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화 〉용사입니다. 엘프는 떠납니다.
스윽-
계획을 실행하기로한 날의 새벽.
레이첼은 모든 준비를 마치고 떠나기 직전, 마지막으로 현성의 방에 들려 곤히 누워있는 현성의 얼굴을 쓰러내렸다.
결국에는 이 순간까지도 깨어나지 못 하는구나. 언제쯤이면 깨어날 수 있는걸까? 몇 년을 이상태로 있는 것은 아니겠지?
비록 만난지는 얼마되지 않았지만 레이첼은 현성을 진심으로 걱정했고. 자신의 모든것을 쏟아부을 각오가 되어 있었다.
굳이 스승과 제자라는 관계가 아니더라도, 현성의 재능은 절대로 돌연변이라는 이유로 탄압되어서는 안 됐다. 그렇기에 레이첼은 실피드를 만나 설득하고자 했다. 어쩌면 다시 못 돌아올 수도 있는 선택일 수도 있겠지만, 현성과 이 세계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또한 혹시나 돌아오지 못 할 경우에도 대비하여 계획을 세워놨으니 모든것이 괜찮을거라 믿었다.
그 순간
덜컥-
"이제 출발하려고?"
방문을 열고 들어온 에리엘이 현성의 옆에 서있던 레이첼을 발견하고선 말을 걸어왔고. 레이첼은 현성을 만지던 손을 거두고는 등을 돌려 에리엘을 마주했다.
"이미 모든 준비는 끝난 상태니 말이다."
더 이상 미룰 이유는 없다.
옛날만큼은 아니지만 마나와의 교감 상태도 다시 회복했고.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한 마법진도 미리 준비해놨다.
이제 남은 것은 제자였던 실피드를 만나 허락을 받는 것. 그런 다음에는 돌연변이 왕을 만나 설득하는 것.
그 두 과정만 해내면 현성을 정식으로 자신의 제자로 들일 수 있었고. 레이첼은 어서 빨리 모든 일을 끝마치고 현성을 깨울 방법을 찾고 싶다.
그렇기에 레이첼은 서서히 마나를 끌어올리기 시작했고. 그러자 연두색의 마나가 슬며시 튀어나와 그녀의 주변을 맴돌며 온몸을 감쌌다.
이제는 정말로 떠날 시간.
레이첼은 자신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어루만지며 마지막으로 자신을 멍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에리엘의 두 눈을 마주했고. 에리엘은 이상하게도 두 눈에 눈물이 맺힌 상태였다.
보통의 엘프라면 나오지 않을 눈물이 말이다.
하지만 레이첼은 그런 모습에서 괴리감 같은 것을 느끼지 않았다.
에리엘이 현성을 사랑하게 된 것 같다고 밝힌 후로부터, 에리엘에게 감정이란 것이 점점 싹을 피웠으니 말이다.
엘프들 사이에서 구전으로만 내려오던 것이 정말 사실이었다니.
처음에는 이게 말이 되나 싶었지만, 눈앞에서 산증인이 있는데 부정할 수는 없는 법이었고. 오히려 레이첼은 다행이라 여겼다. 다만 그 대상이 자신의 제자라는 것이 살짝 불만스럽긴 했지만 그정도는 넓은 아량으로 넘어가줄 수 있었다.
평생에 한 명 뿐인데, 아무리 친구라 하여도 마음대로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돌아올거지, 레이첼?"
눈물을 한껏 머금은 목소리로 에리엘이 두 눈을 적시며 넌지시 말을 건냈다.
레이첼은 그 모습을 보며 가슴 한켠이 찡한 느낌이 들었지만, 무를 수는 없는법. 그녀는 차분한 미소와 함께 살며시 고개를 저었다.
"운명이 닿는다면 만나게 될거다."
운명이 닿는다면.
애매모호한 대답이었지만, 레이첼로써는 최선이 대답이었다.
괜히 돌아오겠다는 확답을 전했다가는 나중에 못 돌아오게 됐을 경우 큰 상처를 받을거란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에리엘은 빈말이라도 반드시 돌아오리란 말을 해주길 바렜다. 또한 너무도 덤덤하게 말을 건내는 레이첼이 미웠다.
그러나 그것이 엘프였다.
세상 그 무엇보다도 아름다운 외모를 가졌지만, 그 속은 빈 것과 다를 바 없는 존재.
모든것에 무감각하면서도 그 누구 보다도 쾌락에 미칠 수 밖에 없는 역설적인 존재.
에리엘은 그런 엘프라는 종족이 한없이 역겨웠고. 현성이라는 남자를 만나 사랑에 빠져 감정을 가지게 되면서 그 생각은 한없이 견고해졌다.
겨우 여타 다른 종족 처럼 정상적인 감정을 느끼게 됐을 뿐인데,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졌으니 말이다.
그렇기에 에리엘은 레이첼도 자신 처럼 운명의 사랑을 만나기를 바랬고. 그러기 위해서는 레이첼이 무사히 귀환해야만 했다.
"꼭 돌아와, 레이첼.."
마지막으로 내뱉은 말.
하지만 이미 레이첼은 떠난 후였다.
***
턱-
레이첼은 단숨에 황궁의 지붕으로 이동했다.
보통이라면 마법으로 결계를 걸어놓기에 이런 식으로 마법을 통해 단번에 이동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지만, 카인드니안은 마법을 배척하는 국가. 그런 마법 따위는 걸려있지 않았고. 이런 식으로 대놓고 이동해도 상관 없었다.
다만 그만큼 황궁 내부를 지키는 사람의 수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고. 그들의 대부분이 오러를 일정 경지 이상으로 끌어올린 중급 기사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곧바로 움직일 필요가 있었다.
중급 기사 정도의 수준이라면 마나의 특유의 기운을 멀리서도 느꼈을 테니까.
"침입자다! 마법사가 침입했다! 모두 수색해!!!"
아니나 다를까, 근처에 있던 기사가 누군가 침입했음을 인지하자 마자 주저없이 주변에 알렸고. 그와 함께 황궁 내부에 종소리가 드넓게 울려퍼졌다. 그로인해 레이첼은 어쩔 수 없이 자리를 박찼다.
타닥-
레이첼은 신체에 마나를 두르며 빠른 속도로 지붕을 내달렸고. 카인드니안의 황제인 실피드의 기운이 느껴지는 곳을 몰색했다.
애초에 레이첼은 황궁에 와본 적이 없기에 실피드가 어디있는지 알 리가 없었고. 거의 무지성의 수준으로 일단 들이박고 보는 것이었다.
"저기다, 침입자가 저기있다!"
"침입자는 작은 체구의 여자다! 겁먹을 필요 없으니 쫓아!"
이런, 레이첼은 벌써부터 위치를 들킨 것에 혀를 차며 속도를 더욱 올렸다. 하지만 이내 레이첼을 따라 지붕을 타고 쫓아오는 기사들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레이첼은 그들을 따돌리고자 했지만, 이곳은 그들의 홈그라운드나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속도를 올리고 예상치 못한 경로로 움직여도 기사들은 레이첼을 포위해왔고. 어느덧 정신을 차려보니 열댓명이 자신을 둘러싸고 있음에 참담한 심정이 들었다.
더 이상 도망쳐봤자 소용이 없을 터, 레이첼은 바삐 움직이던 다리를 천천히 멈췄고. 그 상태로 몇 미터를 더 달리고 나서야 가까스로 제자리에 섰다.
그러자 기사들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고. 불과 몇 초도 안되는 짧은 시간만에 견고한 포위망을 만들어 레이첼이 도망칠 수 없도록 만들었다.
스릉-
"정체를 밝히고 항복해라!"
이윽고 기사들을 대표하는 듯한 한 남자가 검을 뽑아 레이첼에게 겨누며 말을 건냈고. 레이첼은 어떻게 해야될지 고민했다.
싸울 것인가 아니면 도망칠 것인가.
지금 이곳에 위치한 이들 중, 레이첼의 상대가 될만한 존재는 딱히 없었다. 또한 이들을 죽이지 않고 제압하는 것 또한 별로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척 봐도 이들은 마법사를 상대할 줄도 모르는 바보들이었다.
하지만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기사들은 마법사를 상대할 기회 조차 없었던 이들이었다.
카인드니안 제국이 세워진 것은 몇 십 년도 전의 일이었으며, 실피드의 마나를 배척하는 정책이 최고조로 달했을 때도 그로부터 약 4~5년 정도였다.
도중에 돌연변이 왕과의 협약을 맺으며 수그러들긴 했지만, 이미 제국 내부에 마법사들은 죽거나 피신을 가는 바람에 씨가 마른 상태였고. 당시 마법사와 격렬한 전투를 하였던 기사들이 죽으면서 세대는 자연스레 교체되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현재의 기사들은 당연하게도 마법에 대한 지식이 전무할 수 밖에 없었고. 마찬가지로 마법사를 상대하는 방법을 모를 수 밖에 없다.
그러니 이렇게 무턱대고 검날을 들이 미는 것이지.
정말이지 옛날 같았으면 있을 수 없는 일. 생각해보니 뭔가 괘씸한 광경에, 레이첼은 도망치는 선택지를 과감하게 버리고 충동적으로 이들과 싸우는 것으로 방향을 정했다.
물론 죽이지는 않을 작정이었기에, 어느정도의 힘조절을 하고자 하였고. 레이첼은 여유롭게 입꼬리를 올리며 방긋 웃음을 보였다.
이에 레이첼의 주위를 둘러싼 기사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저 여자가 왜 저러나' 라고 말하는 듯한 반응을 보였고. 이것 또한 마찬가지로 옛날이었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감히 마법사 앞에서 방심을 하다니 말이다.
그리고 그 순간.
콰앙-
굉음과 함께 레이첼에게 먼저 말을 건냈던 기사의 갑옷이 산산조각났고. 그 갑옷을 입고 있던 기사를 비롯해서 주변에서 그 광경을 목격한 기사들까지 눈동자를 격렬하게 떨며 상황을 파악하고자 했다.
어찌나 놀랐던 것인지 몇몇의 기사들은 검도 뽑지 못 하고 어리둥절해 하며 순식간에 벌어진 광경을 구경하다 싶이했고. 레이첼은 이 광경이 어이가 없다 못 해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무감각한 엘프에게 이런 감정을 느끼게 만들 정도로 기사들의 모습을 한심하다 못해 차마 두 눈으로 지켜 보기도 힘들었고. 레이첼은 주저 없이 눈을 감았다.
그러자 기사들은 이내 정신을 차렸는지 허리춤에 달린 검집에서 검을 뽑아들었고. 레이첼은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어 이들에 대한 평가를 내렸다.
"전부 수준 이하다. 한심한 것들."
콰아앙-!!!
평가가 내려짐과 동시에 주변에 있던 모든 기사들은 복부에 무언가를 강하게 얻어 맞은 듯, 복부를 두 손으로 움켜쥐며 쓰러졌고. 그들의 갑옷은 하나도 빠짐없이 균열이 가거나 산산조각이 되어 바닥에 흩부려졌다.
그리고 레이첼은 너무도 손쉽게 쓰러지는 기사들을 보며 가볍게 혀를 찼다.
마법사를 상대함에 있어 중요한 것은 언제나 오러를 몸에 두르고 있거나 언제든지 오러를 발사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인데. 이들은 그러지 못 했고, 그것이 패배의 원인이었다.
아마도 방심을 한 것 같기는 했으나, 침입자를 상대로 방심을 했다는 것은 이런 꼴을 당해도 할 말이 없어야 됐다.
더군다나 그냥 침입자도 아니고 마법사가 침입하였는데 방심을 했다는 것은 검의 날을 스스로 목끝으로 향하게 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행위였다.
마법사의 의지에 따라 기적을 일으키는 마나가 언제 어디서 덥쳐 올지는, 그 마나를 볼 줄 아는 사람이 아니라면 모르는 법이었으니 말이다.
어찌됐든 한 번 거하게 일을 저질러버린 이상, 더는 시간을 늦추어서는 안 되었고. 레이첼은 다시 자리를 박차며 실피드를 찾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