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화 〉용사입니다. 해치웠나요?
"크아아-!"
짐승 같은 모습으로 변한 브록이 정말 짐승이라도 된 것 마냥 하늘을 향해 울부짖으며 달려든다. 이에 적색 바람의 환생은 곧장 지시를 내렸다.
[라이트 월.]
"라이트 월."
쿠웅-
새하얀 빛의 벽이 브록의 앞에 생겨났고. 브록은 그대로 벽에 부딪혀 꼴사납게 넘어졌다. 헌데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브록의 속도가 조금 전 보다 확연하게 느려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저 녀석은 공격을 할 때에만 폭발적으로 힘을 집중 시켰다. 아마도 속도에만 치중했겠지, 하지만 지금은 일체화하는 바람에 그런 식으로 힘을 조절하지 못 하는거다.]
적색 바람의 환생이 설명을 해온다. 그러나 현성이 그 말을 제대로 이해할 리가 만무했고.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게임 속 캐릭터 마냥 지시가 내려지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그런 현성의 마음가짐을 적색 바람의 환생이 지적해왔다.
[현성, 지금 싸우는 것을 최대한 기억해 두어라. 언제나 내가 이런 식으로 도와줄 수는 없을테니까.]
전부 맞는 말, 현성은 적색 바람의 환생에게만 의지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은 했다. 그러나 혼자서는 도저히 브록을 이길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렇기에 현성은 지금은 어쩔 수 없이, 적색 바람의 환생에게 의지하며 전투의 감각을 익히고자 했고. 적색 바람의 환생은 현성의 생각을 읽어 만족스러운 말을 건냈다.
[지금 당장은 그거면 됐다. 허나, 현성 지금 너는 혼자 싸우는게 아니다.]
혼자 싸우는게 아니라는 말, 현성은 그 말에 슬쩍 곁눈질로 브랜드의 존재를 인지했다. 확실히 브랜드가 있기는 했으나, 브랜드는 한 쪽 팔이 없는 상태였다. 과연 브랜드는 그런 상태에서 싸울 수 있을까? 현성은 순간 의문이 들었으나. 때 마침 브랜드가 검을 세우며 앞으로 나섰다.
"도대체 뭘 했길레 그 짧은 시간 동안 그렇게 강해진거야? 어찌됐든 내가 최대한 막아볼테니까, 너가 기회를 봐서 공격을 하던가 엄호를 하던가 알아서 해봐."
싸울 의지가 만반한 모습, 브랜드는 한 쪽 팔을 잃고도 몸을 사리는 기색이라고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고. 현성은 그제서야 자신의 생각이 얼마나 한심한 생각인지 깨달았다.
[저 기사를 얕보지 마라. 비록 팔 한 짝을 잃었다고 해도, 너와 비교되지도 않을만큼 강하니까.]
적색 바람의 환생의 말이 맞다. 만약, 그녀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브랜드와 이렇게 나란히 서는 것도 불가능했을 거다. 그렇기에 현성은 브랜드의 말에 따르며 적색 바람의 환생의 지시를 기다렸고. 브랜드가 천천히 앞으로 걸아나갔다.
그리고 때 마침, 브록이 빛의 벽을 예리하게 빛나는 손톱으로 찢어갈겼다.
"크륵, 봐주지 않아. 돌연변이고 뭐고 간에 죽여버린다!"
우웅, 브록의 주변으로 검은색의 기운이 나타났고. 그 기운은 곧이어 한 마리의 야수의 형태를 그리며 복도를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야수의 형태를 한 검은색의 기운은 브랜드의 붉은색의 오러가 서린 검에 반으로 갈라졌고. 그대로 허공에서 흩어졌다. 그것과 동시에 브록과 브랜드는 서로를 향해 짙은 적의를 드러내며 미친듯이 앞으로 달렸다.
찌잉, 브록의 예리한 손톱과 브랜드의 검이 맞부딪히며 날카로운 소음을 내었다.
"너... 많이 느려졌다?"
"닥쳐!!!"
브랜드의 짧은 도발, 그것이 통했는지 브록은 흥분한 기색을 대놓고 들어내며 마구잡이로 팔을 휘둘렀고. 브랜드는 그것을 여유롭지는 않았으나, 안정성 있게 막아냈다.
현성이 생각하기에는 브랜드가 많이 불리할 것이라 예상했지만, 예상외로 브랜드는 브록을 상대로 전혀 밀리지 않았다. 더군다나 팔이 하나가 없는 상대인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지금의 모습만 본다면 도대체 어쩌다가 심하게 당한 것인지 의문일 정도로.
[아무래도 속도에서 밀려서 당했을 거다. 더군다나 지금은 상대가 많이 흥분한 상태라 공격이 터무니 없이 엉망이니 저런 양상이 펼쳐질 수 있는거겠지.]
매우 친절한 설명, 적색 바람의 환생은 느긋하게 둘의 싸움에 대해 설명했고. 현성은 그 말에 설득 당했다.
확실히 브록에게선 조금 전까지 가득 차있던 여유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동생의 죽음 때문이 아닐까? 현성은 조심스레 추측을 하며, 둘의 전투를 눈에 담아냈다. 하지만 브랜드가 틈을 노려 보라고 하였는데, 현성은 도저히 둘의 전투에서 그 어떤 빈틈도 찾아볼 수 없었다.
잘 집중해서 본다면 확실한 빈틈이 보여왔으나, 현성은 경험이 부족했기에 이런 쪽으로는 눈썰미가 부족할 수 밖에 없었고. 하는 수 없이 적색 바람의 환생이 그 빈틈을 가르쳐 주었다.
[놈이 팔을 크게 휘두를 때가 있을 거다. 그 때에 맞춰 라이트 애로우라 외쳐라.]
팔을 크게 휘두르는 순간, 현성은 적색 바람의 환생의 말을 주의 깊게 들었고. 브록이 그 행동을 할 때를 기다리며 언제든지 '라이트 애로우'라 외칠 태새를 갖췄다.
그리고 브록이 팔을 거세게 휘두르는 순간, 현성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라이트 애로우."
새하얀 빛무리로 이루어진 화살, 허공에서 생겨난 화살은 브록을 향해 궤적을 그리며 날아갔다.
하지만 그것은 얼마 못 가, 브록의 몸에 닿기 직전 바스라지듯이 사라졌고. 현성은 그것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이미 한 번 막혔었던 공격, 그러나 두 번째에서도 막히니 암담할 뿐이었고. 적색 바람의 환생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을 뱉었다.
[지금 너의 수준으로는 이게 최선이었는데.. 이게 안 통한다면...]
내 수준으로는 이것이 최선? 그러고 보니 현성은 약간의 피로감과 함께 조금씩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어쩌면 과도하게 힘을 너무 많이 사용해서 그런걸까?
"크륵, 감히 이딴 갖잖은 잔재주를!!!"
브록이 자신에게 날아온 공격에 슬쩍 뒤로 물러나며 격한 반응을 보였다. 어쩐지 화만 더욱 돋군 것 같은 느낌은 착각일까? 그리고 그런 생각을 품기 무섭게 브록이 짙은 기운을 흩뿌리며 분위기를 전환 시켰다.
[조심해라. 저 녀석, 조금 전 공격으로 냉정을 되찾았으니까. 이제부터가 진짜다.]
적색 바람의 환생이 넌지시 경고를 주었다. 그리고 현성이 그것을 브랜드에게 전하려고 하는 찰나, 브록의 신체가 변화하기 시작했다.
우둑, 우드득-
뼈와 근육이 뒤틀리는 듯한 소름 끼치는 소리, 이에 현성은 다소 두려움 섞인 눈빛으로 멍하니 브록을 바라봤고. 브랜드 또한 심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거세게 오러를 흩뿌리며 앞으로 달려나갔다.
그래, 현실은 애니메이션이나 만화에 나오는 것처럼 악당이 변신하는 것을 끝까지 지켜봐 주지 않는다. 하지만 현성은 지금의 브록에게는 다가서면 안 된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라이트 쉴드..!?"
머뭇거릴 것 없이 현성은 곧바로 마법명을 외쳤고. 그러자 빛의 장막이 브랜드를 감쌌다.
콰앙-
타이밍 맞게 검은색의 기운이 브랜드를 덮쳤고. 뿌연 먼지가 복도를 채워 시야를 가린다.
탁, 타닥- 그 속에서 들려오는 발소리, 뿌연 먼지 사이로 브랜드가 나타났고. 브랜드는 다시 현성의 앞으로 돌아오며 괜찮은 척 식은땀을 닦아냈다.
"후우.. 죽을 뻔 했네."
죽을 뻔 했다는 말, 그것은 과장이 아니었다. 뿌연 먼지 때문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었지만. 브랜드의 등의 피부가 까지다 못 해 벗겨지다 싶이 한 것만 보면 충분히 예상 가능한 수준이었다.
"어떡하죠 이제?"
"모르겠네.. 이제는 나도 저 놈을 못 막을 것 같은데 말이야.."
암담한 상황, 현성의 공격은 통하지 않으며 더 이상 브랜드 조차 브록을 막아서지 못 한다. 어떻게 해야되는 걸까? 현성은 긴장한 탓에 후들거리는 다리를 붙잡으며 상황을 극복하고자 했다. 하지만 현성은 평범한 인생을 살아온만큼,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해야 되는 지 알리가 만무했고. 브랜드 또한 현성과 마찬가지로 긴장한 기색이 여력했다. 그리고 브록은 그런 둘이 자신에게 방비하는 것을 기다려주지 않았다.
쿵, 쿠웅-
먼지가 걷히며 그 속에서 거구의 야수가 걸어나왔다.
"크륵, 죽인다.. 죽여버린다!!!"
이성 따위는 거의 사라진 듯한 모습, 브록은 그나마 남아있던 인간의 형체 마저도 사라진 상태였고. 브랜드는 그 모습이 눈에 익었다.
"마수... 사람이 마수로 변할 수도 있는 거였던가..?"
마수? 현성은 마수란 단어가 무엇인지 알지 못 했다. 허나 어감상으로 부정적인 단어임을 유추할 수 있었고. 그 순간, 적색 바람의 환생이 넌지시 말을 건냈다.
[지금의 저 녀석, 너희 두명이서는 절대로 못 이긴다.]
냉정하게 내려진 결론. 하지만 현성도 어느정도 인지하고 있었다. 두려움에 굳어버린 두 다리가 그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적어도 이로하와 에리엘만큼은 살려야만 했다. 현성은 고개만 슬며시 돌려 겁에 질린 채로, 온몸을 떨고 있는 이로하를 곁눈질로 눈에 담았다. 그 품에 안겨있는 에리엘은 안색이 많이 좋아지긴 했지만 아직까지 의식을 되찾지 못 한 상태였다.
저 둘을 살릴 수 있을까? 현성은 확신할 수 없었다. 어쩌면 브록에게 몰살 당할 수도 있었다. 지금의 브록은 척 보아도 제정신이 아닌 듯 보였으니 말이다. 그래도 해야만 했다. 그렇기에 현성은 적색 바람의 환생에게 기댈 수 밖에 없었다.
그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었고. 이에 적색 바람의 환생은 다소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슬며시 말을 건냈다.
[방법은 있다.]
방법이 있다, 매마른 땅에 비가 오듯 현성의 마음 한켠에 희망이 피어났고. 이어지는 말을 기다렸다.
[내가 직접 개입하면 저런 녀석 쯤이야 얼마든지 죽일 수 있다.]
확신이 담긴 말. 확실히 적색 바람의 환생이 보여주었던 무력을 생각하면 브록은 비교 조차 안 될 정도로 약했다. 그렇기에 현성은 적색 바람의 환생이 부디 그렇게 해주기를 바랬다. 하지만 다음으로 이어진 그녀의 말에 현성은 주먹을 강하게 쥐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내가 직접적으로 개입하면, 너의 몸이 버티지 못 할거다. 이미 지금도 충분히 한계에 다다른 상태니 말이다.]
몸이 버티지 못 한다. 그말은 즉슨 죽을 수도 있다는 말에 가까웠다. 또한 현성은 적색 바람의 환생이 굳이 말하지 않아도, 몸의 상태가 그리 좋지 않다는 것을 은연속에 인지하고 있었다.
몸은 무겁고 정신은 피폐했다. 가능하다면 당장이라도 어딘가에 누워서 깊은 잠에 빠지고 싶었다. 그러나 현성에게 고민할 시간 따위는 없었다.
구웅-
브록이 다리의 근육을 괴기하게 부풀리고는 먹이사슬의 꼭대기에 선 강자마냥 강렬한 기운을 내뿜으며 걸어오기 시작했고. 이에 브랜드가 현성의 앞에 서면서 검을 앞으로 뻗어 브록에게 맞서고자 하는 행동을 보이며 다급하게 외쳤다.
"현성, 내가 어떻게든 막아볼테니까 도망가라. 아까 보니까 갑자기 나타난 것 같은데, 그 마법을 다시 사용해!"
마지막까지 희생하려는 모습, 아마 브랜드가 말하는 것은 '텔레포트'를 말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래, 생각해보니 그 마법을 사용하여 도망치면 되는 일이었다.
왜 그것을 생각치 못 했을까, 현성은 스스로의 멍청함에 탄식했다. 지금이라도 텔레포트로 도망치면 안 되는걸까? 하지만 그런 생각이 무색하게 적색 바람의 환생이 단호하게 부정했다.
[너의 수준으로는 네 명을 데리고 텔레포트를 하는 것은 무리이고. 아무리 멀리 도망가봤자, 저택 밖으로도 못 나간다.]
자신의 수준으로는 무리다. 현성의 자신의 약함에 치를 떨었다. 만약 그녀 처럼 강했다면, 모두를 구할 수 있지 않았을까? 현성은 괜한 정의감에 스스로를 자책했고. 브록은 어느샌가 브랜드의 근처까지 도달한 상태였다.
이제는 결정해야만 했다.
그리고 현성은 자신의 안전을 뒤로하며 적색 바람의 환생에게 모든것을 맡기기로 결정했다. 브랜드가 저렇게 목숨까지 내걸어가며 맞서는데, 현성은 자신 또한 몸을 사려서는 안 된다 느꼈기 때문이었고. 그 의지에 따라 적색 바람의 환생은 현성의 몸에서 자연스레 빠져나와 현실에 모습을 드러냈다.
탁-
진한 붉은색의 머리카락이 현성의 앞에서 흔들렸고. 이내 적색 바람의 환생의 모습이 현성의 눈에 담겼다.
"정신 제대로 붙잡고 있어. 나도 너가 잘못되는건 싫거든."
적색 바람의 환생은 걱정어린 시선으로 현성의 뺨을 한번 스윽, 어루만지고는 브록을 향해 등을 돌렸다. 후웅, 붉은색의 활이 그녀의 손에 쥐어졌고. 적색 바람의 환생의 손에 쥐어진 활은 얼핏 보면 현성이 사용했던 활과 똑같아 보였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활에 새겨진 독특한 문양에서 확연하게 차이가 났다.
"이봐, 기사. 죽기 싫으면 비켜."
적색 바람의 환생은 시위를 끝까지 당기며 단호한 목소리로 브랜드에게 비키라 말했고. 브랜드는 갑자기 뒤에서 들려오는 낯선 여성의 목소리에 당황하면서도 본능적으로 그 말을 따라야 함을 느꼈는지, 주저없이 옆으로 구르며 자리를 비켰다.
그 순간에 적색 바람의 환생은 기다렸다는 듯이 시위를 놓았고. 그러자 붉은색을 띈 수백 갈래의 얇은 실타래와 같은 것들이 허공에서 생성되며 앞으로 뻗어져 나갔다.
그리고 브록은 느닷없이 나타난 적색 바람의 환생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움추라들 정도로 커다란 압박감을 느꼈고. 한 순간 온몸이 굳어버려 옴짝달싹도 못 한채 그대로 수백 갈래의 붉은색의 실타레에 직격했다.
콰앙-
엄청난 기세의 폭발, 마치 다이터마이트가 폭발한 것 마냥 고막을 찢을 듯한 굉음이 복도를 가득 채웠고. 자욱한 연기가 시야를 가렸다.
브록은 죽은걸까? 현성은 그것이 궁금했으나, 순식간에 온몸에 힘이 빠져나감에 앞으로 고꾸라지 듯이 넘어졌고. 점차 정신이 희미해져감에 눈이 감겨왔다. 그렇게 현성이 마지막으로 본 것은 적색 바람의 환생이 손을 뻗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는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