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화 〉용사입니다. 기사와 엘프는 포위됐습니다.
이상했다.
뭔가가 이상했다.
레이첼은 실피드를 찾기 위해 황궁을 누비면서 무언가 확실히 잘못되었음을 느꼈고. 딱 마침 지붕 위에서 달리는 레이첼을 발견한 기사가 검을 꺼내들며 크게 외쳤다.
"침입자가 저기 있다!!!"
콰앙-
그것과 동시에 레이첼은 슬쩍 눈길을 주는 것만으로도 기사를 제압했고. 뒤이어 그 소식을 듣고 어디선가 등장한 기사들 마저도 손쉽게 제압했다.
그런데 너무도 이상했다.
기사들이 마법사를 상대하는 법을 모르는 것 까지는 어느정도 이해했다.
그런데 레이첼이 황성에 침입한 지 벌써 몇 십 분이 훌쩍 지난 상태.
이쯤되면 적어도 기사단장급 인물이 등장하고도 남았을텐데, 계속해서 중급 기사 혹은 그 밑의 쭉정이들만 등장하고 있었다.
그리고 레이첼은 이게 과연 옳게 진행되고 있는 상황인지가 의문이었다.
어쩌면 황제인 실피드를 지키기 위해 그의 주변에 전부 모여있을 수도 있는 노릇이었지만, 적어도 한 명 쯤은 침입자를 잡으러 오는게 지극히도 정상적인 행동이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레이첼은 본능적인 직감으로 상황이 무언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느꼈고. 왜인지 불길한 예감이 자꾸만 드는 것이, 어서 빨리 실피드를 찾아야만 될 것 같았다.
***
저택의 구석진 곳에 위치한 방.
그 방안에는 침대에 몸을 뉘인 현성을 비롯하여 세 명이 모여 있었고. 방안을 가득 채운 긴장감에 조용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그리고 그 분위기를 뚫고 선뜻 말을 꺼낸 것은 이로하였다.
"...레이첼 씨는 괜찮을까요?"
이로하는 한 쪽 손을 들어올리며 다른 두 사람에게 말을 꺼냈고. 긴장한 탓인지 들어올린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그도 그럴것이 이로하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 계획에 동참하게 됐으니 어쩔 수 없었다.
본래대로라면 일찍이 엘프의 영역에서 돌연변이 숲으로 안내를 받아 이동되었어야 했지만, 그 역할을 맡았던 아인이 죽어버리는 바람에 그러지 못 했다.
물론 다른 엘프나 브랜드가 안내를 할 수도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기본적으로 엘프는 엘프의 영역 밖으로 벗어나지 않으며, 브랜드는 돌연변이 숲으로 가는 길을 모르기 때문에 그 역할을 맡을 수 없었다.
다행히도 레이첼이 돌연변이 숲으로 가는 길을 알고 있었으나, 현성의 일을 준비해야 됐기 때문에 이로하는 우선 순위에서 밀려났고. 결국에는 어쩌다보니 현성의 일이 마무리가 되고 난 후 어떻게 해결해야 될지에 대한 의논을 나누는 것으로 결정됐다.
그렇게 이로하는 상황이 흘러감에 따라 자연스럽게 이들의 계획에 합류하게 되었고. 이로하 또한 그것이 마냥 싫지만은 않았으며 오히려 현성의 곁에 조금 더 머물 수 있다는 사실에 역으로 기뻐하는 반응을 보였다.
그래도 계획에 대해 알게 되면서 두려운 마음이 앞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이로하의 물음에 입을 열어 대답을 한 것은 브랜드가 아닌 에리엘이었다.
"레이첼이라면 괜찮을 거야.."
말은 괜찮을 거라 하지만, 말끝은 너무도 흐렸다. 그와 더불어 에리엘의 표정은 이로하와 다를 바 없었고. 혹여나 레이첼이 잘못될까봐 가슴을 옹조리며 부질없이 속으로 수백번 수천번이고 빌고만 있었다.
반면 브랜드는 이로하와 레이첼과는 달리 평온한 얼굴이었으나. 어디서 구해온건지 모를 숫돌에 검날을 갈기 바빴다.
만약, 아주 만약을 대비한 행동이었지만 이것은 겉으로는 티가 나지 않아도 속으로는 나름 긴장한 상태임을 드러냈고. 브랜드는 시퍼렇게 날이선 검을 눈앞에 가까이 대보며 차분하게 말을 꺼냈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서 텔레포트 마법진도 준비해놓고 갔으니 딱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는데."
순간이동 마법진.
위험한 상황에 처할경우 곧바로 돌아오기 위해 레이첼이 미리 그려놓은 것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최소한의 안전장치가 있다고 하더라도 들 수 밖에 없는 것이 걱정이라는 마음이었고. 그것을 상기 시켜준다고 해도 둘의 표정이 좋아질 리가 만무 했다.
이로하는 레이첼과 그리 깊은 관계를 가진 사이가 아니었으나, 그래도 현성의 스승이니 불안할 따름이었고. 에리엘은 몇 백년을 함께한 친구가 홀몸으로 자신을 배신한 제자에게 갔으니 불안함과 동시에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다는 사실에 스스로에게 분노하며 자책감에 빠졌다.
그렇게 대화는 얼마 가지도 못 한 채, 다시 침묵으로 흘러갔고. 브랜드는 그리 말주변이 있는 것이 아니었기에 이들을 독려하는 것 보다는 그저 상황이 좋게 흘러가기를 바랄 뿐이었다.
두터운 침묵 속에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문득 바깥이 소란스러워진 것 같음에 브랜드는 슬며시 걸음을 창가로 향했고. 그 순간 누군가 문을 두들김에 방안의 모두가 고개를 돌려 시선을 문쪽으로 두었다.
"에리엘 님, 급히 전해드릴 것이 있습니다!"
밖에서 들려오는 다급한 하인의 목소리. 이에 저택의 주인인 에리엘이 직접 나서 목소리를 낸 하인을 향해 말을 건냈다.
"후우, 일단 들어오렴."
에리엘은 말을 내뱉음과 동시에 감정을 추스리며 표정을 관리했다. 엘프의 영역을 대표하는 입장으로써 흐틀어진 모습을 보여주지 않기 위해서였고. 이윽고 소식을 전하러온 하인이 문을 열며 안으로 들어왔다.
하인 또한 엘프였기에 남다른 외모를 가졌고. 자연스럽게 안으로 들어온 하인은 에리엘의 앞에 다가섰다.
그런데 하인은 다소 긴장한 듯 얼굴이 굳은 상태였고. 에리엘은 이를 보며 이상함을 간지했지만, 그만큼 위급한 일이라 생각하며 얼른 말해보라는 듯 시선을 보냈고. 하인은 곧장 입을 열었다.
"에리엘 님, 제국에서 사람을 보내왔습니다."
...
에리엘은 하인의 말에 그만 인상을 구겼고. 그것을 가리기 위해 재빨리 손을 들어 얼굴을 쓰러내리며 그 사이에 다시 얼굴을 추스렸다.
하필이면 지금 이 시기에 제국에서 사람을 보내왔다니. 뭔가 좋지 않은 예감이 든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이 든 것은 비단 에리엘 뿐만이 아니라 이로하와 브랜드 또한 그랬다.
에리엘은 제국 측에서 이쪽의 상황을 알고 보냈을 것 같지는 않았기에 부정적인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했고. 이로하는 최대한 무덤덤하게 있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브랜드만큼은 언제라도 검을 휘두룰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췄고. 이에 에리엘은 최대한 표정을 조절하면서 평소처럼 말하고자 했다.
"그래, 그들은 지금 어디 있지?"
"일단은 절차대로 응접실에 모셨습니다."
"후우... 지금 바로 갈테니 따라오도록."
일단 직접 가서 상황을 확인해보려는 생각으로 에리엘은 곧바로 제국에서 찾아온 사람들을 찾아가기로 정했고. 브랜드와 이로하에게 여기서 기다리고 있으라는 신호를 눈빛으로 보내고는 걸음을 옮겨 복도로 나왔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 하인이 함께 나왔고. 예상 외로 브랜드까지 에리엘을 뒤따라 나왔다. 이에 에리엘은 왜 너까지 나왔냐는 물음을 눈빛으로 보냈고. 브랜드는 어깨를 으쓱이며 당연하다는 표정을 하고선 에리엘에게만 들리도록 귀에 얼굴을 가까이대고는 나지막이 속삭였다.
"혹시 모르니 따라갈테니까 표정 풀어..."
혹시 모른다는 말, 브랜드는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여 에리엘을 따라나선 것이었다.
이로하는 혼자 두어도 돌연변이이기 때문에 해를 입히지 못 하지만, 에리엘의 경우는 달랐다.
엘프는 제국으로부터 고유의 영역을 인정받고 제국의 영토 안에서 살아가고는 있지만, 그에 따라 제국의 법을 따라야만 했고. 제국의 눈에 거슬린다면 언제든지 처낼수 있었다.
그렇기에 브랜드는 합리적인 판단으로 에리엘을 따라가기를 선택했고. 에리엘은 브랜드도 나름 생각이란 것이 있어서 나서는 것일테니 그러려니 하고 응접실로 가고자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셋은 자연스럽게 복도를 일렬로 서서 걸어가기 시작했고. 브랜드는 에리엘과 하인을 앞에 두고선 그 뒤를 따라 걸었다.
혹여나 하인이 제국에 매수되어 에리엘이 방심하고 있는 틈을 타 뒤에서 덮칠 수도 있을테니 말이다.
물론 몸에는 딱히 날붙이가 있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다같이 해놓은 짓이 있으니 심리상 위축되어 모든것에 예민하게 반응할 수 밖에 없었고. 다행히도 응접실에 도달하기 전까지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에 브랜드는 자신이 괜히 유난을 떤건가 싶어 잠깐 의심을 걷었고. 에리엘은 아무렇지 않게 문을 열고자 했다.
그러나 거짓말 같이 그 순간에 아무런 의심스러운 행동을 하지 않던 하인의 움직이 달라졌고. 느닷없이 품에서 왠 이상한 검은색의 종이를 꺼내 들었다.
브랜드는 처음에 무슨 무기라도 뽑는가 싶어 곧바로 검을 뽑아 들었지만, 하인이 꺼낸 것이 종이라는 사실에 잠깐 머뭇거렸고. 그것은 곧 잘못된 상황으로 치달았다.
화륵-
종이에 갑자기 불이 붙더니, 순식간에 단검의 형상을 갖췄고. 브랜드는 다급히 손을 뻗어 막아보려고 했지만, 그 때는 이미 하인이 주저없이 단검을 손에 쥐고선 무방비 상태인 에리엘의 등을 찌른 후였다.
"하윽...!?"
에리엘은 등뒤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고통섞인 신음을 뱉었고. 브랜드는 이번만큼은 냉철하게 행동했다.
후웅.
브랜드는 에리엘의 뒤에서 덮친 하인을 발로 차버림과 동시에 망설임 없이 검을 휘둘러 그 목을 베었고. 깔끔하게 절단된 하인의 머리와 몸이 바닥을 나뒹굴며 다량의 피를 쏟아냈다.
휙, 브랜드는 하인을 처리하자 마자 검에 묻은 피를 털어냏고. 곧바로 에리엘의 상태를 살폈다.
"뭐야 이게.."
브랜드는 에리엘의 상태를 살피자 마자 눈썹을 떨며 두 눈을 의심했다.
하인의 손에 없어 영락없이 등에 박힌 줄 알았던 단검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고. 오직 찔린 상처만이 남아 있었으며, 검상의 상태가 이상했다.
검상을 입은 곳에서 피가 흐르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당연했다.
하지만 무엇인지 모를 이상한 문양.
얼핏 보면 마법진과 비슷한 문양이 검은색으로 검상 주변에 그려져 있었고. 브랜드는 이게 뭔가 싶었다.
이것 또한 마법인가 싶었으나 마법은 분명히 아니었다.
찰나의 순간 단검에서 느껴졌던 기운은 분명히 더럽고 역했으니 말이다. 그리고 브랜드는 이 기운은 어디선가 느껴본 적이 있던 것 같았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것을 떠올릴 때가 아니었다.
브랜드는 응접실에 있다고 했던 사람들도 조금 전에 운명을 달리한 하인과 관계가 있단 판단을 하며, 지혈할 시간 조차 없음을 느꼈고. 에리엘을 한 손으로 들어 올리고선 검을 응접실 쪽으로 향한 채로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브랜드는 다시 한 번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분명 하인이 말하길 제국에서 온 사람들을 응접실로 안내했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이상하게도 응접실 안에선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고. 오히려 자신이 등지고 있는 방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
갑자기 등 뒤가 서늘해진다. 탁- 브랜드는 곧장 등을 돌려 기척이 느껴진 곳으로 검을 겨눴고.
콰앙-
그것과 동시에 방금 전까지 등뒤에 있던 방의 문이 굉음과 함께 부서졌다.
왜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 않을까.
아니나 다를까 부서진 문의 틈 사이로 검날이 빛나는게 보였고. 그 뒤로 적지 않은 수의 기사들이 보였다.
"이런.."
"으으.. 뭐야 이거..?"
뭐긴 뭐야, 제대로 잘못 걸린거지.
브랜드는 내뱉으려던 말을 참고선 도주로를 몰색했다. 그러나 제국에서 보낸 사람은 이게 끝이 아닌 것인지, 양 옆의 복도에 있던 방에서도 기사들이 때로 몰려나왔고. 브랜드는 참담한 심정을 느꼈다.
이 난관을 어떻게 해쳐나가야 되는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