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화 〉용사입니다. 기사는 싸움을 택합니다.
후웅-
"크하하, 저 귀쟁이 자식 결국엔 실패했구만 그래!"
기사들 틈에서 꽤나 곱상하게 생긴 남성이 나와 차가운 시체가 되버린 하인을 검으로 가리키며 비웃 듯이 조롱함에 브랜드는 시선을 그쪽으로 향했다.
척 봐도 입은 갑옷부터가 다른 것이 이 기사들의 단장임이 확실했다. 하지만 행동이나 말을 하는 것을 보아하니 도저히 단장이라는 직책을 맡은만한 인물이 아님은 분명했다.
여태까지 브랜드가 익히 봐온 단장들 중에서 언행을 장난스럽게 하는 이들이 있긴했지만 적어도 저리 저질스럽고 시시껄렁하지는 않았으니 말이다. 또한 브랜드는 복도를 꽉 채운 기사들이 입은 갑옷들을 보며 정녕 이들이 제국에서 보낸 것이 맞나 싶었다.
제국의 기사들이 입는 갑옷은 보통 초록색 계열의 밝으면서 연한 색상의 갑옷인데, 저들이 입은 갑옷은 검정색으로 물들어져 있었고. 브랜드가 알기론 저런 갑옷을 입는 기사단은 없는 걸로 알았다.
또한 저 남성이 말한 '귀쟁이' 가 가리킨 것이 조금 전, 자신이 죽인 하인을 말하는 것임을 구태여 깊게 생각치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왜 하인이 느닷없이 에리엘을 공격한 것인지 의문이었는데 아무래도 저들에게 협박을 받은 듯 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곧바로 죽이지 않고 제압만 해두었을텐데, 워낙 갑작스럽게 벌어진인데다가 예민한 상태였는지라 미쳐 그것까지는 생각치 못 했다.
아무튼간에 브랜드는 저들이 도저히 제국에서 보낸 이들이라 믿기지가 않았지만, 위급한 상황임은 분명했기에 브랜드는 이들을 피해 유일하게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던 응접실 안으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갔다.
물론 이것이 함정일 수도 있었지만 당장은 방법이 이것밖에 없었고. 만약 평범한 기사들을 상대로 하였으면, 이미 목이 달아나고 없었을테지만. 기사들은 단장이 보여주었던 언행을 하나같이 똑같이 실천하는 면모를 보여주었다.
바로 옆방에 있던 놈들 조차도 공격할 생각 조차 안 하고 어떻게 하면 눈앞의 존재를 괴롭게 죽일까, 라는 생각이 뻔히 보이도록 바라보고만 있었으니 말이다. 당연히 브랜드는 쉽게 죽어줄 생각은 없었다.
그렇기에 브랜드는 어느샌가 조용해진 에리엘을 바닥에 내려놓고 살아있다는 것만 재빨리 확인한 뒤, 빠르게 주변의 가구들을 문앞에 쌓아 수성하다 싶이 문을 틀어 막았고. 바닥에 몸을 누윈 에리엘은 등뒤에서 느껴지는 통증과 온몸에 점점 퍼지는 알 수 없는 불쾌한 기운에 소름이 끼쳐 몸을 부들부들 떨며 그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출했다.
"하윽.. 진짜 개같네, 씨발.."
적잖은 신음과 함께 내뱉어지는 적나라한 비속어.
원래 성격이 더럽기는 했으나, 에리엘이 평소에 욕을 입에 담는 경우는 잘 없었다. 적어도 브랜드가 알기로는 말이다. 그런 에리엘이 저런 반응을 보인다는 것은 어지간히 상황이 극에 치달았음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에리엘은 일단 상처를 치료하고자 정령을 부르고자 했다.
[위습]
에리엘은 고통속에 인상을 써가며 하급 빛의 정령의 이름을 나지막이 불렀다.
허나 왜인지는 몰라도 정령이 나오지 않았다.
정령은 계약자의 소환 명령에 곧바로 소환에 응하는 것이 기본적인 원칙일 터. 그런데 계약자에게 불리어졌는데도 오지 않는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것이었다.
에리엘은 어쩌면 자신이 이름을 잘못 부른게 아닌가 싶었으나, 정령은 이름을 잘못 부르던 말던지 계약자의 의지가 중요한 것이기에 개떡 같이 잘못 부르는게 아니면 어지간해서는 소환에 응했다.
"씨..발 뭐야..?"
그렇기에 에리엘은 당황스러운 감정이 듬과 동시에 순간 욱하여 욕설을 뱉었다. 그도 그럴것이 등뒤에서 정신이 나가버릴 것 같은 고통이 쉼없이 올라오는데 욱하지 않으면 그것이 비정상이었고. 그 암담한 상황을 모를 수 밖에 없었던 브랜드가 상처를 치료하지 않는 에리엘의 모습을 보고선 거칠게 말을 뱉었다.
"얼른 치료 안 하고 뭐해?!"
"으으.. 정령이 소환이 안 돼..!"
정령이 소환이 안 된다니. 브랜드는 그게 무슨 소리인가 싶었으나, 제정신이라면 치료할 수 있는 상처를 방치해둘 리가 없었기에 일단은 에리엘의 말을 믿었고. 마지막으로 의자를 문앞에 두고선, 에리엘에게 다가가 자세를 낮춰 등뒤의 상처를 다시 한 번 살피고자 했다.
스윽, 다행히 검에 찔린 곳은 어깨에 가까웠기에 옷을 살짝 들추어보는 것만으로도 쉽게 상처를 확인할 수 있었고. 심각할 정도로 피를 많이 흐른 상태였다.
만약 엘프의 신체가 기본적으로 튼튼한 편이 아니었다면, 평범한 사람은 이미 의식을 잃거나 죽었을 터였고. 아무리 엘프라도 이 이상 상처를 냅두었다가는 죽음의 문턱을 걷는 것은 한 순간이었다.
그렇기에 정령으로 치료가 불가하다면 어서 빨리 지혈을 해야만 했다.
후욱- 브랜드는 몸을 일으켜 창가에 있던 커튼을 뜯어 다시 에리엘에게 돌아왔고. 다음으로는 에리엘의 옷을 벗겨야만 했다.
"지혈해야 되니까 옷 벗어."
"나 몸에 힘이 안 들어가는데...."
이런 지랄 맞은, 아무래도 출혈이 심해 점점 몸이 굳어가는 것이 분명했다. 생각보다 죽어가고 있는 속도가 빨랐다.
덜컥, 덜커덩-
엎친데 덮친격으로 복도에 있던 기사들도 슬슬 잡으러 오려는 것인지 문을 막아두었던 가구들이 흔들렸고. 브랜드는 하는 수 없이 에리엘의 몸을 일으켜 옷을 직접 손으로 벗겨냈다.
옷을 벗겨내자 브랜드의 시야에는 에리엘의 봉긋 솟은 가슴이 들어왔으나, 브랜드는 이미 수없이 봐왔던 것이기에 눈길 한 번 주지 않고선 바닥에 내려놓았던 커튼을 알맞게 찢었고. 곧바로 에리엘의 상처를 감싸 몇 바퀴를 두르고 꽉 묶은 다음, 다시 옷을 입혔다.
브랜드는 이걸로 출혈이 멈추기를 바라며 잠깐 바닥에 내려놓았던 검을 회수했다.
이제 선택지는 두가지.
저 기사들이 장애물을 뚫고 들어오는 것을 기다렸다가 하나씩 처리하느냐, 아니면 도주로를 확보하여 도망치던가 둘 중 하나였다.
일단 첫 번 째 방법은 저 놈들의 상태를 보아하니 마냥 불가능할 것 같지는 않았다.
숫자는 저쪽이 아득히 많았으나, 갑옷만 입었을 뿐 척 보아도 오합지졸임이 분명했으니 말이다. 더군다나 놈들의 숫자가 많아봐야 어차피 문을 통해서는 한 명씩 밖에 들어오지 못 한다. 그렇기에 숫자만 많을 뿐, 사실상 일 대 일의 연속일 뿐이었다.
하지만 이 선택지의 문제점은 명확했다.
저들은 제국에서 보낸 존재, 만약 브랜드가 저들을 공격한다면 그것은 완전히 제국을 배신해버리는 결과가 되었고. 브랜드는 도망친다는 안전한 선택지가 있는데 구태여 그런 도박성 짙은 선택지를 고를 필요가 있나 싶었다.
현재 위치한 응접실은 저택의 2층, 그냥 창문을 통해 밖으로 나가거나 바닥에 구멍을 뚫어 도주로를 만들면 되는 법이었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걸리는 것이 살짝 있었다.
현성이 누워 있었던 방, 하인이 찾아오기 전에 밖에서 들려왔던 소란스러운 소리.
그것의 정체가 무엇인지가 의문이었으며. 만약에 영역 내의 모든 엘프들이 저들에게 협박 당하거나 매수 당했다면 그것은 그것대로 큰 일이었다. 브랜드가 보기에는 저들 보다도 밖에 있을 엘프들이 몇 배는 더 강했고. 그렇게 된다면 고블린을 피해 도망갔더니 오크를 만난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또한 결론적으로 브랜드는 이 저택에서 벗어나서는 안 됐다.
현성과 이로하.
그 둘이 저택에 남아 있었다.
만약저들이 그 둘을 찾아낸다면 그건 그것대로 곤란했다. 그 둘은 돌연변이라 죽이지는 못할테지만, 최소한 험한짓을 할 수는 있었다. 저번에 듀란 또한 이로하에게 약을 먹이고 험한짓을 하지 않았던가.
그렇기에 브랜드는 첫번 째 목표를 현성과 이로하와 합류하는 것으로 정했다.
"흡..!"
콰앙-
브랜드는 마음을 정한 순간, 곧바로 주먹에 오러를 담아 바닥을 내리쳤고. 그러자 바닥에는 사람이 넉넉히 통과할만한 커다란 구멍이 생겨났다. 허나 안에서 부수는 소리가 들렸을테니, 저들이 아래쪽으로 도망쳤음을 인지했을 터. 브랜드는 에리엘이 충격을 덜 입도록 품에 안고선 곧장 아래로 내려갔고. 브랜드는 안전하게 착지를 하며 주변을 둘러봤다.
바로 아래층은 저택에 널리고 널린 평범한 방이었고. 브랜드는 한시가 급했기에 문을 발로 걸어차며 복도로 나갔다.
하지만 제국 측에서 보낸 기사들도 능력이 아주 부족한 것은 아니었는지, 그 짧은 사이에 계단을 타고 내려와 복도에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냈고. 브랜드는 하는 수 없이 마지막 도주지인 창문을 열며 밖으로 나가려 시도했다.
"뭐야...?"
"저 새끼 아냐?"
그러나 이미 밖에도 병력이 배치되어 있었는지 적지 않은 수의 기사들이 있었고. 브랜드는 뒤늦게 자신이 저들의 규모를 과소 평가했음을 느꼈다.
조금 전 복도에 있는 숫자가 전부인 줄 알았으나, 실상은 바깥에 더 배치되어 있던 것이었다. 헌데 보통 기사단의 규모는 서른명 안팍인데, 이들은 대충 숫자를 세어봐도 서른은 월등하게 넘는 것이 뭐가 이상했다.
갑옷도 그렇고 언행도 그렇고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다 이상하기 짝이 없는 부분 투성이었다.
정말로 이들이 제국에서 보내온 이들이 맞는걸까? 브랜드는 머릿속에 의문이 들었으나, 그 의문을 해결할 틈 따위는 없었다.
"남자는 죽이고 여자는 죽이더라도 시체라도 온전하게 남겨놔라!!"
한 기사가 역겨운 내용의 말을 외치자, 기사들이 무기를 뽑아들고선 일제히 덮쳐오기 시작했고. 브랜드는 빠르게 상황을 파악하고선 다시 방안으로 들어가 아까와 마찬가지로 수성하고자 했다.
하지만 응접실을 막아뒀던 장애물들이 뚫렸는지 바닥에 뚫었던 구멍을 통해 기사들 한 두명이 내려온 상태였고. 그들 또한 브랜드를 보자 마자 각자 무기를 뽑아들며 무작정 달려오기 시작했다.
무기를 든 폼이 엉성하긴 했지만 브랜드는 자비를 베풀 생각 따윈 없었다.
촤악-
브랜드는 무기를 들고 덮쳐오던 기사들 중 한 명의 목을 단칼에 베어냈고. 한 순간에 목이 절단된 기사들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 하고 바닥에 쓰러졌다.
에리엘을 어깨에 매고 있지 않았다면 저들을 한 번에 베어낼 수도 있었을텐데 그러지 못 하는게 한이었다.
"덤벼, 니들 정도는 이 정도 핸디캡으로도 충분하니까."
허나 브랜드는 겁먹지 않았다. 오히려 불리한 상황에서 역으로 도발을 하는 패기를 보였고. 나머지 기사들은 동료가 쓰러지니 주춤거리는 모습을 보였다.
기사라는 놈들이 용기도 없고 명예도 없는 모습이 참으로 대단했다. 저런 것들도 기사라니, 브랜드는 자신이 수도를 떠나있던 동안 제국이 동네 양아치들을 기사로 구인이라도 한 것인가 싶었다.
어쩌면 기사로 위장한 도적단일 수도 있었지만, 굳이 큰 돈을 들여 갑옷을 맞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봤자 한 명을 죽여버린 이상 뭐든간에 상관이 없게 되어버렸지만 말이다.
이젠 될대로 되라지.
브랜드는 고삐 풀린 망아지 마냥 검을 치겨들면서도 눈빛은 냉정함을 유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