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7화 〉Chapter 2. 아빠와 딸?
"아..."
현성은 눈을 뜨자 마자 머릿속에 스쳐지나가는 적나라한 장면에 눈앞이 어질어질했다.
비록 이성이 희미하긴 했다. 그러나 의식은 분명히 남아 있었고. 자신이 어떤 행동을 취햇는지 하나도 빠짐없이 생생하게 기억이 났다.
내가 이토록 자제력이 없는 사람이었나? 현성은 스스로를 자책하며 머리를 벽에 쥐어박았다. 아무리 약에 취하였다고 그렇지 남편이 있는 여자와 관계를 맺을 수가 있는거지? 더군다나 끝에는 스스로 허리를 움직이며 질 내부에 사정까지 해버렸다.
현성은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부터 죄책감과 자책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러다 문득 옆에 누워 있던 츠바키가 없음을 깨닫고는 방 곳곳을 둘러봤다.
츠바키는 벌써 일어난 모양인지 방안에는 없었다.
"후우.... 모르겠다 진짜.."
현성은 자포자기한 신정으로 침대에서 내려와 걸음을 옮겼다. 일단 이미 저질러버린 일, 엎질러진 물을 주워담을 수 없듯이. 뿌려버린 정액을 주워담을 수도 없지 않은가.
현성은 문을 열고 방에서 나와 계단을 내려가려고 했고. 계단의 턱에서 최소한 만나고자 하지 않았으면 했던 사람을 만났다.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어색하기 짝이 없는 말투, 여전히 얼굴은 무감각했으나 미묘하게 떨리는 눈썹이 헬렌 또한 당황하고 있음을 말해주었다. 그리고 현성은 헬렌에게 그리 좋은 시선을 보낼 수 없었다. 엄밀히 따지고 보면 이것은 약물을 악용한 강간이었다.
엄연히 도덕적으로도 법적으로도 해서는 안 될 짓임은 분명했다. 그렇기에 현성은 차게 식은 눈으로 헬렌을 바라봤다.
"괜찮아 보이시나요?"
무덤덤한 말투, 하지만 목소리에는 감정이 실려있지 않았다. 헬렌의 얼굴을 보는 순간 죄책감과 자책감이 들기는 했으나, 현성은 그것을 티내지 않았다.
일단은 헬렌이 본인의 잘못을 뉘이치기 바랬다. 아무리 강간을 당하였다고 하여도 애초에 성관계를 나누는 것을 어느정도 예상하고 온것이었다. 다만 그 과정이 잘못되었기에 이런 말을 뱉은 것이었다.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그만..."
헬렌은 허리를 직각으로 깊숙히 숙이며 사죄를 해왔다. 어찌됐든간에 진심으로 미안하기는 했나 보다. 하지만 현성은 곧바로 헬렌을 용서해줄 생각이 없었다. 그렇게 현성은 차게 식은 눈으로 헬렌에게 눈길을 한 번 주고선 스쳐지나가 계단을 타고 내려갔다.
1층은 2층과는 다르게 사우나에 들어온 것 마냥 매우 후덥지근했다. 현성은 그곳에 츠바키가 있는가 싶어 주변을 둘러봤으나 보이지 않음에 밖에 있나 싶어 문쪽으로 향했다.
그러나 뒤에서 손목을 붙잡는 헬렌의 행동에 걸음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잠깐 얘기 좀 해요.."
조금은 머뭇거리는 물음, 하지만 현성은 헬렌의 손이 신체에 닿는 순간 잠깐 머리가 멍해졌다.
텁-
저도 모르게 뻐져나간 손, 물컹한 것이 만져졌다.
"흐읏.."
헬렌이 짦막힌 신음과 함께 몸을 떤다. 현성은 그제서야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인지했다.
어째서인지 현성의 손은 헬렌의 가슴 위에 얹어저 있었다. 현성은 경악을 금치 못한 표정으로 헬렌의 손을 뿌리치고는, 잰걸음으로 뒷걸음질을 치며 가슴을 어루만졌던 자신의 손을 멍하니 바라봤다.
어째서인지 모르겠으나, 헬렌의 손이 몸에 닿는 순간 이성의 끈을 놓아버렸다. 현성은 자신의 몸에 나타난 이상한 변화를 느꼈다. 그리고 암만 생각해봐도 몸이 갑자기 이런 변화를 나타난 원인이라고는 호롤로가 몰래 먹인 미약 말고는 없었다.
"미치겠네 진짜...."
현성은 나지막히 욕을 내뱉었다. 도대체 무슨 미약을 먹였길레 사람이 이 지경이 되는걸까. 현성은 원망섞인 눈초리로 헬렌을 노려봤다.
헬렌은 찔리는 것이 있었는지 현성의 시선을 피해 부자연스럽게 주변에 있던 검 한 자루를 손에 쥐며 이리저리 살펴보는 시늉을 했다. 이윽고 현성은 욱한 마음에 헬렌에게 다가가 검을 뺏어들었다. 헬렌은 충분히 방어할 수 있었으나 그러지 못 했다.
"도대체 저한테 뭘 먹인겁니까?"
현성은 차갑게 헬렌에게 물었다. 헬렌은 다리를 베베꼬며 팔짱을 꼈다.
"그 이가 직접 제작한 미약을.."
의외로 순순히 고백한다. 하지만 현성이 원하는 대답은 이런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미약을 먹였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는데 또 들어서 무엇을 한단 말인가. 현성이 듣고 싶었던 것은 도대체 어떤 종류의 미약을 먹인 것이냐였다.
"무슨 미약을 먹였길레, 제 몸이 이 지경이 된겁니까? 무슨 몸이 닿는 것만으로도 사람이..."
현성은 뒷말을 아꼈다. 더 말할 것도 없이 조금 전에 헬렌에게 저질러 버렸기 때문이었다. 이에 헬렌은 고개를 푹 숙이고선 두 손을 부비적 부비적 비벼댔다. 그러자 가슴이 한데 모이며 가슴골이 강조되었고. 현성은 그 때문인지 자꾸만 아래쪽에 힘이 들어갔다.
"며칠 동안 몸이 쉽게 성적 흥분을 느끼게 만드는 미약이라고 들었어요.."
"하아.."
현성은 헬렌의 대답을 듣는 순간 짜증이 솟구쳤다. 하루도 아니고 며칠이나 이런 몸으로 지내야 한다니. 그게 말인지 방구인지 햇갈릴 정도로 얼척이 없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약을 먹인 것인지 모르겠다. 애초에 성적인 관게를 맺어 아이를 가지고 싶다면 호롤로 본인이 직접 섹스를 하던지 뭔 짓을 하던지 하면 되는 것 아닌가.
부녀 지간이 아니라 부부 사이라면 그러면 되는 것이었다. 현성은 호롤로와 헬렌이 도대체 왜 이런 짓을 벌인 것인지 이해하려고 해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디서 부터 잘못됐다고 말해야 되는지 감조차 잡을 수 없었다. 애초에 호롤로가 이야기한 것들 중에서 진실이 단 하나라도 있을 지 부터가 의문이었다.
"후우, 미약을 해독하는 약 같은 거라도 없습니까?"
우선 현성은 몸안에 스며든 미약의 약효를 없에고 싶었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예상했던 대로 부정의 말이었다.
"아마 없을 겁니다.. 그 이가 말하길 미약은 원래 약효를 없에는걸 고려하지 않고 만든다고..."
"그러면 저는 며칠 동안 이 상태로 있어야 된다는 거네요?"
현성은 다소 신경질적인 어투로 헬렌에게 질책하듯 말했다. 당연히 헬렌은 어쩔 줄 모른채 고개를 숙여 얼굴을 감추기에 급급했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덜컥-
굳게 닫혀있던 문이 갑자기 열리며 누군가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앗...!?"
츠바키의 목소리, 츠바키는 현성의 뒷모습을 보자마자 놀란 감정을 숨기지 못 한채 당황섞인 소리를 내었고. 현성은 그 소리에 반응하여 등을 돌려 츠바키를 바라봤다.
츠바키는 다리를 접지른 것이 회복된 모양인지 멀쩡히 걷고 있었다. 또한 입고 있는 옷이 사뭇 달라졌다.
아니, 달라졌다기 보다는 무언가 추가가 되었다.
회색으로 덧칠 되어 은광이 빛나는 갑옷, 전신이 아닌 가슴 부분과 허벅지에만 부분적으로 갑옷을 덧입은 상태였다. 갑옷은 출처는 아마도 호롤로 혹은 헬렌임이 분명했다.
그리고 현성은 츠바키의 표정에서 수상함을 느꼈다. 얼굴이 붉어져서는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마치 무언가 마음에 걸리는게 있는 사람 마냥.
당연히 현성은 츠바키가 왜 그러는 지 알 수 없었다.
"조, 좋은 아침이야. 현성쿤!"
말하는 것 또한 어색하기 그지 없다. 현성은 게슴츠레 츠바키를 바라보며 서서히 다가가 바로 앞에 섰다.
"어디 아퍼? 뭔가 이상한데..."
현성은 혹여나 츠바키가 어디 아픈건가 싶어 걱정되어 넌지시 물었다. 그러나 츠바키는 현성이 지척까지 다가오자 더 더욱 얼굴을 붉게 물들이고선 고개를 푹 숙였다.
헬렌도 그렇고 츠바키도 그렇고. 왜 얼굴을 붉게 물들이고선 고개를 내리는 걸까. 헬렌의 경우에는 그렇고 그런 짓을 했으니 이해가 갔다만, 츠바키는 왜 이러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현성은 츠바키가 열이 있나 싶어 슬며시 손을 뻗어 이마에 손을 얹으려고 했다. 하지만 자신의 몸이 정상적인 상태가 아님을 깨닫고선 손을 급히 거두었다.
"으윽..."
의미를 알 수 없는 괴상한 소리, 현성은 츠바키의 입에서 흘러나온 소리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정말로 어디 아픈게 아닌가 싶었다. 만약 미약만 아니었다면 열이 있는지라도 확인해 보았겠지만 지금은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츠바키는 어색하기 짝이 없는 작위적인 웃음을 지으며 두 손에 주먹을 쥐었고. 그대로 들어올려 뻗뻗하기 그지 없는 자세로 가슴팍에 모았다.
"현성쿤! 나는 현성쿤이 무슨 짓을 해도 이해할 수 있어!"
"...응?"
많은 것이 생략되어 있는 말. 자세한 내용은 없고 두루뭉실하게 말하는 츠바키의 언행에 현성은 문득 불안한 예감이 머릿속에 가득 찼다.
혹시 헬렌과 관계를 나누던 것을 본게 아닌가.
바로 옆에서 그런 격렬한 행위를 했으니 어찌보면 당연한 얘기였다. 만약 그런것이라면 츠바키가 저런 행동을 보이는 것은 당연했다.
잠에서 깨어났는데 친구가 바로 옆에서 적나라하게 성관계를 하고 있는걸 본다면 무척이나 어이가 없을 터였다. 현성 또한 엘프의 영역에서 비슷한 경험을 했기에 그 마음을 어느정도 이해했다.
그리고 현성은 츠바키가 그 모습을 보았을거란 생각에 수치김과 부끄러움이 미친듯이 솓구쳐서 점점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급기야 츠바키는 눈동자가 이곳저곳으로 바쁘게 움직이며 시선을 어디에 둘지 갈피를 못 잡은 채, 어리버리한 모습으로 산만하게 손을 이리저리 휘저으며 말을 이었다.
"그.. 그러니까 나는 신경 쓰지 않아도 돼, 현성쿤! 나는 언제나 현성쿤을 믿고 있으니까..!"
"아니.. 잠깐만..."
츠바키는 뭐라고 말하는걸까,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니. 신경이 쓰이지 않을 리가 없지 않은가. 왜 그런것을 저렇게 열정적으로 선언하듯이 말하는지, 더군다나 만난지 얼마나 되었다고 말이다. 이에 현성은 정신이 혼미하다 못 해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리고 현성은 일단 츠바키를 진정시키고 대화하고자 했다. 일단 오해를 풀어야 되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때 그 상황을 뭐라고 설명해야 되는걸까.
미약에 당해 제정신이 아닌 상태라고 말해야 되는가? 상식적으로 이것이 맞았다. 하지만 왜인지는 몰라도 현성은 헬렌과 호롤로 사이에 무슨 일이 있는 건지 알고 싶었다. 만약 여기서 그것을 밝힌다면 츠바키는 곧장 이곳을 떠나려고 할 터였다.
물론 현성도 자신의 생각이 정상적인 사고가 아님은 알고 있었다. 따지고 보면 강간을 당한 것인데도 무작정 둘 사이의 일을 해결하려고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래도 현성의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현성은 우선 츠바키를 진정 시키고자 했다. 하지만 신체가 닿으면 안 되었기에 오로지 말로만으로 츠바키를 진정 시켜야 됐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순간은 언제나 갑작스레 이어지는 법이었다.
텁-
누군가 손목을 붙잡는다. 현성은 그것이 츠바키의 손임을 인지했고. 짧은 순간에 망했음을 느꼈다.
그리고 현성은 손목을 붙잡은 츠바키를 그대로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갑옷을 덧입은 상태였기에 다행히도 가슴이 닿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으나, 현성은 한 순간에 몸이 달아올라 이성과 본능의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었다.
현성은 당장이라도 츠바키를 덮치고 싶은 마음이 물씬 올라왔다. 그러나 반 쯤 남아있던 이성이 그것을 제지했다.
그런 상황에서 현성은 끈적한 시선으로 츠바키의 입술을 시야에 담았다.
장미와도 같이 짙은 붉은색의 입술, 츠바키의 입술은 무척이나 탐스러워 보였고. 츠바키는 갑자스레 현성이 저돌적으로 덮쳐옴에 뭐라 반응 조차 못한 채로 사고가 정지되어 몸이 굳어버렸다.
이윽고 현성은 츠바키의 입술을 탐하기 위해 천천히 목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입술이 범해지기 전에 츠바키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고. 있는 힘껏 현성을 몸으로 밀어내며 목청껏 외쳤다.
"그.. 그만!!"
쿵, 현성은 츠바키에게 밀려 뒤로 넘어졌고. 그제서야 흐릿해져가던 이성을 되찾을 수 있었다..
"아으... 현성쿤 방금 무슨 짓을 하려고..?"
츠바키가 충격받은 얼굴을 하고선 현성을 내려다봤다. 츠바키의 두 뺨에는 선명한 홍조가 드리워져 있었다.
그리고 현성은 자신의 우발적인 행동에 자괴감이 들어 손바닥으로 이마를 지그시 눌르며 인상을 좁혔다.
"하아... 씨발.."
씨발이라는 험악한 욕짓거리. 하지만 츠바키는 그 말의 뜻을 모르기에 단순히 현성이 스스로를 자책하고 있다고만 받아들였고. 그것은 얼추 맞았다.
지금 현성은 살면서 느껴본 자괴감 중에서 가장 커다란 자괴감에 속으로 몸부림을 치며 자살 충동이 들 정도였다.
그러다 문득, 누군가 쏜살같이 튀어나가는 소리가 들려왔고. 현성은 조심스레 고개를 들어 츠바키가 있던 곳을 바라봤다.
츠바키는 그 자리에서 도망치고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