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6화 〉Chapter 2.5 또 다른 용사들.
체스터 바빌론, 그는 바빌론 공작 가문의 장남이자 황제의 직속 기사단인 에메랄드 기사단의 단장으로 제국의 소드마스터들 중 한명이었다.
바빌론 공작 가문은 카인드니안 제국의 황제, 실피드가 제국을 건립하기 전 부터 충성을 맹새한 가문으로. 본래는 변방의 작은 귀족이었으나 그 공을 인정 받아 공작이라는 작위를 얻은 가문이었다. 그러한 바빌론 공작 가문의 권력과 권위는 당연하게도 황제인 실피드 다음으로 높았으며, 제국의 북부 영토의 반이 바빌론 공작 가문의 영지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바빌론 공작 가문에서 체스터는 서른이라는 어린 나이에 황제의 직속 기사단의 단장이자 제국 내에서 열 명 정도 밖에 되지 않는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복덩어리나 마찬가지였고. 장차 가주가 되어 바빌론 공작 가문을 이끌 뛰어난 직계 혈통으로 인정받아 왔으며, 황제인 실피드 마저도 체스터를 최측근으로 들이면서 제국 내에서의 위치를 확고히 하게 되었다.
또한 체스터는 젊은 나이에 입신양명 하였음에도 자신 보다 아래의 것을 막 대하지 않았으며 오로지 제국의 법을 중심으로 사고하는 철저한 성격의 소유자이자 강자에게 할 말을 하면서도 약자를 챙기는 뛰어난 인품까지 겸비한 인재였다. 그렇기에 기사단의 단원들은 물론 제국 시민들까지도 체스터를 찬양하기에 바빳고. 그 누구도 체스터를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오로지 딱 한 명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체스, 오랜만이네."
포위를 한 기사들을 뚫고 나와 체스터에게 친숙하게 말을 건내는 한 여자.
그녀의 이름은 이지혜, 제국의 유일한 검성이자 장차 마왕을 무찌를 최강의 용사라 불리우는 여자. 그녀만큼은 바빌론과 대등하거나 혹은 우위에 있다고 볼 수 있는 존재였다.
주위를 둘러싼 기사들 마저도 알아서 길을 비킬 정도로 말이다.
바빌론과 이지혜는 그리 나쁜 사이가 아니었다. 둘은 친구까지는 아니더라도 동료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꽤나 가까우면서도 먼 애매한 사이였고. 바빌론은 자신의 이름을 마음대로 줄여서 부르는 이지혜에게 무뚝뚝한 얼굴을 하고선 능숙하게 침묵으로 일관했다. 서로 어느정도 친해진 순간부터 멋대로 이름을 줄여서 불러왔기에 이제는 뭐라 반응하기도 지친 것이었다.
"오랜만에 보는데 그렇게 무뚝뚝하게 있을거야?"
이지혜는 그 누구와 대화하더라도 10년 지기 친구라도 되는 것 마냥 살갑게 대하는 성격을 보유한 여자였고. 그러면서도 바빌론과 마찬가지로 강자에게 할 말을 하면서도 약자의 편을 들 줄 아는 인품을 가져 제국 내의 평판 또한 바빌론만큼 좋았다. 이러한 점들이 바빌론이 이지혜라는 여자가 자신에게 함부로 대하더라도 밀어내지 않는 이유였다.
그녀는 바빌론에게 있어 평생을 함께할 친구 같은 존재는 아니었으나, 적어도 언제든지 등뒤를 맡길 수 있는 믿음직한 동료였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만큼은 아니었다.
본래대로라면 이지혜는 황제의 명을 받아 제국의 영토를 습격한 마족과의 전투를 최대한 빨리 마무리하고 추후 벌어질 전쟁을 위해 재정비를 하고 있었어야 됐다. 분명 그래야만 될텐데 왜 제국의 중심으로 향하는 국경 부근인 이곳에 다른 용사들을 이끌고 찾아온 것일까.
또한 체스터는 황제인 실피드가 직접 내린 임무를 수행하는 중이었다. 그렇기에 지금 이 상황은 아무리 믿을 수 있는 동료라 하여도 조금은 언짢을 수 밖에 없었다.
"지혜, 그대가 왜 이곳에 있는가?"
체스터는 마침내 이지혜를 향해 무거운 입을 열었다. 그러자 이지혜는 살가운 눈웃음을 지으며 특유의 표정을 지었고.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허리춤에 차여진 검의 손잡이 위로 손을 얹었다.
그리고 이것은 주위에 있던 기사들로 하여금 원초적인 공포를 느끼게 만드는 행위였다.
그녀가 검을 진심으로 휘두룬다면 기사들은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눈 깜짝할 사이에 죽음을 맞이해야만 했으니까. 이런 상황에 체스터는 근엄한 분위기를 내뿜으며 한 발자국 앞으로 가 이지혜를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그런 험악한 장난은 그만둬라. 내 부하들이 두려워 하니."
엄밀히 말하면 지금 기사들이 보인 모습은 절대로 보여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체스터는 이들에게 있어 이지혜가 가진 무력이 얼마나 위협적인지 알고 있었기에 부하들을 탓하는 것이 아닌, 이지혜의 행동을 제지했다.
이윽고 이지혜는 장난스레 웃으며 검에서 손을 때어냈고. 뭘 그렇게 정색을 하냐는 듯이 체스터의 어깨 위로 손을 올리며 다소 냉소적인 어투로 말을 뱉었다.
"그게 아니지, 체스. 내가 왜 이곳에 있는지 묻는게 아니라, 우리가 왜 여기에 있는지 물어야 되는거 아니야?"
개인이 아니라 다수, 체스터는 조금 먼 거리에서 저들끼리 대화를 나누는 수십명의 용사들을 무감정한 눈으로 담아냈다. 그들은 하나같이 제국에 얼굴을 널리 알리며 적지않은 공로를 세운 이들이었다.
체스터는 확실히 자신의 질문이 옳지 않았음을 인지했다.
"그대들은 왜 이곳에 있는 것이지?"
"그래, 그래야지. 그런데 그 질문의 답은 너가 가장 잘 알고 있어야 되는게 아닐까 싶은데?"
비아냥 되는게 아닐까 싶은 말들, 하지만 이지혜의 표정은 더 할 나위 없이 당당했다. 언뜻 보면 어떤 비꼼의 의도가 전혀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리고 체스터는 제국의 용사들이 왜 무리를 지어 국경에 왔는지 한 번 생각을 해보았다.
그러다 문득 떠오르는 한가지의 것이 있었다.
"설마 그 허무맹랑한 소문 때문인 것인가?"
허무맹랑한 소문, 체스터는 대륙의 다른 왕국이 제국에 선전포고를 하였던 것을 떠올랐고. 그와 함께 그 이유 또한 떠올렸다.
그것은 제국이 마족과 손을 잡았다는 것, 체스터는 그것이 말도 안 되는 일이라 여기며 다른 왕국이 제국이 가진 힘을 두려워하여 벌인 일이라 여겼으며. 그런 결정을 내린 왕국의 왕들을 마족이라는 공공의 적이 있음에도 내부에서 분열을 일으키려는 족속들이라 단정했다.
그도 그럴것이 얼마전에 마족이 대군을 이끌고 제국을 침략하였는데 마족과 손을 잡았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일이지 않은가.
황제인 실피드 또한 다른 왕국이 든 근거를 확고하게 부정하며 얼마든지 전쟁을 받아들이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물론 이것은 새빨간 거짓말이지만, 체스터는 황제에게 충성을 맹새한 가문의 일원이었다. 그렇기에 체스터는 전적으로 황제인 실피드의 말이 무조건적으로 옳을 것이라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었다.
결론적으로 이러한 성향과 앞서 마족이 제국을 침략한 점들이 합쳐져 체스터는 완전히 제국이 선이고 다른 왕국이 악이라 단정 지었다.
그리고 체스터는 설마 이지혜가 그런 허무맹랑한 근거없는 소문 때문에 제국을 반할 리가 없다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체스터의 생각은 완전히 빗나갔다.
"체스, 황제는 마족과 손을 잡았어. 우리는 마족과 손을 잡은 제국을 위해서 희생할 수 없어."
"웃기는 소리 하지 마라. 폐하께서는 그러실 분이 아니다."
체스터는 처음으로 표정의 변화를 보이며 이지혜의 말을 부정했다.
지금의 체스터는 이지혜에게 실망이란 감정을 품었다. 이지혜는 실피드가 특히나 아끼는 용사들 중 한명이었고. 용사들 중에서 최초로 작위와 영지를 받은 존재였다. 그것도 여자의 몸으로 말이다.
그런 커다란 은혜를 받았는데, 제국을 저버리는 말을 하는 것이었다.
"부정하지마. 이미 우리 측에서 조사해서 결론을 낸 상태니까."
"그대야 말로 폐하께서 제국민들에게 배푼 은혜를 부정하지 마라. 폐하께서는 절대로 그러실 분이 아니다!"
쿠웅-
또 다시 들려오는 이지혜의 불경한 말에 체스터는 거칠게 오러를 뿜어내며 자신의 감정을 드러냈다. 이에 이지혜를 제외한 주변의 모든 이들이 무릎을 꿇거나 혹은 바닥을 기었고. 에리엘과 아나스타샤는 숨통이 조여옴에 스스로의 목덜미를 부여잡았다.
적의가 담긴 소드마스터의 오러, 이것은 오러를 익힌 기사라 하여도 버티기 힘든 것이었고. 특히나 마족의 저주로인해 힘을 잃은 에리엘과 오러 자체를 처음 느껴보는 아나스타샤에게는 치명적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그런 혼잡한 상황 속에서 이지혜는 냉소적이게 입꼬리를 올렸다. 이지혜의 성격은 누구에게나 상냥하고 살가운 편이었으나 그와는 반대 되는 외모를 소유했다.
짙은 눈썹과 고양잇과의 동물 처럼 날카롭게 올라간 눈꼬리, 눈동자에는 무감각한 검은자가 자리잡고 있었고. 다부진 체격은 아니었으나 슬림한 몸매에 갖은 전투를 통해 실전형으로 붙은 근육이 보기 좋게 자리잡았으며 불륨감 있는 몸매와 왠만한 제국 남자의 평균 키보다 살짝 작은 170 초반의 키로인해 외모만 보았을 때에는 날카로우면서 차가워 보이는 인상의 미녀였다. 다만 겉으로 흘러나오는 분위기 자체가 밝았기에 차가운 인상이 사그라 들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이지혜는 안타깝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이며 남들은 기진맥진해 하고 있는 상황 속에서도 여유롭게 체스터에게 충고의 말을 건냈다.
"체스, 너도 알잖아. 넌 내 상대가 안 되는거. 그러니까 좋게 말할 때 저기 세 명은 냅두고 돌아가. 너하고 싸우고 싶지는 않으니까."
여유에 가득찬 말들.
상대가 안 된다. 이것은 체스터 또한 잘 알고 있었다.
체스터는 소드마스터, 이지혜는 검성으로 체스터 보다도 경지가 높았다.
언뜻 보면 비슷한 것이라 느낄 수도 있었으나, 두 경지에는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소드마스터는 검과 오러, 두 가지의 숙련도와 위력을 본인의 한계치까지 끌어올린 존재임과 동시에 재능을 비롯한 한계치가 남들보다 압도적으로 높은 이들이었다. 그리고 검성은 소드마스터의 경지에서 도달하여 그 한계 마저도 뛰어넘은 존재, 검성의 경지에 도달한 이들은 검과 몸이 하나가 된 것 처럼 물 흐르듯이 휘둘렀으며. 굳이 오러를 발현하고자 하는 의지가 없더라도 무의식 속에 오러를 상황에 맞게 발현시킬 수 있는 경지였다.
그렇기에 체스터는 무슨 짓을 하더라도 이지혜를 이길 수 없었다. 몇 합 정도야 대등하게 싸울 수는 있겠지만 시간이 흐르면 흐를 수록 밀릴 것이 분명했다.
오러를 발현하는 것은 엄청난 집중력이 드는 일이었으니 말이다. 체스터는 오러를 발현 시키기 위해서 끊임없이 집중을 해야하는 반면, 이지혜는 굳이 집중을 하지 않더라도 오러가 감각에 따라 무의식 중에 발현되니 장기전으로 갈 수록 체스터가 불리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허나 체스터는 불리할게 뻔한 상황임에도 조금도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이것은 황제가 직접 내린 칙령, 목숨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완료해야 되는 것이었다.
철컥, 체스터는 검을 뽑아들며 자신 또한 이지혜와 마찬가지로 마지막 경고를 뱉었다.
"그대야 말로 돌아가라. 지금이라도 돌아간다면 폐하께서 그대들이 쌓은 공로를 봐서라도 자비를 배풀어 주실것이다."
"미안, 체스. 그렇게는 못 해. 나는 사악한 마족으로 부터 이 세계를 구하기 위해 싸우고 있는 거라서. 마족과 손을 잡은 황제의 밑에서 싸울 수 없어. 이 생각은 저기 있는 내 동료들도 똑같이 생각하고 부분이야."
체스터의 경고에도 이지혜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리고 체스터 또한 절대 굽힐 생각이 없었다.
그렇다면 결론은 정해져 있었다.
스릉, 이지혜 또한 마지 못해 검을 뽑아들며 체스터와 대치했다.
이지혜는 정말로 체스터와 싸우고 싶지 않았다. 그렇기에 최대한 말로써 설득해보려 했으나 역시나 체스터는 제국에 목숨을 바칠 정도로 극단적인 성정을 가진 남자였기에 상황이 좋게 흘러가지 않았다.
한편으로 이지혜는 주변에 괴로워하는 기사들을 보며 최대한 빨리 끝내고자 했다. 조사 결과 마족과 손을 잡은 것은 황제의 독단적인 결정, 저들에게는 죄가 없었다. 체스터에게도 죄가 없었다.
체스터의 잘못이라면 오로지 황제를 신뢰하여 그런 쪽으로 밖에 생각을 하지 않는 극단적으로 황제 우호적인 인물이라는 점이었다.
애초에 이지혜는 카인드니안 제국의 황제인 실피드를 그리 좋게 보지는 않았다.
그가 황제의 자리에 오른 배경과 그 후에 저지른 짓을 보면 역겹기 짝이 없었기 때문이었고. 자신과 같은 지구 출신의 이들 중에서 마나라는 힘을 부여받은 사람들을 돌연변이라는 명명하며 핍박하는 것이 혐오스럽기 그지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진작에 뒤짚어 엎어 버리고 싶었으나, 마족의 습격이 끊이지 않았기에 그저 방관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황제가 마족과 손을 잡았다는 사실이 들려오자 이지혜는 완전히 황제에게 반할 수 밖에 없게 만들었다.
더 이상 제국을 위해 희생할 이유는 없다.
그렇기에 이지혜는 자신의 동료들을 데리고 제국에서 떠나기로 한 것이었고. 황제가 엘프의 영역에서 살아남은 기사와 엘프를 추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것을 알게 되어. 제국에서 벗어나 다른 왕국으로 향하던 도중에 겸사겸사 뒤늦게 구조하러 온 것이었다.
이지혜는 그저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는 것에 대해서 안타까운 마음을 품으며 특유의 밝은 연두색의 오러를 검에 두르는 체스터를 바라봤다.
체스터는 진심으로 싸울 생각이었다.
"뭐... 그렇게 나오면 어쩔 수 없네."
스릉, 이지혜가 전투의 의지를 내비치자 검에서 저절로 짙은 검은색의 오러가 둘러졌다.
이것이 검성, 굳이 의식하지 않아도 오러가 알아서 발현되는 경지였다.
콰앙-
체스터가 검을 휘두름에 이지혜 또한 뒤늦게 검을 휘두르며 막아섰고. 엄청난 굉음과 함께 흡사 폭발이 일어난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충격이 주변을 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