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0화 〉Chapter 1. 여행의 시작.
화륵-
어두운 밤, 브랜드 일행은 마을에서 부터 마차를 타고 한참을 달렸고. 해가 지고 달이 드리우자 근처의 초원으로 들어가 불을 지피며 휴식을 취했다.
브랜드는 마음 같아서는 쉼 없이 카인드니안 제국의 국경 밖으로 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마차를 끄는 말들은 체력이 무한하지 않았기에, 충분한 휴식은 필수였다. 그렇기에 어쩔 수 없이 주변에 널리고 널린 초원으로 들어가 마차를 숨긴 뒤, 말들을 쉬게 하고 재정비를 할 수 밖에 없었다.
"흐음, 꽤 많이 이동했는데 국경은 얼마나 남았을까요?"
브랜드의 옆에서 쪼그려 앉아 모닥불을 응시하던 아나스타샤가 넌지시 브랜드에게 물었다.
아나스타샤는 이 세계에서 돌연변이 숲 안에서만 지내왔기에 대륙의 크기가 어느 정도 인지 몰랐다. 그렇기에 지금이 어느 지점에 있는지 어림짐작 조차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브랜드는 주머니에서 지도를 꺼내 스윽 훑어봤고. 입구에 적혀 있던 마을의 이름을 지도에서 찾아 여태까지 마차를 타고 달려온 거리를 대충 계산 해봤다.
얼핏 계산해보니 앞으로 이틀 정도만 가면 국경을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국경에 간다고 하여도, 국경을 순찰하는 수비대에 걸린다면 곤란했다. 그렇기에 국경을 넘을 때에는 마차를 버리고 은밀하게 움직여야만 했다.
"어림잡아서 이틀 정도, 더 걸린다면 삼일 걸리겠네."
"으윽, 생각 보다 오래 걸리네요."
아나스타샤는 브랜드의 말에 질겁하며 몸을 떨었다. 그도 그럴것이 마차란 것이 생각보다 너무도 흔들려서 심한 멀미에 시달렸다. 또한 나무 의자에 오래 앉아 있다보니 엉덩이가 얼얼했다.
어쩌면 차라리 걸어서 가는게 더 나을 것 같기도 했다. 그러면 조금은 느리더라도 다리만 아플 뿐일테니까.
이런 생각을 하다보니, 문득 아나스타샤는 지구에서의 기억이 떠올랐다. 만약 자동차가 있었다면 하루도 안 돼서 도착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자전거, 자동차, 비행기 이런 이동 수단 따위는 이 세계에 존재치 않았다.
더군다나 그런것 말고도 이곳의 음식은 지구의 음식에 비하면 싱겁고 맛이 없었다. 그렇기에 한동안은 적응하느라 힘들었던 기억이 났다.
지구에 있었을 때에 이따금씩 판타지 세계에 살아가는 상상을 해본 적이 있었는데. 막상 실제로 겪어보니 마냥 좋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몸소 느낄 수 있었다. 차라리 그냥 이불 속에 들어가 군것질을 하던 생활이 더욱 아늑하고 좋았다. 적어도 이곳에서와는 달리 생존의 문제를 고민하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지구에서의 평화로웠던 생활을 회상하니, 아나스타샤는 괜히 침울한 기분이 들었다. 이제는 완전히 잊어버린 줄 알았는데, 역시나 잊어버릴 수 없는 기억이었다. 그러나 계속 이렇게 있다가는 옆에 앉아있는 브랜드에게 걱정을 끼칠까봐, 아나스타샤는 고개를 저으며 감정을 추스렸다.
그래, 현실에 충실하자. 과거에 연연해봤자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이 세계에 와서 좋은 인연을 쌓고, 그들과 많은 추억을 만들지 않았던가. 이곳 또한 결국에는 사람 사는 곳일 뿐이었다.
아나스타샤는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으며 약해지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흘려버린 눈물을 닦아내기 위해 브랜드로 부터 몸을 돌려, 다른 쪽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 순간, 아나스타샤는 수상함을 감지했다.
초원에 자라난 풀들 사이로 무언가 빛나는 것들이 다량으로 보였고. 풀숲을 부자연스럽게 해치며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브랜드 씨, 습격이에요! 라이트닝 볼트!"
쾅-
아나스타샤는 순간적으로 판단을 내려, 적을 알림과 동시에 마법을 날렸고. 아나스타샤의 손바닥 위로 스파크가 튀며 은밀하게 접근하고 있던 정체 모를 적들에게 선제 공격을 가했다.
이윽고 브랜드가 갑작스런 상황임에도 침착하게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집에서 검을 꺼내들었고. 모닥불 앞에서 멍을 때리고 있던 츠바키는 조금 당황한 기색을 보이다가, 이내 현성과 에리엘의 곁에 서며 적의 공격에 대비했다.
"프로텍트!"
방어 마법, 츠바키는 모든 동료들에게 알맞은 순간에 보호막을 씌웠고. 캉- 하고 누군가 공격을 당하는 소리가 어둠 속에 퍼졌다.
퍽- 채앵-!
한차례 전투가 일어난 듯한 소리, 브랜드가 소리없이 뒤에서 덮쳐온 기사로의 습격으로부터 운좋게 벗어났다. 만약 츠바키가 걸어준 보호막이 아니었다면 브랜드는 그 자리에서 목이 베어 목숨을 잃었을 터였고. 브랜드를 덮친 기사가 방심을 하지 않고 검에 오러를 씌웠다면 속수무책으로 당했을 터였다.
이윽고 브랜드는 곧장 아나스타샤를 뒤로 물리고 그 앞에 서며 전방을 주시했다. 그와 동시에 어둠 사이로 갑옷을 입은 다수의 무리가 서서히 모습을 들냈다.
그리고 브랜드는 그들이 입은 갑옷을 보며 정체를 파악했다.
연두색의 갑옷.
이것은 황제의 직속 기사단 중 하나인, 에메랄드 기사단의 갑옷이었다.
"투항하라, 그렇다면 당장의 목숨만은 살려주겠다."
척 보아도 단장인 듯한 남자가 중후한 목소리로 브랜드 일행에게 투항을 권유했고. 브랜드는 그 목소리의 주인을 알아봤다.
그의 정체는 제국의 소드마스터 중 한명이자. 에메랄드 기사단의 단장인 청록의 기사, 체스터 바빌론이었다.
기사단장급의 인물이 기사단을 이끌고 추격해왔다. 도대체 어떻게? 브랜드는 이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브랜드가 알기론 이 근처의 국경 지대에는 수비대 말고는 주둔하고 있는 기사단이 없었다. 그렇기에 마차를 탄 상태로, 돌연변이 왕의 도움을 받아 국경에 근접한 곳으로 이동한 것이었다.
그런데 왜 이곳에에 황제 직속의 기사단이 출몰한 것인지, 브랜드는 납득할 수 없었다. 그러나 브랜드가 납득할 수 없다고 하여도 상황이 변하는 것은 아니었다.
"검을 버리고 그대로 멈춰라, 조금이라도 불순한 의도가 보인다면 그 목을 벨것이니."
툭-
브랜드는 체스터의 명령을 따라 곱게 검을 바닥에 던지듯이 내려놨다.
브랜드는 고작해야 중급 기사 정도의 수준, 이것은 절대로 낮은 경지는 아니었으나 소드마스터에 비할 바가 되지는 못 했다. 그렇기에 브랜드가 당장에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체스터의 말을 따르는 것 말고는 없었다.
그러나 그 순간이었다.
"텔레포트!"
아리스토가 사용하였던 공간을 이동하는 마법, 그 마법의 이름을 뒤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츠바키가 목청껏 외쳤고. 순식간에 커다란 빛무리가 브랜드 일행을 감쌋다.
후웅,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의 속도로 체스터의 검이 휘둘러졌고. 청록색의 검기가 허공에서 생겨나 뻗어나갔다.
하지만 이미 브랜드 일행은 사라지고 난 후였다.
철컥-
"멀리 못 갈을거다. 추격해."
당황스러울 법한데도, 체스터는 검을 검집에 집어넣으며 침착하게 명령을 내렸고. 그 휘하의 기사들은 곧장 숨겨두었던 말에 올라타 초원을 달리기 시작했다.
***
털썩, 브랜드는 느닷없이 주변의 풍경이 바뀌었음에 순간 당황하였다. 그러나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는 재빨리 상황을 파악했다.
마법, 츠바키가 텔레포트로 모두를 이동시켰다. 그것은 극악의 확률의 도박수였으나, 성공했으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소드마스터 수준의 반응 속도라면, 마법이 체 발현되기 전에 모두를 베었을 수도 있었으니 말이다.
그렇기에 브랜드는 일단 모두가 무사한지를 확인하고자 했다.
"아으... 으아..?"
소란스러움에 자다가 깬 에리엘이 옹아리를 하며 자신의 존재를 알린다. 일단 이것으로 에리엘은 확인이 되었다.
"으윽, 갑자기 무슨..."
아나스타샤 또한 목소리를 내어 자신의 존재를 알려왔다. 이걸로 4명 중에 2명은 확인이 되었다. 그리고 브랜드는 주변을 둘러보며 나머지 인원을 찾고자 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살펴보아도 현성과 츠바키가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마법이 발현되는 과정에서 무언가 착오가 일어나는 바람에 츠바키와 현성은 다른 곳으로 이동되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애초에 마법을 발현 시킨 것은 츠바키였기에, 츠바키 쪽이 잘못됐을 거란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브랜드는 우선은 지금의 인원만이라도 유지하며 몸을 숨길 곳을 찾기로 했다. 괜히 츠바키와 현성을 찾기 위해 수색을 나섰다가는, 추격대에 발견될 수도 잇었고. 그렇게 된다면 모든것이 물거품이 될테니 말이다.
브랜드는 안타깝지만 츠바키가 현성을 데리고 무사히 상황을 잘 이겨내기를 바랬다.
***
"하아... 하아...."
거친 숨소리, 츠바키는 한계에 가까운 양의 마나를 사용한 탓에 죽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기에, 위험을 무릅쓰고 시도할 수 밖에 없었고. 결국은 성공적으로 도망칠 수 있었다.
그러나 츠바키의 수준으로는 조금 전에 있던 위치로 부터 멀리 벗어나지는 못 햇다. 그렇기에 츠바키는 머뭇거림 없이 다른 동료들의 상태를 확인하고자 했고. 스스로 뺨을 툭툭 쳐 정신을 차리면서 주변을 둘러봤다.
"...어라?"
당황스런 감정이 섞인 목소리, 츠바키는 무언가 잘못됐음을 느꼈다.
없다.
누가? 다른 동료들이.
아니, 딱 한 명은 바로 옆에 죽은 듯이 누워있었다.
그것은 현성, 오로지 현성만이 츠바키와 함께 이동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다른 동료들은? 츠바키는 점점 얼굴이 굳어갔다.
아무래도 너무 급하게 마법을 쓴 탓에, 마법이 발현되는 과정에서 무언가 실수가 일어난 듯 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모두가 어딘가로 이동하기는 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츠바키는 우선 이곳으로부터 최대한 멀리 떨어지기로 결정했다. 적들이 언제 추격을 해올지 모르는 상황인데, 무작정 다른 동료들이 찾아오기만을 기다리는 것은 너무도 멍청한 생각이었다.
그렇기에 츠바키는 지친 몸으로 현성을 어깨에 짐짝을 들듯이 매었고. 부디 모두가 무사하기를 바라며 무작정 느낌이 가는 곳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 걸음,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딛을 때 마다 몸에 힘이 급격하게 빠진다. 한 번에 너무 많은 양의 마나를 사용한 탓에 몸상태가 최악에 가까웠다.
하지만 이대로 멈출 수는 없는 노릇, 츠바키는 어쩔 수 없이 현성을 땅에 내려놓았고. 두 팔을 자신의 목에 감싸고는 그대로 앞으로 걸어갔다.
여전히 힘들기는 했으나, 적어도 체중이 몸에 많이 실리지는 않았기에 이정도는 참고 움직일만 했다. 문제라면 현성의 하체의 밑부분이 바닥에 쓸리긴 했으나, 그 정도 쯤이야 이해해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움직일 수 있던 것도 얼마 이어가지 못 했다.
삐그덕
갑자기 발밑에서 들려오는 무언가 이상한 것이 밟히는 소리.
"...음?"
그 소리에 츠바키는 걸음을 멈춰서서 아래를 확인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부서지기 직전인 나무 판자가 발밑에 깔려 있었다.
이게 무엇이지? 츠바키는 혹시나 누군가 맘들어놓은 은신처인가 싶어 한걸음 물러서 나무 판자를 슬며시 들쳤고. 사람 하나가 간신히 들어갈만한 구멍이 보였다. 당연하게도 그 속은 땅 밑이었기에 너무도 어두웠고. 츠바키는 그나마 남아있는 힘을 사용하여 빛을 밝혔다.
그렇게 불빛에 구멍의 안쪽이 환하게 비추어졌고. 츠바키는 슬쩍 얼굴을 집어넣어 구멍의 내부를 살피기 시작했다.
일단 높이가 꽤나 있었으며, 어딘가로 이어져 있는 지 모를 길이 보였다. 아무래도 은신처가 맞는 듯 했기에 츠바키는 일단 이곳으로 들어가기로 결정했다.
츠바키는 우선 현성을 구멍 안으로 구겨넣어 밑으로 떨어트렸고. 현성이 안전하게 바닥을 구르는 것을 확인한 후, 츠바키 자신 또한 구멍 안으로 몸을 쑤욱 집어 넣었다.
"아얏!?"
츠바키가 착지를 잘못한 탓에 발목을 접질렀고. 순간 발목에서 부터 올라오는 고통에 반사적으로 소리를 내며 옆으로 넘어졌다.
털썩-
다행이라고는 할 수 있을런지는 모르겠지만, 츠바키가 넘어진 곳은 현성의 몸 위였고. 다행히 더이상 다치지는 않았다. 그러나 발목을 접지른 탓에 이동이 불가하게 되어버림에 상황은 가히 절망적이라고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츠바키는 언제까지고 현성의 몸위에 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기에, 옆으로 굴러 내려오고자 했다.
하지만 그 순간이었다.
텁-
"히익!?"
츠바키의 가슴 위로 얹어진 누군가의 손바닥, 이에 츠바키는 깜짝 놀라 비명을 질렀고. 당연하게도 이 공간에서 츠바키를 제외한 인물은 단 한명 뿐이었다.
"...어라?"
현성, 뜬금없는 순간에 정신을 차린 현성이 저도 모르게 뻗은 손바닥이 운이 나쁘게도 츠바키의 가슴 위로 향한 것이었다.
그렇게 현성과 츠바키는 서로를 향해 어색한 시선을 주고 받았다.
서로 처음 보는 낯선 사이.
츠바키는 의식을 잃고 있던 현성을 많이 보기는 했으나, 대화 한 번 못 해보았고. 현성은 당연하게도 츠바키를 알 리가 만무했다. 그렇기에 둘 사이에는 어색한 공기가 감돌았고. 현성은 차마 츠바키의 가슴에 얹어진 손을 땔 생각 조차 못 한 채 그대로 벙쪄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