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5화 〉Chapter 2.5 또 다른 용사들.
"아으...!"
"제발.. 가만히 좀!"
브랜드는 칭얼거리는 에리엘의 입을 틀어막으며 나무의 기둥에 뚫린 커다란 구멍에 몸을 숨겼고. 그 옆에서 아나스타샤가 숨을 죽인 채로 바깥을 주시하고 있었다.
에메랄드 기사단으로 부터 도망가는 것은 불가능한 일, 또한 브랜드는 지금이 정확히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것인 마법을 사용한 츠바키만이 알 수 있는 것인데, 안타깝지만 츠바키는 다른 곳으로 전이된 상태였다. 그렇기에 브랜드는 숲에 널리고 널린 나무들에 뚫린 구멍에 몸을 숨긴 것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보름달이 떠올른 까만 밤하늘에 어느샌가 해가 드리웠고 밝은 햇빛이 내리쬐었다.
다행히도 에메랄드 기사단의 수색에 난항을 겪고 있는 것인지 여태까지 들키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밖을 나돌아다니기에는 적들이 어느곳에 있을 지 모르는 일이었기에 차마 그럴 수 조차 없었다.
그러나 언제까지고 이곳에 틀어박혀 지레 겁먹은 토끼마냥 꽁꽁 숨어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츠바키의 갑작스런 마법으로인해 전이가 되면서 짐들을 모두 잃어버린 상태였다. 있는 것이라고는 검 한 자루와 지도 뿐, 식량이나 물 같은 것은 전부 주머니에 넣어두고 다녔기에 함께 전이되지 않았다.
다행히도 브랜드와 아나스타샤는 각각 오러와 마나를 다룰 줄 알기에 물과 식량 없이도 멀쩡한 상태로 며칠 정도는 가뿐히 버틸 수 있었고. 에리엘은 그것에 더 나아가서 요정에 뿌리를 둔 엘프였기에 음식을 먹지 않아도 생명에는 전혀 지장이 없었다.
이정도면 그리 최악의 상황은 아니라 볼 수 있을 것 같았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악의 상황은 맞았다.
한정된 공간, 주변의 정보를 얻을 수 없는 삼방향이 꽉 막힌 좁은 장소에서 언제 어디서 덮쳐올지 모르는 적습에 신경을 쓰고 있는 것만으로도 정신적으로 피폐해지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브랜드 씨..! 왔어요...!"
바깥을 살피던 아나스타샤가 조용하면서도 다급하게 브랜드에게 누군가가 왔음을 알렸고. 누가 왔는지 굳이 추가적인 설명을 붙이지 않아도 쉬이 유추할 수 있었다. 곧바로 브랜드는 아나스타샤에게 뒤로 빠지라는 손짓을 보냄과 동시에 에리엘을 맡겼고. 나무의 기둥에 비스듬하게 세워둔 검을 손에 쥐었다.
"언제든지 싸울 수 있도록 준비해놔."
여기서 최고의 전력은 아나스타샤라고 브랜드는 판단했다. 그렇기에 아나스타샤에게 공격과 방어를 맡기는 것이 호율적이었고. 브랜드는 근처에 온 적들의 동태를 살피며 언제든지 판단을 내릴 준비를 했다. 수틀리면 머릿수라도 줄이고 싸우는 것이 그나마 살아남을 가능성이 있었으니까.
이윽고 브랜드는 구멍 사이로 슬쩍 얼굴을 내비치며 바깥을 살폈다. 역시나 에메랄드 기사단의 기사들이 이곳까지 온 상태였고. 각자 흩어져서 수색을 하고 있는 것인지 머릿수는 고작 2명에 불과했다.
브랜드가 알기로 에메랄드 기사단의 총 인원은 서른 명, 만약 2인 1조로 움직이고 있다면 15개의 무리가 수색을 하고 있다는 얘기였고. 수색조가 많다는 것은 서로 근접한 거리를 유지하며 넓은 범위를 수색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얼핏보면 다행이라 볼 수 있었으나 좋지 않은 상황이라 볼 수 있었다.
물론 숫자가 적었기에 저들을 조용히 처리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했다. 하지만 다른 무리가 정확히 어느 곳에서 수색을 하고 있는지 모르니, 저들을 조용히 처리하고 움직인다고 하더라도 도중에 다른 적들의 수색을 회피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고. 결국에는 사방에서 포위가 되어 붙잡힐 가능성이 컸다.
그러나 문득, 브랜드는 나무의 벽 너머로 느껴지는 기운에 다급히 아나스타샤와 에리엘의 등뒤에 팔을 걸어 아래 숙이게 만들었고. 자신 또한 다급히 고개를 숙였다.
서걱-
무언가가 베어지는 소리, 브랜드는 바로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어렴풋이 상황이 비극에 치달으고 있음을 느꼈다.
쿠웅, 일행들을 숨겨주던 나무가 단 번에 베어 바닥에 쓰러졌고. 흙먼지가 자욱하게 주변을 매웠다. 이윽고 흙먼지가 거두어졌을 때에는 어디에서 나타났는지 모를 수십명의 기사들이 주변을 꽁꽁 둘러싼 상황이었다.
"워후... 언제 이렇게 왔다냐.."
"아으..?"
"...어떡하죠, 브랜드 씨?"
각자 다른 말을 뱉었으나 모두가 당황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같았다.
그리고 브랜드는 혹여나 오러를 활용해 주변의 상황을 파악했다가는 들킬 것 같아 그러지 않았던 것을 후회했다. 이것은 너무도 짧은 생각이었기 때문이었다.
오러를 활용에 주변의 상황을 파악하는 것은 브랜드 혼자만이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이것은 에메랄드 기사단의 누구라도 할 수 있는 행동이었으며, 특히나 소드마스터 체스터 바빌론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음에도 그랬다는 것은 무척이나 미련한 판단이었다.
브랜드는 정식으로 기사가 된 후에는 돌연변이들을 엘프의 영역으로 보내는 임무를 맡아왔기에 실전과는 많이 동떨어진 상태였고. 그렇기에 이런 쪽으로 깊이 있게 판단을 하지 못한 것이었다. 이것은 분명하게 자신의 잘못이라 브랜드는 자책했다.
차라리 일찍이 걸음을 옮겨 멀리 도망치는 것이 좋았을 터였다. 하지만 과거를 후회해봤자 현실을 달라지지 않는 법, 브랜드는 검을 치겨들며 용맹한 모습을 보였다.
허나 이것도 잠시, 브랜드는 무거운 분위기를 흩뿌리며 앞으로 나서는 체스터 바빌론의 모습에 잔뜩 주눅이 들 수 밖에 없었다.
"검을 버려라. 더 이상의 자비는 없다."
바빌론 체스터가 무뚝뚝하게 명령조로 말을 던짐에 브랜드는 일말의 고민도 없이 검을 버리고는 빈손을 보이며 팔을 위로 들어올렸다.
브랜드의 선택은 옳은 선택이었다. 소드마스터인 체스터 바빌론이 진심으로 검을 휘두룬다면 브랜드는 뜬 눈으로 목이 바닥을 굴렀을 테니 말이다.
이윽고 체스터 바빌론은 직접 발걸음을 옮겨 뒷짐을 진 채로 브랜드의 앞에 마주섰다. 언뜻보면 무방비한 모습이라 볼 수 있었으나, 이것은 너 따위가 덤벼도 얼마든지 제압할 수 있다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그리고 그는 근엄한 목소리로 브랜드의 두 눈을 똑바로 마주하며 입을 열었다.
"충성을 저버리고 폐하의 은혜를 저버린 죄, 그대의 죄는 즉결 처형을 당하여도 마땅하다. 하지만 폐하께서는 네 놈의 처형을 황성에서 직접 두 눈으로 보겠다 말하셨다. 또한 브랜드 라인하르트, 폐하께서 너의 귀족 신분을 폐하셨다. 이 순간부터 너는 제국의 일반 시민으로 강등 됨과 동시에 반역죄를 저지른 죄인의 신분이 되었다. 동의하는가?"
복잡하기 짝이 없는 말들, 귀족의 신분이니 뭐니 어쩌고 저쩌고 떠들어 대지만 브랜드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귀족임을 뜻하는 라인하르트라는 성, 어차피 자신 밖에 남지 않은 약소 가문인데 성이 무엇이 중요하겠는가. 브랜드는 자신의 귀족 신분에 대하여 한 치의 미련도 아쉬움도 없었다. 그렇기에 묵묵히 체스터 바빌론이 하는 이야기를 한 귀로 듣고선 한 귀로 흘렸다. 어차피 결과가 정해져 있는 이야기인데 들어서 무엇을 하겠는가.
물론 그렇다고 해서 브랜드가 현재의 상황에 수긍한 것은 아니었다. 지금은 그저 잠시 수그릴 뿐이었다. 하지만 모두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플레임 윕!"
후웅-
뒤에서 숨을 죽이고 상황을 지켜보던 아나스타샤가 돌발적으로 마법명을 외쳤고. 붉은색의 화염으로 이루어진 채찍이 체스터를 향해 S자를 그리며 나아갔다.
허나 아나스타샤의 빈틈을 노린 공격은 체스터의 코앞에서 한 줌의 재가 되어 순식간에 사라졌다. 어느샌가 체스터의 몸에는 밝은 연두색 빛을 띄는 오러가 둘러져 있었다. 그리고 체스터는 묵묵히 자신을 공격한 아나스타샤를 바라보며 미약하게 인상을 좁혔다.
체스터의 기억 속에 아나스타샤와 관련된 명령은 없었다.
"...저 여자는 폐하께서 내린 수배 명령에 포함되지 않는군."
스윽, 체스터는 슬며시 한 쪽 손을 들어올렸고. 그 행동의 의미는 단순했다.
처형, 체스터는 아나스타샤를 즉결 처형할 것을 명령했고. 그러자 주변을 포위하던 기사들 중에서 몇몇이 절도있는 동작으로 튀어나와 검을 뽑으며 아나스타샤를 중심으로 둘러쌌다.
"어..?"
아나스타샤는 자신의 공격이 턱도 없이 막혔다는 것에 벙찐 채로 입을 다 물지 못 했다.
플레임 윕이라는 마법, 그것은 아나스타샤가 사용할 수 있는 마법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마법 중 하나였고. 광활한 범위에 피해를 줄 수 있는 마법은 아니지만, 그만큼 위력을 한 곳에 집중적으로 모은 마법이었다. 그 위력은 커다란 바위 조차도 한 방에 산산조각을 낼 수 있을 정도였고. 지금은 그보다 위력을 높여 최대치까지 마나를 끌어모아 발현 시켰다. 아마 그 위력은 굳건한 성의 성문을 두 동강을 낼 정도로 강할 터였다.
그런데 그런 마법을 체스터는 눈 하나 꿈쩍 안 하고 막아내었다. 이것은 아나스타샤에게 있어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것이었다. 처음 보았을 때부터 심상치 않은 존재임은 어렴풋이 인지하고 있었으나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이윽고 아나스타샤는 검을 자신에게 겨누며 점점 거리를 좁혀오는 무리에 머릿속이 새하얗게 번졌다. 다른 마법을 발현시키려고 해도 체스터가 보내오는 눈빛에 몸이 굳어버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순간이었다.
"체스터 단장님! 뒷 쪽에서 무장을 한 수십 명의 사람들이 이곳으로 오고 있습니다!"
뒤에 있던 한 기사의 외침, 그 외침에 현장에 있던 모두의 시선이 한 곳으로 고정되었다.
그곳에는 정말로 각양각색의 무기와 갑옷을 입은 수많은 이들이 난잡하게 무리를 지어 느긋하게 걸어오고 있었다. 이에 기사들은 설마 도적 때인가 싶었으나, 제국의 기사단임을 증명하는 갑옷을 입고 있는데 미친게 아닌 이상 제 발로 찾아올 리가 없었다.
그리고 차츰 거리가 좁혀질 때즘, 하나둘씩 그들의 얼굴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이봐, 저거 차이코프아냐?"
"그 옆에는 푸틴인 것 같은데?
"저거 맨 앞에 있는거... 지혜 님 아니야?"
"에이.. 지혜 님이라면 분명 최전방에서 마족들을 막고 있을텐데 왜 여기 계시겠어?"
하나둘 씩 튀어나오는 이름들, 그들의 정체는 별 것 없었다.
이 세계를 구원하기로 온 존재들.
"용사.. 용사들입니다. 체스터 님!"
용사, 그들은 용사라는 이름하에 다른 세계에서 온 이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