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6화 〉용사입니다. 황제는 미쳤습니다.
지도를 펼친 실피드는 느긋하게 주변에 있던 작은 테이블 하나를 끌고와 그 위에 조금 전에 펼친 지도를 올렸다.
그런 다음 손가락 끝으로 지도에 그려진 성의 문양을 가리켰고. 그곳은 실피드가 가리킨 곳은 카인드니안 제국의 국경 선에위치한 성들 중 하나였다.
"하루 전날 이른 아침에 이곳에 마족의 군단장이 대군을 이끌고 처들어왔고. 이곳을 지키던 기사단을 비롯한 수많은 제국민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 소식은 몇 시간 전에 황성에 도착했고. 지금은 제국 병력의 반 이상을 보낸 상태입니다."
실피드는 뜬금없지만 간단명료하게 마족의 습격에 대해 레이첼에게 전했고. 레이첼은 갑자기 다른 이야기를 꺼내는 실피드를 이상한 눈빛으로 바라보면서도 현재의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이해했다.
아니, 심각하다 못 해 중하디 중한 상황. 어쩐지 황궁 안을 지키는 기사들의 수준이 평균 이하였는데 그런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제국이 해결해야 될 일, 마족이 제국을 습격한 것과 실피드가 자신을 배신하고 같이 배워 나가던 동문들을 죽인 것은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레이첼은 계속해서 실피드를 재촉했다.
"그래서. 그것이 너가 한 행동과 무슨 상관이 있다는 것이지?"
레이첼의 짧막한질문.
레이첼은 그래도 지금 뱉은 말이 아무 생각없이 뱉은 것은 아닐테니 둘 사이의 상관관계를 설명하기를 바랬고. 실피드는 자기 자신을 손가락으로 지칭하며 입을 열었다.
"스승님, 현 제국은 마족을 상대로 밀리지 않을만큼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제국을 만든 존재가 누굽니까? 바로 접니다. 바로 제가 이토록 강성한 제국을 만들어 마족으로 부터 수많은 이들을 지키고 있지 않습니까?"
진심으로 뭐라는 걸까.
레이첼은 실피드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이해했다. 그냥 자기가 제국을 키웠으며 그 제국이 지금 마족을 상대로 밀리지 않고 있음을 말하고 있지 않은가.
한마디로 실피드는 자신의 업적을 자기 입으로 과시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도대체가 저것이 자신을 배신하고 동문을 죽인 것과 무슨 관련이 있다는걸까.
"실피드, 너가 이룩한 업적은 인정하겠다. 그런데 도대체 그것이 너가 저지른 행위와 무슨 관련이 있다는 것이냐?"
일단 레이첼은 실피드가 과시한 업적을 인정하면서 자신의 질문을 강조했다.
레이첼은 인정할 것은 인정하는 성격이었으며 구태여 그것을 부정해봤자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이었고. 그런 레이첼의 말에 실피드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마치 아직도 이해하지 못 했냐는 듯 눈동자를 확장 시켰다.
"스승님께서는 정말로 아둔하십니다. 어찌 제 말의 요지를 이해하지 못 하는지... 이 제자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제자라는 말. 레이첼은 뻔뻔하게도 스승이란 말을 내뱉고 자신을 제자라 칭하는 실피드의 언행이 거슬렸다.
스승이라 부르는 것 까지는 괜찮았다. 실피드가 아직까지도 스승이라 생각한다면 스승인 것이니, 하지만 자신을 제자라 칭하는 것은 토가 쏠려나올 정도로 역겨웠다. 적어도 레이첼은 실피드를 자신의 제자라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감정을 입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그저 더욱 냉랭한 눈빛으로 실피드를 살벌하게 노려볼 뿐이었다.
그리고 실피드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들은 레이첼로 하여금 가히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의 경멸감을 느끼게 만들었다.
"제가 이 제국을 세운 이유는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한 것, 그리고 그 때 당시 제 손으로 죽인 이들은 안타깝지만 세상을 위해 희생된 것일 뿐입니다. 아마 그 녀석들도 자신들의 죽음으로 수많은 이들을 지킬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에 감사해하지 않겠습니까?"
아아, 레이첼은 저것이 정말 실피드의 입에서 나온 말인지 믿기지가 않았다.
저것은 그저 합리화에 불가한 것이었고. 죽어간 제자들을 모욕하는 것에 불과했다. 어떻게 저런 생각을 머릿속에 담아낼 수 있으며 길가의 오물 보다도 못한 망발을 입으로 내뱉을 수가 있는가.
레이첼은 당장이라도 마법을 실피드에게 날려버리고 싶은 생각이 들었으나, 현성을 생각하며 간신히 참아냈다. 그러나 레이첼의 그런 다짐에도 불구하고. 얼마 안가 실피드의 입에서는생각치도 못 했던 말들이 튀어나옴에 레이첼은 당황을 금치 못 했다.
"아, 참. 그러고 보니 스승님께서 재미난 일을 꾸미고 계시는 것 같던데... 그러시면 황제인 제 입장이 곤란해집니다. 안타깝지만 스승님과 사건에 연관된 돌연변이들을 제외한 나머지 둘은 처형을 하고자 사람을 보내놨으니 한동안은 이곳에서 제자와 함께 그간 나누지 못 했던 대화나 하면서 둘의 목이 이곳으로 올 때까지 기다리시죠."
저것이 무슨 말인가.
레이첼은 실피드의 말을 들으면서도 정신이 아찔해짐에 이마를 부여잡았다.
이미 모든것을 알고 있었다.
실피드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라는 생각을 품는 것 조차 지금은 사치였다.
레이첼은 실피드를 설득하는 계획이 처음부터 틀려먹었음을 깨달음과 동시에 곧바로 준비해둔 마법진으로 이동하고자 마나를 끌어모아 마법을 발동 시키고자 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마법이 발현되었음이 확실하게 느껴졋음에도 빛이 일구어질 뿐, 레이첼의 몸은 준비해 놓았던 마법진으로 이동되지 않았다.
어째서인가.
레이첼은 혹여나 자신이 마법진을 잘못 그려 놓은게 아닌가 싶었으나, 분명히 몇 번이고 제대로 그려 놓았음을 확인하였기에 절대 그럴 일은 없다 생각했다.
그렇다면 도대체 텔레포트 마법이 발동 됐음에도 여전히 이곳에 있는 이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레이첼은 예상치 못한 상황이 당황스러울 따름이었고. 실피드가 점차 다가옴에 서서히 뒷걸음질을 쳤다.
실피드가 레이첼이 제자였을 시절에도 그는 이미 대륙 최고의 정령 술사였다. 그로부터 많은 시간이 지난 지금은 어느정도 수준으로성장했을까? 레이첼은 적어도 자신이 어떤 수를 준비해와도 실피드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확신했고. 그렇기에 방비책을 오로지 도망치는 것을 전제로 두고 준비해 두었다.
그런데 지금 그 방비책이 제대로 발동되지 않으니 레이첼은 실피드에게 맞서야만 했다. 또한 실피드의 말에 따르면 에리엘과 브랜드가 위험할 수도 있었다.
다만 에리엘 또한 실피드 정도는 아니어도. 대륙에서 내로라 하는 정령술사였기에 기사단 하나와 무력 충돌이 일어나도 충분히 버티거나 이겨낼 수 있겠지만. 세상 모든 일이 생각한 대로 흘러가는 것아 아니었다.
그렇지만 당장은 에리엘을 믿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레이첼 또한 상황이 좋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였기 때문이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스승님?”
“…무슨 짓을 한 것이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히 실피드가 원인임을 레이첼은 본능적으로 직감했고. 수상쩍은 웃음을 지으며 말을 건내는 실피드에게 반감을 드러내며 반문했다.
그러나 실피드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은 채, 천천히 레이첼의 앞에 다가섰고. 레이첼은 빠져 나가기 위해 문을 찾아이리저리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방안에는 밖으로 나가는 문이 존재하지 않았고. 레이첼은 처음부터 실피드가 이 상황을 예상하고 있었음을 인지했다.
그러나 입구가 있으니 실피드가 이곳에 들어올 수 있었을 터, 레이첼은 마나를 강하게 퍼트려 주변을 샅샅히 살핌으로써 입구를 찾고자 했다.
하지만 마나가 방을 둘러싼 벽에 닿는 순간, 마나는 순식간에 레이첼의 주변으로 도망치듯 돌아왔고. 레이첼은 마나를 통해느껴진 기운이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흡사 마족들이 사용하는 마기와 비슷한 느낌의 기운. 레이첼은 오래전에 마족과의 싸움에 몇 번 나선 적이 있었기에 그 기운을 너무도 잘 알았다.
그런데 도대체 왜 저 역겹고도 고까운 것이 벽으로부터 전해진다는 말인가. 레이첼은 의심이 담긴 눈으로 실피드를 바라봤다.
더이상 뒤로 물러설 곳이 없었기에 레이첼은 벽에 부딪혀 정체된 상태였고. 그 동안 실피드는 한없이 근접해온 상태였다.
"제가 왜 스승님의 기대를 저버린 것인지 아십니까?"
"그것을 내가 어떻게 아느냐."
레이첼은 실피드가 자신을 왜 배신한 것인지 조차 몰랐다. 그도 그럴 것이 실피드는 배신하기 바로 전날까지도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었기에 배신할 거라는 징조 조차 보이지 않았으니 그럴 수 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레이첼은 실피드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적어도 왜 배신했던 것인지 알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었고. 레이첼이 묵묵히 실피드가 입을 열기를 기다리자 실피드는 그에 응답하 듯 서둘러 말을 이었다.
"마나는 제가 아무리 노력해도 가질 수 없는 힘이라서 그랬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가질 수 없는 힘.
레이첼은 그 말을 듣는 순간, 과거의 실피드를 떠올렸다.
실피드가 레이첼의 제자가 되기 전 부터, 이미 정령술의 경지를 최고조로 끌어올린 상태였다. 그럼에도 실피드가 마나를 익히기 위해 레이첼의 제자로 들어온 이유는 간단했다.
강해지고 싶어서.
실피드는 엘프들 중에서도 특이하게도 강해지고 싶다는 욕망을 가진 존재였고. 정령술로는 더욱 강해질 수 없어, 마나를 익힘으로써 다른 방식으로 강해지고 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실피드는 정령술에 있어서 실로 압도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지만, 마나에 있어서는 그리 좋은 재능이 없었는지 적지 않은 시간을 투자하였으며 그 누구 보다 노력을 하였음에도 마나를 조금도 느끼지 못 했다.
그래서 그랬던 것일까.
레이첼은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에서야 실피드가 왜 자신을 배신을 하였는지 이해했다.
실피드는 그저 자신이 가질 수 없으면 부숴버리겠다는 치기어린 마음을 가졌던 것이었다.
정말이지 허무하기 짝이 없을 정도의 이유. 하지만 이해했다고 해서 그것이 납득이 가는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레이첼은 실피드에게 극에 달하는 혐오감을 느꼈다.
실피드는 단순히 배신만 한 것이 아니었다. 황제가 되어 카인드니안 제국을 세우고 난 후, 무슨 짓을 했던가.
마나를 배척하는 정책을 추진해 무수히 많은 마법사들을 학살하였으며 그 가족들까지도 잡아들여 처형 시켰고. 그것은 끔찍한 만행이었다.
그러나 문득 레이첼은 한가지 의문이 들었다.
실피드가 배신을 하면서 자신으로 부터 챙겨간 것.
오랜 기간 마나에 대해 연구하면서 쌓아놓았던 자료들.
"그 때 가져간 연구 자료들.. 그것들은 왜 가져간 것이지?"
그것들을 도대체 왜 가져간 것이란 말인가. 오로지 마나의 근본에 대해 연구한 것이라, 강함을 추구하던 실피드가 가져갈만한 것이 아닌 자료였기에 레이첼은 의문이 들었고. 결국에는 이에 대해 따지듯이 말을 뱉었다.
그러자 실피드는 잘 물어봤다는 듯이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고. 레이첼의 두 어깨에 손을 얹으며 입을 열었다.
"마나는 곧 영혼으로 이루어져 있다. 또한 마나는 기본적으로 선한 성향을 가진 이들에게만 나타나는 경향이 있다."
레이첼이 연구를 통해 밝힌 사실들. 실피드가 느닷없이 그것을 읊었고. 레이첼은 저것을 왜 말하는 건지는 몰라도, 자신의 두 어깨에 올려진 실피드의 손에 소름이 끼쳐 곧바로 치워버리며 추가적으로 말을 더했다.
"그것이 뭐어쨌다는 것이지?"
"여기서 제가 주목한 것은 마나가 영혼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 그렇다면 그 영혼을 완전히 소멸 시켜버리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스승님?"
...
영혼을 소멸 시켜버린다? 마나를소멸 시키는 연구를 한 적이 없지만. 결과는 너무도 뻔하지 않은가.
"마나 또한 소멸되겠.."
어라? 잠깐만.
레이첼은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들어 도중에 말을 끊었다.
왜 실피드는 저런 얘기를 꺼내는 것이고. 조금 전 느껴젔던 그 역겨운 힘의 정체는 정확히 무엇이라 말인가.
또한 레이첼이 알기로는 마족이 사용하는 힘들 중에서 영혼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부류의 것이 존재했다.
이 세가지 사실이 합쳐지자 한가지 결과가 도출되었고. 레이첼은 눈을 번뜩이며 실피드를 향해 믿을 수 없다는 시선을 보냈다.
설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런 짓을 하지는 않을테지.
제국의 황제라는 이가 공공의 적인 마족의 힘에 손을 대지는 않았을테지.
레이첼은 말도 안 된다 생각하며 속으로 끊임없이 실피드가 부정하기를 바랬다.
그러나 실피드는 또 다시 레이첼의 기대를 저버렸다.
"안타깝게도 마나는 소멸하지 않더군요. 하지만 저는 또 다른 가능성을 찾았습니다."
아니다. 저것은 거짓말이다.
레이첼은 실피드가 무슨 말을 하려는 지 듣고 싶지 않았다.
비록 안 좋게 끝난 관계였지만. 자신의 제자였으며, 저것이 자신의 연구를 기반으로 한 실험의 결과라는 사실에 소름이 끼쳤다.
"영혼은 소멸해도 마나는 남지만, 그 마나의 안에 또 다른 영혼이 들어오더군요. 그런데 그 영혼이 살아생전 어떤 존재였는지 참으로 궁금하지 않습니까? 스승님이라면 분명히 궁금하시겠죠."
화륵-
실피드는 레이첼의 의견이 어떻든 상관없다는 듯 주변에 청록색의 기운을 뿜어냈다.
그리고 레이첼은 그것을 근접한 거리에서 지켜보며 온몸으로 그 기운을 보고 느꼈다.
분명히 겉으로 보이는 부분은 마나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나 그 색이 탁하며 역한 기운이 풍겨오는 것은 마족들이 사용하는 것과 거의 똑같았다.
"무척이나 대단하지 않습니까? 포로로 잡아들인 마족의 도움을 받아 완성해낸 힘입니다."
아아, 결국에는 마족과 연관되어 있음을 본인의 입으로 직접 내뱉는다. 이미 실피드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건너버린 것이었다.
하지만 실피드는 이것으로 끝내지 않았다.
실피드가 뿜어낸 기운 중 한 곳에서 작은 형체가 튀어나와 점점 덩치를 키우더니 이내 하나의 인형을 그렸고. 이것은 마나와의 교감이 극에 달하여 마나에 담긴 영혼을 현실로 불러내는 것과 똑같은 과정이었다.
이런 것이 가능하다니. 레이첼은 진심으로 믿기지가 않았으며. 이윽고 커다란 덩치를 가진 남성이 방안에 등장하였다.
커다란 덩치를 가진 남성의 얼굴은 함몰되다 싶이 했으며, 두 입술 사이에 철사 같은 것이 일자로 박혀 있어 사실상 벙어리나 다름 없어 보였다.
헌데 왜인지 그 남성의 얼굴이 어디서 본 듯 익숙함에 레이첼은 주의를 기울였고. 실피드는 레이첼로 부터 몇 발자국 떨어져서는 덩치 큰 남성의 곁에 나란히 스며 입을 열었다.
"이 자가 누구인지 기억나지 않습니까?"
실피드의 말을 듣자하니, 이 남성이 자신과 일면식이 있던 존재인 것은 맞았다. 하지만 엘프라고 해서 기억력이 뛰어나지 않았고. 너무 오래전 일은 잊어버리기 마련이었다. 그렇기에 레이첼은 이 남성이 정확히 누구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렇게 레이첼이 인상을 찌푸리며 기억을 되내이자. 실피드는 재밌다는 듯이 참하게 웃으며 레이첼이 기억해낼 수 있도록 간단한 힌트를 말해주었다.
"아주 오래 전에 엘프 남성만을 노려 강간을 일삼던 놈이 기억나지 않습니까?"
아, 기억났다.
레이첼은 실피드가 넌지시 던진 힌트를 듣고 나서야 이 남성이 누구였는지 기억해냈다.
실피드가 제자로 들어온지 얼마 안 되었던 시점, 그때 당시 엘프 남성만을 노려 강간을 하던 변태적인 성향을 가진 거구의 남성이 있었고. 그것을 실피드가 잡아왔던 기억이 있었다.
비록 레이첼이 그 남성을 직접 마주했을 때에는 차갑게 식은 몸이었지만 말이다.
또한 거구의 남성의 실력은 거진 소드마스터 급이었다고 들었었다. 엘프 남성만을 노려 강간을 할 정도 수준이라면 소드마스터 급 정도는 되어야 가능한 일이었을 테니 말이다.
그런데 왜 그때 죽었던 흉악한 범죄자가 이렇게 영혼이 되어 등장하였다는 말인가.
레이첼로써는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고. 실피드는 가볍게 남성의 등을 치며 말을 이었다.
"영혼을 소멸 시킨 마나는 빈집이나 마찬가지, 하지만 어느정도 시간이 지나면 곳곳을 떠돌던 영혼들 중 하나가 안으로 들어오더군요. 더군다나 그냥 영혼이 아니라 하나같이 한 때 커다란 악명을 떨쳤던 이들이더란 말입니다. 정말이지.. 신기하지 않습니까?"
신기하고 나발이고 레이첼은 실피드가 무슨 연구를 하고 실험을 했기에 이런 결과를 도출할수 있었는 지 부터가 의문이었다. 또한 이런 말도 안 되는 짓을 벌인 실피드의 사고가 궁금했고. 레이첼이 무슨 생각을 하던간에 실피드는 혼자서 대화를 이끌었다.
"아, 그리고 이 힘을 중심으로 훈련시킨 기사단을 만들었습니다. 헌데 보통의 기사들은 도저히 이 힘을 다루지 못 하여, 어쩔 수 없이 큰 죄를 저지른 죄인들에게 가르쳤더니 성과가 남다르더군요. 역시 마족의 힘을 빌린 힘답다는 생각이 들더랍니다."
미친놈. 레이첼은 속으로 온갖 욕을 실피드에게 퍼부었다.
마족의 힘이나 다를 바 없는 힘을 훈련시켜 기사단까지 만들다니. 저것이 정녕 제국의 황제란 말인가. 이것이 세간에 알려진다면 제국은 돌연변이 왕은 물론 다른 왕국을 포함한 마탑과의 전쟁을 피할 수 없을 터였다.
그러나 실피드는 말하는 것을 멈출 생각이 없는지 끊임 없이 입을 열었고. 이어지는 실피드의 말에 레이첼은 경악을 금치 못하고 온몸을 부들부들 떨 수 밖에 없었다.
"참고로 동료분들께 친히 이 기사단을 보내드렸습니다. 아마 지금 쯤이면 두 사람 다 목이 잘려서 이곳으로 옮겨지고 있지 않겠습니까?"
마치 아무것도 아닌 일인 마냥 쉽게 내뱉는다. 하지만 레이첼은 곧바로 누군가를 머릿속에 떠올려냈다.
에리엘.
에리엘에게 마족의 힘이나 다를 바 없는 것을 익힌 기사들을 보냈다니. 에리엘이 다루는 정령은 마기에 극도록 취약하기에 에리엘은 절대로 그들을 이겨낼 수 없을 것이었다.
이에 레이첼은 분노했고. 점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안 돼..."
죽는다.
자신의 절친한 친구가 죽는다.
그것은 있어서는 안 될일이었다. 어서 빨리 돌아가야만 했다.
마나가 상성상 마기보다 우세하기에 레이첼은 자신이 돌아가야만 된다는 생각을 품었고. 더 생각할 것도 없이 온몸에 마나를 둘러 호흡을 가라앉혔다.
지금부터 목표는 이곳에 들어올 때 뚫어놨던 구멍.
그곳으로 가기 위해서는 실피드와 거구의 남성을 지나야만 했다. 하지만 도저히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저 둘을 뚫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기에 레이첼은 작은 꼼수를 사용하기로 했다.
스륵-
레이첼은 우선 방안을 밝게 비추던 불빛을 소멸시켰고. 감각을 곤두세우며 자리를 박찼다.
레이첼은 부디 이 둘이 자신의 움직임에 반응하지 못 하기를 바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