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8화 〉Chapter 2.5 또 다른 용사들.
에메랄드 기사단의 단장 체스터가 쓰러 진 뒤, 그 부하들은 자신들의 단장을 챙기고선 철수했다.
이윽고 이지혜는 느긋하게 기지개를 피며 천천히 걸어와 브랜드의 앞에서 넉살스럽게 말을 건냈다.
"반가워, 으음... 브랜드 맞지?"
"...저를 아십니까?"
브랜드는 이지혜가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음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 했고. 저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거리며 반문했다. 그러자 이지혜는 자연스럽게 자신이 왜 브랜드의 이름을 알고 있는지 설명했다.
"너 기사들이랑 우리들 사이에서 꽤 유명했거든. 실력도 좋은 놈이 몇 년 째 돌연변이 후송 임무로 꿀 빨고 있다고 말이야."
몇 년 지기 친구인 것 마냥 자연스럽게 말을 틈에도 브랜드는 불쾌함이라거나 위화감이 조금도 느껴지지지 않았다. 인상은 냉랭하였으나 주변에서 풍겨나오는 분위기 부터가 부드러움을 브랜드는 눈앞에서 느꼈고. 브랜드는 그저 이지혜가 알려준 여태까지 전혀 몰랐던 사실에 눈을 깜빡이며 놀란 반응을 보였다.
돌연변이를 엘프의 영역으로 후송하는 역할은 기사들 사이에서 꽤 지원율이 높은 편이었다. 그도 그럴것이 돌연변이는 제국에서 인간 이하의 것, 죽이지 않는한 무슨 짓을 하더라도 괜찮았기 때문이었고. 대부분의 이들이 스트레스를 풀거나 욕구를 풀기 위해서 지원했다.
하지만 브랜드는 그런 이유로 지원한 것이 아닌, 그저 일이 편하기 때문이라는 단순한 이유였고. 이는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수련을 하여 기사가 되었는데, 막상 되고 난 후부터 의욕이 바닥을 치면서 보상 심리가 작동하였기 때문이었다.
하여튼간에 브랜드는 자신이 꿀을 빠는 것으로 유명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고. 그것을 검성인 이지혜까지 알고 있다는 것에 재차 놀랐다.
그리고 그렇게 브랜드가 놀란 마음을 다스리지 못 하고 있을 때에, 이지혜가 추가적으로 말을 건냈다.
"일행은 이렇게 3명이야? 들은 것 보다 더 많네."
이지혜는 자신이 알기로 황제가 추격을 명령한 인원은 총 2명이라 들었는데, 한 명이 더 있음에 문득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이는 브랜드가 추가적으로 설명함에 이해가 가능했다.
"아리스토 님이 추가적으로 인원을 붙여주셨습니다."
"아리스토...? 아, 돌연변이 왕을 말하는 거구나. 이해했어."
아리스토라는 낯선 이름에 이지혜는 순간적으로 그 이름의 주인이 누구인지 햇갈렸으나. 이내 돌연변이 왕의 이름이 아리스토라는 것을 뒤늦게 떠올라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고. 뒤이어 브랜드가 자신들을 구해준 것에 대하여 감사를 표하고자 고개를 숙이며 깍듯이 대화를 이었다.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검성께서 나타나주지 않으셨다면 그대로 끌려가 처형 당했을 것 입니다."
"아, 아냐. 만약 어제 누군가가 쓴 마법이 아니었다면 찾지도 못 했을거고. 사실 이미 잡혀서 죽은게 아닌가 생각하기도 했거든."
이지혜는 솔직하게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애초에 엘프의 영역에서 살아남은 기사와 엘프를 추격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은 며칠 전이었기에, 이지혜는 사실상 이미 잡혔거나 죽었을 가능성도 배재하지 않고 있었고. 아무리 검성이라 하여도 아무런 정보 조차 없이 어디 있을지 모를 이들을 찾기란 불가능했다. 그렇기에 이지혜는 철저한 수색보다는, 제국의 영토에서 나가는 도중에 그 길목에서 겸사겸사 찾아보려고 한 것이었다.
만약 지난 밤에 느껴진 마나의 기운이 아니었다면 그날 밤에 수색을 포기했을 터였다.
그리고 브랜드는 이지혜의 말에 츠바키가 돌발적으로 썻던 마법이 결국엔 신의 한수가 되었음에 무언가 찝찝했다.
츠바키가 그 상황에서 한 행동은 최악에 가까운 행동이었다. 그렇기에 나중에 다시 만나게 되면 언질을 줄 생각이었는데. 그 행동이 이런 식으로 돌고 돌아 결국엔 말도 안 되는 결과를 낳게되니 떨떠름할 따름이었다.
역시 인생이란 모르는 것인가, 라고 브랜드가 생각하는 찰나. 둘의 대화에 한 남성이 스리슬쩍 끼어들어왔다.
"이봐, 팔 한 쪽은 어쨋어? 새로운 시대에 주고 오기라도 한 거야?"
새로운 시대에 주고 왔냐는 말, 브랜드는 이러한 말을 츠바키가 엇비슷하게 했음이 떠올랐다. 브랜드 저것이 무슨 말인지는 몰라도 이세계에서 온 용사들 사이에서 꽤나 유명한 말이라 여기며 대화에 끼어든 남성을 바라봤다.
우락부락한 체격에 금발의 더벅머리의 남자, 브랜드는 조금 전에 자신을 구해주었던 남자임이 떠올랐고. 이지혜에게 한 것과 마찬가지로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조금 전에는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은혜는 기회가 된다면 바로 갚겠습니다."
"와우.. FM보이구만. 그렇게 딱딱하게 굴지말고 편하게 형이라 부르라고. 딱 봐도 내가 나이가 더 많아 보이니까."
"...그것은 생각해 보겠습니다."
FM보이라니, 그것이 무슨 말인지는 몰랐으나 남자가 부담스러울 정도로 친근하게 대해옴에 오히려 브랜드는 살짝 거부감이 들었다. 하지만 구해준 사람에게 불쾌감을 드러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최대한 예의를 지키며 대답했고. 그러자 우락부락한 금발의 남자는 자연스럽게 브랜드의 등짝을 손바닥으로 강하게 쳐대며 말을 이었다.
"하핫, FM보이는 꽤나 까탈스럽네. 뭐, 차츰 친해지면 되는 일이니까."
남자가 말하는 것이 변방의 외진 마을에 있을 법한 나이먹은 아저씨들 마냥 경박했으나, 말투에서 둥글둥글함이 느껴져서 단순히 장난을 치는 것이 온전히 느껴졌다. 하지만 브랜드는 장난을 치고 있음이 느껴졌음에도 부담스러운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기에 어색하게 웃음으로써 대답을 대체했고. 옆에서 그 상황을 지켜보던 이지혜가 둘 사이에 끼어들며 자연스럽게 다시 대화에 합류했다.
"그 얼굴로 들이대면 누구나 밀어낼걸? 차이코프."
"오우, 누님. 그런 식으로 말하면 아무리 저라도 상처 받는다구요."
상당히 친근하게 주고 받는 것 치고는 말에 가시가 돋혔다. 하지만 저런 대화가 자연스럽게 오고감에 브랜드는 둘이 보통 친한 사이가 아님을 느꼈다.
그렇게 둘은 짧막하게 대화를 주고 받았고. 그러다 문득, 차이코프가 느닷없이 진지하게 인상을 좁히며 브랜드에게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그래서, FM보이. 저기 저 엘프 여자, 상태가 완전 메롱이던데 왜 저래?"
엘프 여자, 이는 에리엘을 말하는 것이 분명했고. 브랜드는 곧바로 이에 대해 설명했다.
"엘프의 영역에서 습격을 받았을 때 마족의 저주에 당했습니다."
"마족의 저주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누님? 이거 완전 대박인 것 같은데."
차이코프가 흥미진진하게 눈빛을 보이며 이지혜에게 다시 말을 건냈다. 마족의 저주라는 것에 이목이 집중된 것 같은데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다. 브랜드는 조용히 이지혜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이걸로 정말로 확실해졌네. 황제가 마족과 손을 잡았다는 사실이 말이야."
이지혜는 마족의 저주라는 말을 듣자 마자 황제가 마족과 손을 잡았다는 것에 한 치의 의심을 가지지 않았다. 또한 왜 황제가 이들에게 잡아들이라는 명령을 내렸는지 완전히 이해가 갔다.
제국이 마족과 손을 잡았다는 것을 공표한 것은 돌연변이 왕이었고. 돌연변이 왕은 제국과 본래부터 적대적인 관계였다.
그렇기에 제국 측에서 얼마든지, 돌연변이 왕이 거짓으로 음해하고 있다고 주장할 수 있었다. 실제로 돌연변이 왕은 세력을 이끌고 엘프의 영역에서 무력 충돌을 일으키면서 제국의 기사들을 죽이고 엘프들을 데려갔기에 충분히 신빙성이 있었다.
하지만 다른 왕국이 그 뻔한 거짓말을 믿을 리가 없었고. 모든 일에는 확실한 증거가 필요했다. 아무리 돌연변이 왕의 말이라고 하여도 아무런 증거도 없이 전쟁을 벌일 정도로 멍청한 왕국은 존재치 않았다.
그렇기에 제국이 마족과 손을 잡았다는 사실을 돌연변이 왕이라는 신뢰할만한 인물이 공표하였음에도, 곧바로 전쟁을 여는 것이 아니라 병력을 정비하면서 여론전만 펼치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마족의 저주를 받은 존재가 등장한다면 얘기가 달라졌다.
이것은 다른 왕국이 제국에게 전쟁을 선포하며 선제공격을 벌이기에 충분한 증거였으니 말이다.
그렇기에 제국의 입장에서 에리엘이라는 존재는 눈엣가시나 마찬가지일 터엿고. 브랜드 또한 제국의 기사 출신이었기에 증인으로 나선다면 돌연변이 왕의 주장을 더욱 공고히하게 해줄 수 있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한가지 드는 의문, 이들은 도대체 어디로 향하고 있던 것인가.
앞서 나눴던 대화로 추측하건데, 지난 며칠 동안 돌연변이 왕의 영역인 돌연변이 숲에 있었음은 분명했다. 그렇기에 황제가 추격하란 명령을 내렸음에도 여태까지 잡히지 않고 있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왜 그런 안전한 곳을 놔두고 이렇게 밖으로 나와 국경 근처에까지 와있는 것일까.
그렇게 이지혜는 나름 고심을 해가며 그 이유를 생각해 보았고. 짧은 순간에 그 이유에 대해서 유추해냈다.
"혹시 신성 왕국으로 가고 있던거야?"
신성 왕국, 이들이 굳이 밖으로 나와 움직일 이유는 그것 말고는 없었다. 흔히 알려진 상식으로, 마족의 저주는 마법으로 풀 수 없어 오로지 신성력을 통해서만 해제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이는 정확히 적중했다.
"네, 저주를 풀기 위해 신성 왕국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브랜드는 정확히 자신들의 목적지를 맞추는 이지혜의 모습에 놀라워 하면서도 곧바로 긍정했고. 이지혜는 주저할 것 없이 말을 이었다.
"잘 됐네, 마침 우리도 신성 왕국으로 가고 있었으니까 같이 움직이자."
이지혜는 안 그래도 신성 왕국으로 갈 생각이었기에, 브랜드 일행이 신성 왕국으로 간다는 말에 선뜻 합류를 권유했다.
하지만 브랜드는 그것을 흔쾌히 받아들이지 못 했고. 고개를 가로저으며 이지혜의 권유를 거절했다.
"아뇨, 헤어진 동료들 찾아야 되서 무리일 것 같습니다. 동료 두 명이랑 떨어지게 되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의식이 완전히 없는 상태라서요."
혹여나 불쾌해 할까봐 브랜드는 이유까지 덧붙여가며 합류할 수 없는 이유에 대하여 설명했고. 이에 이지혜는 일행이 더 있었다는 사실과 그 중에 한 명이 의식이 없는 상태라는 것에 당황했다.
그 말 대로라면 합류하는 것은 무리라고 볼 수 있었다.
이지혜가 신성 왕국으로 향하려고 했던 이유는 그곳에서 마족의 출현이 잦아들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기 때문이었기에, 하루 빨리 도착해야만 했었다. 그렇기에 이지혜는 마음 같아서는 동료를 함께 찾아주고자 싶었지만, 그러기에는 이 세상이 너무도 험난했다.
하지만 그 순간이었다.
"브랜드 씨! 츠바키랑 지금 막 연락이 닿았어요!"
어느샌가 사라졌던 아나스타샤가 멀찍이서 브랜드를 향해 소리를 지르며 달려왔고. 브랜드는 연락이 닿았다는 말을 듣고선 그것이 무슨 말인가 싶었다.
전서구가 있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연락을 한다는 말인가, 이는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것이었다.
"연락이 닿았다고? 어떻게?"
"혹시나 싶어서 텔레파시를 보내봤는데 대답이 왔거든요!"
텔레파시, 그 말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마법이라는 것만큼은 알 수가 있었고. 마법이라면 충분히 가능하다는 생각에 쉽게 납득했다.
"그래서, 뭐라고 하던데?"
"위치는 정확히 어디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일단은 안전한 곳에 있으니까 걱정말래요. 현성 씨도 의식을 되찾았다고 하구요."
마른 땅에 비가 내리듯 무척이나 반가운 소식, 브랜드는 츠바키와 현성이 안전한 상태임과 동시에 현성이 의식을 되찾았다는 것에 마음 한켠이 놓여왔고. 그 이야기를 곁에서 조용히 듣던 이지혜가 옆에서 말을 더했다.
"잘 됐네, 어차피 드워프 산맥을 지나야 되니까 도중에 합류하면 되겠네."
"뭐... 확실히 그렇네요. 그러면 동행하기로 하죠."
브랜드는 이지혜의 말이 하나도 틀린 것이 없음에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도 그럴것이 이지혜의 말 그대로 신성왕국을 가기 위해서는 드워프 산맥을 지나야 되는 것이 정석적인 루트였다. 만약 드워프 산맥을 통해서 가지 않는다면, 수많은 몬스터들이 서식하는 숲속과 산을 뚫고 지나가야 했으니 말이다.
"차이코프, 출발할테니까 다들 준비하라 그래.
그렇게 브랜드가 동행하기로 결정하자, 이지혜는 더 말할 것도 없이 차이코프를 시켜 준비를 하라는 말을 전하도록 하였고. 차이코프는 알겠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이며 자리를 떠나 저들끼리 실컷 떠들고 있는 무리로 떠났다.
그리고 이지혜는 차이코프에게서 시선을 돌려 뻘쭘하게 서있는 아나스타샤를 바라보고는 상냥한 웃음과 함께 넌지시 말을 건냈다.
"동료한테 드워프 산맥의 중심에서 보자고 전해줄레?"
드워프 산맥의 중심, 쉽게 말하자면 드워프들의 문명과 기술이 집약적으로 모인 곳으로 수도와 마찬가지인 역할을 수행하는 곳이었고. 아나스타샤는 그 말의 뜻이 무엇인지 조차 몰랐지만 이지혜의 말을 곧이 곧대로 따라 어디론가 급히 달려가기 시작했다.
텔레파시라는 마법은 무작정 상대방에게 보내고자 한다고 해서 보내지는 것이 아닌, 특정 거리 안에 있어야만 전해지는 것이었기에 아나스타샤는 조금 전 텔레파시가 보내졌던 곳으로 향한 것이었다.
다음으로 이지혜는 브랜드의 앞에 정면으로 서며 뒷짐을 지었고. 시선이 묘하게 다른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브랜드는 그 시선에 의아함을 느껴 따라가보니 그곳에는 한바탕 난리가 난 용사 무리가 보였다.
어쩌다가 저리 된 것인지는 몰라도 적잖게 난잡한 상태였고. 이지혜는 난장판이 된 동료들을 향해 게슴츠레하게 눈을 뜨고선 쓰디 쓴 한숨을 내쉬며 마지막 말을 건냈다.
"하아... 나도 이만 슬슬 가볼게. 동료들이 워낙 극성이라 직접 말을 해야 알아듣거든."
용사라는 집단은 꽤나 오합지졸인 편이구나, 브랜드는 그리 생각하며 멀어지는 이지혜를 바라봤고. 이윽고 들려오는 굉음에 브랜드는 애써 고개를 돌려 자연의 풍경을 눈에 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