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화 〉용사입니다. 엘프는 과거의 제자와 재회합니다.
찾았다.
불길한 예감을 뒤로한 레이첼은 멀리서 흐릿하게 느껴지는 익숙한 기운에 곧장 그리로 향했고. 그곳으로 향하던 와중에도 기사들이 곧곧에서 튀어나왔지만, 레이첼은 그들을 너무도 손쉽게 제압해버리며 무작정 걸음을 옮겨 실피드의 기운이 느껴지는 곳을 향해 나아갔다.
이윽고 레이첼은 실피드의 기운이 강하게 풍겨오는 곳을 찾아냈고. 단숨에 걸음을 멈춘 다음, 마법으로 지붕에 커다란 구멍을 뚫어 밑으로 내려갔다.
탁-
구멍을 통해 내려온 레이첼은 지체없이 주변을 살폈고. 자신이 들어온 곳이 어느 방안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다만 방안을 밝히는 불빛 같은 것이 없었기에 지독히도 어두웠고. 레이첼은 마나로 불빛을 내어 주변을 밝혔다.
그러자 방안은 순식간에 강한 빛에 의해 눈이 부실 정도로 밝아졌고. 레이첼은 그제서야 근접한 거리에 놓인 소파에 누군가 앉아 있음을 확인했다.
또한 그 존재는 레이첼이 그토록 찾던 존재였다.
실피드.
카인드니안 제국의 황제.
레이첼은 자신을 배신하고 카인드니안 제국의 황제가 된 제자를 바라봤다.
얼마만에 만나는 걸까? 레이첼은 가늠이 잘 안 갔다. 다만 카인드니안 제국이 세워진 지는 꽤 됐으니 몇 십년은 훌쩍 넘었을 터였고. 적어도 무척이나 오랜 세월이 지난 상태임은 알았다.
그러면서도 레이첼은 자신의 제자이던 시절의 실피드와 황제가 되고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의 실피드의 모습을 대조했다.
녹색의 긴 장발과 엘프 답게 수려한 외모를 가진 남자.
레이첼이 보기에는 이렇다 하게 달라진 부분은 없었다. 과거의 실피드나 현재의 실피드나 레이첼의 눈에는 똑같아 보일 뿐이었고. 다음으로 레이첼은 특유의 무감각한 표정으로 소파에 느긋이 앉아 자신처럼 무미건조한 얼굴을 하고 있는 실피드에게 말을 건냈다.
"오랜만이다. 실피드."
오랜만이란 말.
배신 당한 사람이 자신을 배신 한 사람에게 뱉을 만한 말은 아니었다. 보통은 쌍욕 부터 나오는게 정상일테니까. 그러나 레이첼의 표정만큼은 평소와는 달랐다. 기본적으로 무감각한 것은 같았으나, 눈빛에 서린 차가움만큼은 그 어느 때 보다도 진했으니 말이다.
그리고 실피드는 태평하게도 그 인사에 응답하며 살며시 웃음을 지었다.
"오랜만입니다. 스승님."
실피드는 진심으로 반갑다는 듯이 방긋한 눈웃음과 함께 말을 건냈고. 레이첼은 그 모습에 혀를 차며 온몸으로 치를 떨었다.
자신에게 그런 짓거리를 해놓고 뻔뻔하게도 스승이란 말을 입밖으로 뱉는다.
외모는 안 변했어도 속은 좀 변한 줄 알았더니, 예나 지금이나 뻔뻔한 것은 그대로다. 레이첼은 얼굴을 구기며 한껏 인상을 썼고. 연두색의 마나를 풀풀 풍기며 똑같이 방긋이 웃어주며 말을 건냈다.
"그동안 잘 지냈는가, 실피드?"
이번에도 마찬가지. 레이첼은 금방이라도 덮칠 듯, 실피드에게 적대적인 분위기를 보였고. 레이첼도 자신이 왜 이러나 싶었다.
엘프인 자신이 이 정도로 감정을 표현할 정도면 과연 어느정도로 쌓여왔던 걸까. 벌써 몇 십년이 지난 일이라 무색할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당연했다. 거의 평생을 걸쳐 연구해온 것을 빼앗고 못 쓰게 만든 존재였고. 배신을 하는 과정에서 다른 제자에게 까지 해를 입힌 존재였다. 그 중 몇몇은 안식을 맞이하기까지 했다.
그러니 레이첼은 지금 자신의 감정이 조절되지 않는 것은 아무리 엘프라도 당연 그래야만 하는 것이라 받아들였다.
만약 내가 인간이었다면, 얼굴을 보자 마자 마법을 날렸으리라. 레이첼은 그리 생각하며 자신이 이곳에 온 목적을 상기시키며 감정을 추스렸다.
당장은 개인적인 감정이 중요하지 않으니.
다행히 실피드는 의외로 방안에 혼자 있었기에 대화를 시도하기에는 좋은 상황이었지만. 레이첼은 왜 실피드가 이런 곳에 혼자 있던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그런 것 까지 신경 쓸 여유는 없었기에, 주의에 신경을 기울이면서 대화를 이어나가려고 했다.
그러나 레이첼이 입을 열려는 순간, 실피드가 선수를 쳤고. 레이첼은 입술을 지끈 물며 실피드가 무슨 얘기를 하는지 들었다.
"저야 보다 싶이 잘지내고 있었습니다."
"변방의 영주도 아니고 제국의 황제인데 어련히 잘 지냈을 것 아닌가?"
얘기를 듣자마자 레이첼은 퉁명스레 비꼬듯 대답했고. 실피드는 레이첼의 표정이 썩어 들어가는 와중에도 여유로운 자태를 보이며 뻔뻔하게 대화를 이었다.
"스승님은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누가 보면 오랜만에 재회한 사제 지간으로 착각할 정도로 친근하게 대하는 모습. 레이첼은 그 모습이 기가 차다 못해 어이가 없었다. 설마 자기가 한 행동을 까맣게 잊어버린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아무리 모든 생물이 망각을 한다지만, 그런 악독한 짓을 저질러 놓고 잊어버리는 것은 당한 입장에서는 정말로 분한 것이었다.
"실피드, 너와 내가 그리 사적인 대화를 나눌 사이는 아니지 않은가. 설마 너가 내게 무슨 짓을 한 것인지 잊은 것은 아닐테고?"
잊었다면 상기 시킨다. 레이첼은 다리를 꼬며 유유히 자신을 바라보는 실피드를 냉한 미소와 함께 그 사실들을 인지 시켰고. 그러자 실피드는 아차 싶었는지 손뼉을 치며 몸을 일으켰다.
"으음.. 스승님께서는 그 때의 일을 아직까지도 마음에 두고 있었습니까?"
하...
레이첼은 작게 한숨을 내셨다. 말하는 것만 보면 자신과 실피드 사이에 있었던 일이 사소한 다툼이라 생각할 정도로, 실피드는 그 때의 일을 아무것도 아닌 일인 것 마냥 편히 뱉어댄다.
엄연한 가해자인 주제에 말이다.
"실피드. 너는 그 일을 그리 가볍게 입에 담아서는 안 된다. 적어도 그대의 손에 죽어간 이들은 기억을 하고 있어야 되지 않겠는가?"
그렇기에 레이첼은 과감히 실피드에게 응어리진 감정을 표출했다. 감정을 다스리려고 해도 이것은 아니었다. 이것은 분명하게 선을 넘은 것이었다.
어느새 레이첼은 현성의 일을 꺼내려는 것 조차 뒤로 밀어두고선 실피드에게 적대감을 공공연하게 드러내게 되었고. 실피드는 그럼에도 자신이 무엇을 잘못 했냐는 듯이 입술을 핥으며 레이첼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 행위는 결정적으로 레이첼이 현성의 일을 완전히 뒤로 밀어두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본래라면 상대가 무슨 짓을 하던 냉정을 유지할 레이첼이었지만 이런 모습을 보인다는 것은, 그만큼 과거의 일을 아무렇지 않게 대하는 실피드의 행동에 반감이 들었다는 것이었고.
엘프가 반감을 느꼈다는 것은 보통의 인간이라면 살의를 넘어 상대방을 충동적으로 살인할 정도의 수준이었다.
"실피드. 그대는 아무런 죄책감이 들지 않는가? 다른 누구도 아니고 스승을 배신하고 동문을 살해하였는데?"
레이첼이 실피드에게 반감을 품은 이유는 단순했다.
자신의 잘못을 인지하지 못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만약 실피드가 자신이 잘못을 인정하고 그것에 대해 사과를 해왔다면 레이첼은 기꺼이 받아줄 마음이 어느정도 있었다. 그런데 자신이 잘못했다는 자각 조차 없으니 복창이 터져나가는 것은 당연했다.
그리고 그런 레이첼의 말에 실피드는 무뚝뚝하게 입을 열었다.
"제가 스승의 기대를 저버린 것은 인정합니다. 다만 그 녀석들을 죽인 것에 제가 왜 죄책감을 느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죄책감을 왜 느껴야 하는지 조차 모른다.
실피드의 말을 요약하자면 그런 의미었고. 레이첼은 얼척이 없는 실피드의 언행에 뭐라 말을 해야될지 감조차 잡지 못 했다.
어디부터.
어디부터 잘못된걸까.
레이첼은 곰곰히 생각해봤다. 하지만 어디서 어떻게 잘못된 것인지 마땅히 생각나는 것이 없었고. 유일하게 떠오르는 이유는 하나 뿐이었다.
그리고 그 이유는 어처구니 없게도 지극히 간단한 것이었다.
엘프.
엘프란 무엇인가.
모든것에 무감각한 존재가 아니던가.
그래, 어찌보면 실피드가 저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은 엘프의 종족적 특성을 살펴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하지마 그럼에도 레이첼은 실피드를 향한 반감이 사라지지 않았다.
아무리 엘프가 무감각한 생명체라고 하여도, 누군가를 죽인다는 행위가 도덕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옳지 못한 행위임은 알고 있을 터. 그렇다면 자신의 행위가 지탄 받아 마땅할 행위임을 인지해야 되는 것이 정상적인 사고방식이었다. 더군다나 실피드는 황제였다. 분명히 제국의 법상에 살인이라는 행위에 대한 법률이 있을 텐데도 저런 반응을 보인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실피드. 너는 누군가를 죽였다. 제국의 황제라면 그 행위에 어떤 책임이 따르는지 잘 알고 있지 않은가?"
그렇기에 레이첼은 근본적으로 실피드가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 것인지 지적했고. 그런 레이첼의 말에도 실피드는 당당한 모습을 보였다.
"스승님은 참으로 아둔하십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마족들이 제국의 국경에 침범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있는 실정인데 어찌 그리도 과거에 연연하십니까?"
저것이 지금 무슨 망발을 뱉는다는 말인가. 레이첼은 실피드의 말을 듣자마자 이런 생각이 머릿속에 들었다. 하지만 곧바로 반문하지는 않았다. 저런 말을 뱉는 데에는 자기 나름대로의 생각이 있을 터, 적어도 말을 끝까지 듣고 나서 판단해도 늦지 않을테니 말이다.
레이첼은 곧바로 더 말해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시선을 주었고. 그러자 실피드는 느닷없이 품에서 한 장의 지도를 꺼내 펼쳐보였다.
무엇을 하려는 걸까, 레이첼은 실피드의 행동을 묵묵히 지켜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