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화 〉용사입니다. 어딘지 모르는 곳에서 잠깐 기억을 잃었습니다.
어둑한 밤.
휘잉-
드넓은 평야에 찬 바람이 주변을 거세게 불어오고. 시린 바람이 피부를 자극함에 현성은 추위에 몸을 부스스 떨며 눈을 떳다.
"...여긴 어디야?"
여기는 어디인가. 현성은 멍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그러나 주위에 빼곡히 찬 갈대에 시야가 트이지 않았고. 땅을 짚고 몸을 일으키고 나서야 주변의 시야가 들어왔다.
그리고 현성은 머리 위로 물음표를 띄우며 고개를 연신 갸웃거렸다. 잠깐 잠에 들었다가 깨어난 것 같은데, 도대체 끝이 어디인지 모르겠을 정도로 광활한 평야가 눈앞에 펼쳐져 있는 상황이라면 놀라지 않을 수가 없을 터였다.
스윽, 스윽-
일단 현성은 찬바람이 맨살을 스쳐지나가 감각이 마비될 듯 했기에 바람을 피할 곳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고. 그렇게 허리춤 까지 올라온 갈대를 뚫고 서서히 걸음을 옮겼다.
다만 주변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평야와 갈대 밖에 없는데 과연 바람을 피할 곳이 있긴 한가에 대한 의문이 들었으나, 적어도 몸을 움직이면 열기가 서서히 오를테니 현성은 무작정 다리를 움직였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이 꿈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런데 뭔가 많은 것을 잊어버린 듯한 느낌이 물씬 올라온다. 내가 무엇을 잊어버린 거지?
그런 생각이 문득 듬에 무엇을 잊어버린 것인지 떠올리려는 순간, 갑자기 머리를 망치로 얻어 맞은 듯 찡한 두통이 찾아왔고. 현성은 이마를 손바닥으로 지그시 누르며 두 눈을 감았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고 속이 울렁거리니 도저히 제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아무런 징조도 없이 나타난 고통은 몇 분 동안이나 이어지고 나서야 멈췄고. 고통이 가심에 현성은 꽉 감았던 눈을 떠, 고개를 양 옆으로 강하게 저으며 정신을 차렸다.
이제 좀 살 것 같다.
현성은 갑작스레 찾아온 고통이 사라지자 숨통이 탁 트임에 개운함까지 느꼈고. 왜인지 이상한 괴리감이 주변을 맴도는 듯 했다.
그러고 보니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더라?
...
잊어버린걸 보면 딱히 중요한 것은 아닌 것 같았기에 현성은 신경을 끄고선 묵묵히 걸음을 옮겼고. 그러던 도중에 어느샌가 찬바람이 그쳤다.
"아..."
찬바람이 멈추자 현성도 덩달아 걸음을 멈췄고.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 보며 얼빠진 소리와 함께 멀뚱멀뚱 눈을 깜박였다.
그래서 이곳은 도대체 어디란 말인가.
스스로에게 의문을 던졌으나 아무것도 모르는데 알 리가 없다. 그렇다고 다른 누군가에게 묻기에는 이곳을 지나가는 사람 조차 없을 듯 했다.
그런데 아무렴 어떤가. 현성은 속편한 마음을 가지고 별다른 목적 없이 잰걸음으로 걸었고. 사르륵, 갈대와 몸이 부딪히거나 스치는 소리만이 주변을 채웠다.
그렇게 현성은 무념무상, 아무런 생각없이 무대뽀 마인드로 오로지 직진만을 고수했고. 그러다 문득, 저 멀리 커다란 바위가 현성의 눈에 띄였다.
들판 한 가운데에 있는 바위라니, 뭔가 이상하긴 했으나 현성은 그곳을 목적지로 삼아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걸음을 옮겼고. 거리가 좁혀지니 단순히 바위 뿐만 아니라, 그 위에 올라선 사람의 형상도 눈에 들어왔다.
사람.
사람이다.
사람이라고는 찾을 수 없을 것 같던 곳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우연찮게 사람을 발견하니 현성의 무감각해진 마음에 생기가 돋았다.
현성은 사람을 발견하자 마자 그것이 누가 됐던 상관없다는 듯이 걷지 않고 달리기 시작했고. 그와 동시에 힘차게 손을 흔들며 큰소리를 내질렀다.
"저기요!!!"
침묵이 내려앉은 들판에 현성의 목소리가 드넓게 울려퍼졌고. 현성은 저 멀리 보이는 사람이 자신을 바라보는 모습이 보이자 더욱 힘껏 소리를 내지르며 손을 흔들었다.
"물어볼게 있는데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허억- 허억-
호흡이 격하게 가빠질 정도로 현성은 속도를 높혔고. 현성의 눈에 비친 사람은 망부석이라도 되는 것 마냥 그 자리에서 그대로 현성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현성은 먼 거리를 단숨에 뛴 결과, 드디어 멀리서 보았던 사람을 가까이서 마주하게 되었고. 가파른 숨을 내쉬는 현성의 시야에 구릿빛 피부와 진한 붉은색의 머리칼을 레게 음악을 하는 사람 처럼 묶은 여자가 들어왔다.
다만 옷차림이 상당히 개방적이었기에 현성은 슬쩍 시선을 돌렸고. 그런데 왜인지 낯설지가 않았다. 이에 현성은 이상함을 느꼈지만. 아무튼간에 이런 들판 한복판에 여자가 있음에 놀라면서 설령 나쁜 의도로 오해할까 싶어 멀찍이서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죄송한데 뭐 좀 여쭈어 봐도 될까요?"
현성의 물음, 하지만 여자는 아무 말 없이 음흉하게 입꼬리를 올렸고. 그윽하게 현성을 바라보면서 유혹하듯 깊게 파인 가슴골을 적나라하게 보이며 거리를 좁혀왔다.
"저.. 저기?"
당혹스러움에 뒷걸음질을 치며 현성이 여자를 불렀으나, 결국 여자는 현성의 코앞까지 다가와 몸을 바짝 붙이고는 등뒤로 팔을 감아 꽉 껴안았고.
핥짝-
갑작스레 입술을 들이밀며 혀를 내밀어 현성의 뺨을 야릇하게 핥았다.
"으으.."
현성은 얼굴을 스치듯 훑고 지나간 촉촉한 감촉에 질겁해서는 고개를 뒤로 빼며 싫은 소리를 냈고. 여자는 장난기 짙은 얼굴을 하고선 고개를 뒤로 뺀 현성의 귓볼에다 입술을 가까이 하고선 뜨거운 숨결을 뱉었다.
이에 현성은 역시나 부끄러움에 얼굴이 화악 붉어졌고. 여자는 현성의 반응이 재밌다는 듯 날카로운 눈꼬리를 내리며 눈웃음을 지었다.
"역시나 쑥맥이구나. 흐흐..."
엄연한 성희롱.
여자는 흔히 볼 수 없는 미녀였지만, 현성은 미녀가 들이댄다고 해서 헤프게 받아들이는 성격이 아니었다. 또한 한국에서는 이런 식으로 접근했다가 엿을 맥이는 경우도 적지 않게 있었기에 마냥 좋아할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현성은 좋다고 홀라당 넘어가지 않았고. 몸을 바짝 붙인 여자의 어깨를 붙잡고선 살며시 밀어내고는 불쾌감을 드러냈다.
"누구신데 저한테 이러세요..?"
다만 여자의 페이스에 말려 혼란스러운 상태였기에 목소리를 높이지는 못 했다.
더군다나 여자는 은근히 힘이 샜다. 어깨를 잡고 밀어내려고 해도 꿈쩍도 하지 않으니 말이다. 겉으로 드러난 근육질의 몸매를 보면 조금은 이해가 가긴 했으나, 그래도 건장한 체격의 남성을 상대로 밀리지 않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현성은 몸을 전투적으로 밀착해오는 여자에게서 더욱 이상한 감정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대놓고 불쾌한 감정을 표현하니 여자는 아쉽다는 듯 혀로 입술을 핥고선 뒤로 물러났고. 그러고는 주저없이 땅바닥에 엉덩이를 붙혀앉고선 고개를 치겨들어 현성을 보며 입을 열었다.
"현성, 그런데 여기는 어떻게 들어온건가?"
"...네?"
여자의 말을 듣자 마자 현성은 저도 모르게 반문이 튀어나왔다.
이 여자는 자신의 이름을 어떻게 안건가. 또한 들어왔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
현성은 또 다시 머리가 지끈거림과 동시에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뭔가를.
뭔가를 아주 많이 잊어버린 듯한 느낌.
이윽고 현성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선 머리를 땅에 박았고. 눈앞이 핑핑 도는 듯한 감각에 구토감이 목구멍을 타고 올라왔다.
"아... 대충 무슨 상황인 지는 알겠네."
반면 여자는 상황을 대략적으로 나마 이해하며 현성을 향해 안쓰러운 눈빛을 보내며 등을 토닥였다. 그러나 현성은 그것을 느끼지 못 할 정도로 두통과 울렁거림에 시달리고 있었고. 여자는 현성의 턱을 손가락으로 어루만지며 고개를 반강제로 들게 만들고는 눈의 높이를 맞춰 마주보며 입을 열었다.
"내 이름은 적색 바람의 환생. 기억나지 않는가, 현성?"
적색 바람의 환생.
여자가 이름을 밝혔으나 현성은 그것을 들을 수 없었고. 그저 영혼이 없는 멍한 눈으로 시선을 마주할 뿐이었다.
"심호흡을 해라. 그리고 떠올려 내라. 너는 아주 많은걸 잊어버린 상태다."
조금씩.
아주 조금.
현성은 여자의 말에 점차 머릿속이 진정되는 듯 했다.
옆에서 붙잡아줘서 그런 것일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현성은 여전히 무엇을 잊어버린 것인지 떠오르지 않았다.
다만 많은 것을 잊어버린 상태라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이상하게도 이곳에 눈을 뜨기 전은 물론 그 전에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조금도 기억나지 않으니 말이다.
기억을 차츰 되돌려 보니 공사장에서 일하던 것을 끝으로 기억이 끊겼다.
그리고 그 후로 많은 일이 있었던 것은 분명한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현성은 점차 머릿속이 복잡해져감에 두 손으로 얼굴을 쓰러내리며 인상을 썻다.
기억이 날 듯 하면서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이윽고 현성은 억지로 기억을 떠올리려는 것을 멈추고 지끈거리는 머리와 울렁거리는 속을 달래며 눈앞의 여자를 바라봤다.
이 여자도 분명 어디서 본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날 봐라, 현성.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는가?"
이 여자가 말하는걸 보면은 확실했다. 그런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뒤죽박죽이 된 몸상태에 답답함이 추가됐고. 현성은 여자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수없이 되새김질을 했다.
이번에도 기억이 날 듯 하면서도 나지 않음에 현성은 답답함의 한숨을 내쉬었고. 여자는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나는 들판의 바람, 적색 바람의 환생이다."
들판의 바람, 적색 바람의 환생.
뭔가 되게 아메리카 원주민 식의 이름 같았다. 외모도 은근히 그쪽 계열 같기도 했고. 또한 이름이 터무니 없이 긴 것이 김수한무두루미와거북이..가..?
어라?
왜인지 전에도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은데....
"으으.."
현성은 데자뷰 같이 뇌리에 무언가 스쳐감에 또 다시 머리가 지끈거리는게 심해져 앓는 소리를 냈고. 적색 바람의 환생은 그럼에도 현성의 시선을 자신에게로 계속 향하게 하며 말을 이었다.
"너는 나를 잊었는가? 또한 그대의 스승과 연인 마저 잊어버렸는가?"
...
스승하고 연인...?
아, 잠깐만.
무언가 점점 떠오른다.
"레이첼과 에리엘을 떠올려내라, 현성. 그리고 그대가 용사이며 우리의 동료임을 기억해내라."
레이첼 그리고 에리엘.
두 명의 엘프.
엘프의 영역.
돌연변이.
마나.
...
"아...!?"
기억이 돌아왔다.
모든 기억이 다시 돌아왔다.
현성은 적색 바람의 환생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입을 크게 벌려 놀라움을 표했고. 적색 바람의 환생은 기억이 돌아왔다는 듯 반응을 보이는 현성을 강하게 끌어안으며 몸을 밀착시켰다.
이에 현성은 적색 바람의 환생의 툭 튀어나온 신체 부위가 몸에 닿음에 부끄러워 밀어내고자 했지만, 적색 바람의 환생이 뺨에 머리를 비벼오는 것에 어쩔 도리 없이 그것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여기서 한가지 의문.
이곳은 도대체 어디란 말인가.
현성은 적색 바람의 환생이 가린 시야 너머로 보이는 갈대 천지의 광활한 들판을 보며 막막한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