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7화 〉2부. 프롤로그
새하얀 공간, 현성은 눈을 뜨자 보이는 풍경에 이제는 익숙하게 받아들이며 몸을 일으켰다.
이윽고 현성은 본능적으로 이 세계의 신을 찾아해맸고. 역시나 이번에도 소파에 곤히 눈을 감고 누워있는 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으음..."
푹 잠든 듯, 잠꼬대까지 하며 잠을 자고 있는 모습에 현성은 깨워야 될지 말아야 될지 고민했다. 그리고 현성은 그 앞에 무릎을 굽히며 신의 모습을 두 눈에 담았다.
지난 번에 왔을 때는 워낙 정신이 없었기에 신의 모습을 온전히 눈에 익히지 못 했었다.
가까이서 바라본 신의 모습은 뭐라 말하기가 미묘했다. 허나 분명한 것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그러나 현성의 눈에 들어온 신의 모습은 무언가 이상했다. 눈을 한 번 깜빡일 때 마다 겉모습이 바뀌는 모습, 신은 어떤 때에는 어린 소녀의 모습을 하기도 했으며 숙녀가 되기 직전인 한창 때의 여학생과 같은 모습을 하거나 이제 막 사회에 발을 들인 소녀의 티를 완전히 벗지 못한 여인의 모습을 하기도 했다.
시시각각 바뀌는 신의 외형은 쉽게 알아차릴 수 없었다. 만약 이렇게 의식하여 보지 않았다면 눈치 챌 수 없을 터였다.
그리고 그 순간, 신이 천천히 눈을 뜨며 몸을 일으켰다.
"으으.. 뭐야, 너.. 또 온거야? 이번엔 내가 안 불렀는데..."
현성은 신의 말에 뭐라 대답할지 몰랐다. 현성 또한 자신이 왜 또 다시 이곳으로 온 것인지 몰랐다. 마지막으로 기억나는 부분은 적색 바람의 환생의 도움을 받은 순간까지였다. 그 뒤로 어떻게 됐는지는 모르겠다.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네요. 어쩌면 죽을 걸까요?"
현성은 자신의 처지를 상상하며 헛웃음과 함께 말을 건냈다. 이에 신은 눈쌀을 지푸렸다. 무엇을 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예쁜 여자는 인상을 구겨도 예쁘다는 것만큼은 알 것만 같았다. 그렇게 현성이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신은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인지 손바닥으로 이마를 지그시 누르며 입을 열었다.
"아냐, 아슬아슬 하지만 너는 아직 살아있어. 단지 너의 몸이 너무 과한 양의 마나를 사용해서 쓰러진 것 같네."
조금 전에 그 행동이, 살펴보던 것이었나. 현성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그렇게 받아들였다. 또한 아직 살아 있는 몸이라고 하니 역시나 안도감이 든다.
그리고 현성은 이왕 이렇게 된 거, 지난 번에 못 다한 얘기를 하기로 마음 먹었고. 무엇 보다도 아직까지도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 있는 부분을 해결하고자 했다.
"궁금한게 있는데 물어봐도 되요?"
저번 처럼 무작정 사과를 받고자 하는 마음을 앞세운 것이 아닌, 해명을 듣고자 이성적으로 침착하게 말을 건냈다. 그러자 신은 눈동자를 굴리며 싫은 티를 내면서도 의외로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용사의 자격으로 이쪽 세계로 건너왔잖아요. 그런데 왜 이런 취급을 받아야 되는건지 모르겠어요. 그 쪽은 신이잖아요? 그렇다면 이걸 해결할 수 있지 않아요?"
현성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지극히 간단했다.
용사라는 신분으로 이세계에 왔다. 그런데 처음 발을 들인 국가에서, 돌연변이라 칭하며 핍박을 하고 자빠졌다. 그런데 신이라는 존재가 이것을 고치려고 하지 않고 있는 것은 상당히 문제가 있다고 현성은 생각했다.
그리고 신은 현성의 질문에 대해 예상했다는 듯이 허탈한 한숨을 뱉으며 소파에 몸을 기댔다.
"너는 신이 전지전능하다고 생각해?"
질문의 요지를 쉽게 알 수 있는 간단한 물음, 현성은 신의 말에 짧게나마 생각을 해보았다.
보통 신이라하면 전지전능하다 생각하는 것이 보통이라는 것을 현성은 스스로 인정했고. 그렇게 믿었다. 그렇기에 현성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신이라면 당연히 전지전능하지 않을까요?"
현성의 간단명료한 대답, 이를 들은 신은 이번에도 예상했다는 듯이 공허한 눈빛을 보였다.
"그래, 인간은 그렇게 생각하더라고. 실제로 전지전능에 가까운 편이기도 하고."
어딘가 이상한 모습, 현성은 신의 모습에서 괴리감을 느꼈다. 마치 수많은 사연이 있는 듯 했다. 그리고 신은 그런것들을 감추지 않고 그대로 드러냈다.
"하지만 말야. 나는 너희 인간이 생각하는 것만큼 전지전능하지 않아. 기껏해야 이 세계를 유지하는 것 조차 벅차는 존재거든."
전지전능에 가깝다면서, 인간이 생각하는 것만큼 전지전능하지는 않다. 뭐랄까 되게 애매한 말이었다. 하지만 이 세계를 유지하는 것 조차 벅차다는 말에서 진심으로 힘들어하는 것이 느껴졌기에, 이것이 진심이라는 것만큼은 알 수 있었다.
"일단 미리 말하자면 너 같은 사람들에게 미안한 감정은 있어. 하지만 그건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게 아냐, 나는 이 세계의 신이지만. 이 세계의 세부적인 것까지는 내가 간섭할 수 없거든."
마음대로 할 수 있는게 아니라니. 현성은 신의 말을 납득할 수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신인데, 본인 입으로 전지전능에 가까운 편이라고 말하였는데. 그것이 왜 안 된다는걸까? 이 세계를 유지할 정도의 힘은 있으면서 왜 이런 부조리한 것들을 개선할 힘이 없다는 것일까?
도대체가 영문을 모르겠다.
"간섭할 수 없다뇨? 왜요? 신이잖아요? 전지전능함에 가깝다면서요? 저번에는 왜 사과를 해야되는지 모르겠다면서요?"
현성은 쏟아내다 싶이 쌓여왔던 것을 풀어냈다. 브랜드와 에리엘 그리고 레이첼로인해 많이 사그러들기는 했지만, 현성 또한 이 세계에서 적지않게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 폭력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온몸에 불이 붙는 고통을 느끼기까지 했다.
또한 이러한 것은 오로지 현성만이 당한 것이 아니었다.
이로하.
현성은 이로하를 떠올렸다.
이로하는 그들에게 어떤 취급을 받았는가. 강제로 미약을 주입당해 브록에게 강간 당하지 않았던가, 또한 아인에게도 미약으로인해 강제로 강간을 당했다. 더군다나 바로 조금 전에도 저택에 침입한 기사들에게까지도 강간을 당할 뻔했고.
현성은 신이 미웠다. 달콤한 말로 속여 이런 짐승만도 못한 취급을 받는 세상으로 보낸 신이 말이다.
그러나 그런 현성의 외침에도 신은 단 한 줌의 미안한 감정이 얼굴에 서리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감정이 얼굴 위로 올라왔다.
"닥쳐, 니가 뭘 알아? 내가 너를 이곳으로 오라고 했어? 아니잖아. 너는 너의 의지대로 이곳에 왔고. 나는 단지 너를 중간계로 보내준 것 뿐이야, 내 힘까지 써가면서. 다른 세계의 영혼을 받아들이는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너는 모르지? 그래, 모르겠지. 너는 내가 아니니까."
분노, 억울함.
여태까지 여유로운 모습만을 보여주었던 신이, 처음으로 역동적으로 감정을 드러냈다. 그리고 현성은 자신의 무엇을 잘못했는지 뒤늦게 깨달았다.
감정, 오로지 자신의 감정만을 내새우며 상대방의 이야기를 제대로 듣지 못 했다.
또한 여태까지의 모습을 보면 신 또한 사람과 마찬가지로 인격체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신이 저런 모습을 보인다는 것은, 그녀 또한 그녀 나름대로의 사정이 있다는 얘기. 현성은 그것을 다 들어보지도 않고 무턱대고 쓴소리를 뱉어버렸다.
이에 현성은 빠르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너무 제 입장에서만 생각했어요."
"후우, 아냐 괜찮아. 생각해보니까 나도 내 입장에서만 생각해서 말했으니까."
현성과 신은 단숨에 화해를 했다. 이것은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그저 둘다 잘못을 뉘우치고 인정하는 것이 빠를 뿐이었다.
그리고 현성은 가슴을 쓰러내리며 숨을 가다듬고는, 다시 대화를 이어갔다.
"그러면 이제 얘기해주세요. 왜 간섭할 수 없는 건가요?"
질문은 간단하게. 상대방이 제대로 이해할 수 있도록 요약하여 주요 내용만을 말한다. 현성은 기초적인 것을 지켜가며 신에게 질문을 건냈고. 신 또한 현성과 마찬가지로 중요한 내용만을 추스려 얘기를 시작했다.
"기본적으로 신은 스스로가 관장하는 세계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출 수 없도록 강제되어 있거든. 그래서 내 세계에 살아가는 생명체들 중에서 그 누가 무슨 짓을 하더라도 나는 그저 지켜만 보고 있을 수 밖에 없어. 그것이 법칙이니까."
"...그렇군요."
이제야 이해할 수 있겠다.
현성은 신의 말을 듣고서, 왜 카인드니안이라는 제국의 악독한 짓에도 신이 개입할 수 없는지 이해했다.
누가 정해두었는 지는 몰라도, 신은 자신이 관장하는 세계에 간섭할 수 없다. 그 법칙 때문에 바로 눈앞에 있는 신은 그 어떠한 것도 할 수 없는 존재였다.
어쩌면 이 모든 상황을 지켜만 볼 수 없는 신이 그 누구 보다도 괴로울 것만 같았다. 자신이 만든 세계가 좋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이니까.
그렇기에 현성은 신을 이해했다. 그러나 조금 전에 그 대화에서 궁금한 것이 한가지 생겨났다.
"그 법칙... 누가 만든건가요..?"
강제되어 있다는 말과 법칙이라는 말, 이것은 마치 신 보다도 높은 존재가 있음을 암시하는 듯 했다. 그리고 신은 현성의 질문에 너무도 쉽게 대답했다.
"인간의 언어로 말하자면 조물주 혹은 창조신이라고 할 수 있을거야. 그 분께서 모든 신을 창조하시고 우리에게 각자의 세계를 창조할 수 있는 권능을 부여했으며. 모든 법칙을 정하셨으니까."
결론적으로 신보다도 높은 존재가 있다는 말이었다. 어찌됐든 이걸로 현성은 신에게 품었던 대부분의 불만을 풀어냈다.
애초에 불만을 품었던 것은 신이라는 존재임에도 세계에 간섭하지 않는 것이었고. 이에 대한 충분히 납득할만한 이유를 들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그리고 이제는 현성이 개인적으로 궁금해하는 것만이 남아 있었다.
"그렇다면 용사는 왜 생겨난건가요?"
용사란 왜 생겨났는가. 현성은 그 근본적인 이유가 듣고 싶었다. 그리고 역시나 마찬가지로 신은 현성의 대답에 주저없이 말을 꺼냈다.
"별거 없어. 그냥 각자의 세계를 지키고 싶어서야. 우리가 간섭할 수 없는 것은, 본인들이 창조한 세계일 뿐이지. 다른 신이 만든 세계는 일정한 수준 정도는 간섭할 수 있거든."
되게 복잡한 말, 이 정도로는 이해하기에는 힘든 감이 없지 않아 있었고. 현성은 신에게 더욱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을 보냈다.
"으음, 간단히 말하자면 그냥 서로 돕고 사는거지. 다른 신의 세계가 위험하다 싶으면, 특정한 기준에 적합하는 인물을 용사라는 명목으로 특별한 권능과 함께 보내서 돕는 행위라고 보면 될거야."
"아, 완벽히는 아니지만 반 이상은 이해가 가네요."
현성은 신의 친절한 추가적인 설명을 들음으로써 용사가 왜 생겨났는지 드디어 이해했다.
간단하게 학교를 예를 들어보자면. 특정한 반에 책상이나 의자가 어떠한 이유로인해 부족해질 경우, 각 반에서 남는 책상이나 의자가 있다면 빌려줌으로써 서로 돕는 것과 마찬가지인 행위였다.
물론 세부적이게 따진다면 알맞지 않은 부분이 있겠지만, 대충 그렇게 생각하니 나름 이해하기가 쉬웠다.
이걸로 현성은 신에게 궁금한 것은 모두 다 해결했다. 그렇기에 현성은 더이상 신에게 묻고 싶은 것이 없었고. 이번엔 신이 현성에게 먼저 말을 건냈다.
"크흠, 지금부터는 저번에 내가 미쳐 말해주지 못 했던 것을 말해줄거니까 잘 들어."
지난 번 대화의 연장선, 하지만 현성은 지난 번에 나눴던 대화가 온전하게 떠오르지는 않았다. 마치 꿈을 꾼 것 처럼 두루뭉실하게 생각날 뿐이었다.
그러나 현성은 그저 귀를 기울이며, 신의 목소리에 집중하기로 했다.
"마족이라고 해서 꼭 나쁜 존재는 아니야. 정말로 악한 존재는 따로 있어."
...
"네..?"
이것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마족? 마족이 무엇일까. 현성은 잠깐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 보니 얼핏 봤던 웹툰에서 마족이란 종족이 나왔던 것 같았다. 대충 악마 같은 것들을 말하는 것이겠지.
현성은 일단 그렇게 받아들였가.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정말로 악한 존재는 따로 있다는 말, 그 말은 즉슨 진정한 적은 내부에 있다는 말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리고 현성은 느닷없이 신체가 점점 사라져가는 것 같은 느낌에 밑을 내려다봤다.
"어...라?"
정말로 사라지고 있다. 현성은 발끝에서 부터 점차 형체를 잃어가는 자신의 모습에 당혹한 감정이 먼저 들었고. 신은 그 모습을 보며 상냥한 웃음과 함께 현성의 얼굴을 쓰러내렸다.
"잘가, 행운을 빌게. 아마 눈을 뜬 후에는 많은 것이 달라져 있을거야."
무슨 말일까.
하지만 현성은 신의 따스한 걱정어린 말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이대로 헤어지게 된다고 해도, 다음에도 볼 수 있으려나? 현성은 문득 그런 생각을 품으며 정신이 흐릿해짐에 온전히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