에 계획을 말해주는 것과 다를 바 없는 행위였다.

하지만 브랜드는 그것을 제국에 보고할 생각이 없었다.

브랜드도 결국엔 사람, 기사가 되고 몇  동안을 돌연변이들의 안내자 역할을 맡으면서 엘프의 영역을 드나들며 이곳의 엘프들에게 적잖게 정이 들은 상태였다. 그렇기 때문에 왠만하면 이들과 이들이 머무는 공간이 평화롭게 이어지기를 바랬다.

또한 제국에 보고하려고 한다 해도 브랜드가 무사히 제국의 수도에 도착할 확률은 0에 수렴 했다. 눈앞의 존재들이 대마법사에 고위급 정령술사인데 어떻게 이들을 뚫고 수도로 갈 수 있다는 말인가.

브랜드는 이런 일에 목숨을 버릴 정도로 제국에 엄청난 충섬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더군다나 브랜드는 가끔식 돌연변이의 취급에 대하여 괴리감을 느껴 왔었다.

그리고 이번 기회에 브랜드는 오랜 시간 동안 느껴왔던  괴리감들을 머릿속에서 차근차근 정리하기 시작했다.



일단 제국에도 용사가 있다. 제국이 가진 용사의 수는 다른 왕국에 소속된 용사의 수를  합친 것 보다도 많았으며. 그렇기에 브랜드는 용사들과도 어느정도 친분이 있었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돌연변이라 칭해지는 이들 또한 그들과 마찬가지로 똑같이 신의 안내를 받아 넘어온 용사임이 분명했다.


그런데 제국은 그들을 핍박한다. 다른 왕국에서는 엄연히 용사라 불리우는 이들인데도 말이다.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단순히 제국의 황제 실피드가 마나 혐오자이기 때문이었고. 이는 모든 제국민들이 알고 있으며 모르면 간첩일 수준으로 기본적인 상식이었다.


그러한 이유로 그들은 용사의 자격으로 이 세상에 등장하자 마자 돌연변이라 불리우며 짐승만도 취급을 받으면서 돌연변이 숲으로 추방 당한다. 절대로 그들이 범죄를 저지르거나 악행을 일삼은게 아니었다.

그들은 이 세상을 구원하러 온 존재들.

헌데 제국은 그들을 오랜 기간 동안 배척을 해왔다.


이유 같지 않은 이유를 대면서 말이다.


이런 식으로 괴리감을 따라 천천히 생각해보니 브랜드는 무언가 확실히 잘못됐음을 느꼈다.

자신이 기사가 된 이유가 무엇이던가.


브랜드는 언제부터인가 잊어버렸던 어린날의 다짐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일단은 위대한 제국에 목숨을 바쳐 충성하겠다는 그런 고지식하고 고리타분한 이유는 아니었다. 애초에 브랜드는 제국에 대한 충성심이 원래부터 깊은 인간이 아니라, 그저 '기사'라는 직업을 가졌기에 제국을 중심으로 사고를 해왔던 것 뿐이었다.

본래의 자신은 그런 답답한 인간이 아닌, 어느정도의 유도리를 가졌으며 상황에 따라 참작할 줄 아는 인간이다. 브랜드는 본래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며 정의했고. 흐릿한 기억을 따라 생각을 전환했다.


이윽고 브랜드는 떠올려냈다.

자신이 기사가 되고자 했던 이유를.


생각해보니 무슨 거창하고 구체적인 이유가 아니었다.


그저 기사가 되어 이름을 떨치고 싶다는 어린 아이 특유의 순수함에서 우러나온 다짐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 아이가 시간이 흘러 결국에는 이렇게 기사가 되었다.

그런데 하는 일이라고는 돌연변이라 불리우는 이들을 안내하는 역할에 불과했다.


브랜드는 자신이 이러려고 기사가 되었나 자괴감이 들어 마음속 한켠이 괴로웠다.

자신은 결코 누군가의 혐오에 이용되고자 기사가 된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브랜드는 새로운 다짐을 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평생을 이짓거리나 하다 죽을게 분명하다. 지금부터라도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하거나 위대한 업적을 남기고 싶었다.

그러니 지금부터는 제국이고 기사고 뭐고 간에 때려 치우겠다고 말이다.

"그 계획이 뭡니까? 갑자기 돕고 싶은 기분이 팍팍 들어서요."


약간의 일탈 수준이 아닌, 분명한 배신.

브랜드는 자신의 붉은 머리칼을 어루만지며 은근슬쩍 레이첼의 계획에 합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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