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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릿한 흑백의 사형대.
한 여인이 온몸에 피에 젖은 채 묶여 있었다.
고귀한 신분을 나타내는 화려한 옷은 온갖 고초에 더럽혀진 지 오래였고, 성난 군웅들이 소리를 질렀다.
“죽여라!! 죽여라!!!”
“이 악녀!!!!”
퍼억!
어디선가 돌이 날아와 그녀의 머리를 때렸다.
주륵.
새빨간 선혈이 흘러내렸으나, 그녀를 동정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모두 분노에 차 저주를 내뱉을 뿐이었다.
“마지막으로 할 말은 없느냐?”
단두대 앞에서 황제가 물었다.
한때 그녀의 부군이었던 그는 눈가에 차가운 경멸을 담고 있었다.
황제는 시린 목소리로 말했다.
“후작은... 너의 아버지와 오라비는 모두 죽었다. 모두 너 하나의 잘못 때문에!”
“...!”
“그들 모두 마지막까지 너를 걱정하더군. 제발 너의 목숨만이라도 살려달라고.”
그 말을 들은 그녀의 눈동자에 후회와 괴로움이 깃들었다. 하지만 뒤늦은 후회일 뿐이었다.
“지옥에서 그들에게 사죄하도록.”
황제는 차갑게 선고했다.
그리고 그 선고 뒤.
섬뜩한 기요틴이 그녀의 목 위로 떨어졌다.
***
그리고 장면이 변했다.
흑백의 수술장.
의사들이 환자를 보며 다급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비장 파열이야! 혈압이 너무 낮아!"
"수혈은?!"
"이미 하고 있어요! 하지만 출혈이 너무 심합니다."
그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환자의 상태가 너무 좋지 않았다.
과연 살릴 수 있을까?
그런데 그때였다!
드르륵!!
수술장 문이 열리며 한 여성이 들어왔다.
"환자 상태 어때요?"
작은, 아니, 가녀리단 표현이 어울리는 여인이었다.
피 한 방울만 봐도 쓰러질 것 같은... 이런 거친 수술장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여인.
그런데 그런 그녀를 본 의사들의 표정이 이상했다.
"교수님!!"
마치 구원자를 본 듯한 얼굴이었던 것이다!
여인이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수술 준비는 다 됐죠? 혈압은 어떤가요?"
"60대입니다."
심각한 쇼크 상태.
하지만 여인은 일말의 동요도 없이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여인이 장갑을 끼며 건장한 체구의 남자 의사를 바라봤다.
"김 치프."
"네? 네, 교수님!"
"왜 이렇게 긴장하고 있어요?"
"그... 환자의 상태가..."
그 말에 여인이 웃었다.
부드러운, 동시에 사람의 마음을 안정시키는 미소였다.
"김 치프. 이제 우리가 뭘 해야죠?"
"... ... ."
"말해봐요."
"배를 연 후... 비장에서 출혈 혈관을 찾아 지혈해야 합니다. 그리고 비장 손상 정도에 따라 절제 여부를 결정해야 합니다."
여인이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정확해요. 그렇게 할 거예요."
"... ... ."
"잘 들어요. 지금부터 우리는 이 환자를 살릴 거예요. 비록 환자의 상태가 좋지는 않지만... 저는 우리가 이 환자를 살릴 수 있다 생각해요.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요?"
"... 네, 그렇습니다."
그녀의 차분한 말에 동요하던 의사들의 마음이 진정되기 시작했다.
그렇다. 살릴 수 있었다.
그 어떤 환자라도.
이 여려 보이지만, 그 누구보다도 강한 여인과 함께라면!
"메스."
그리고.
수술에 들어가는 순간, 그녀의 표정이 바뀌었다.
가녀린 여인에서, 생사의 갈림길을 놓고 싸우는 철혈(鐵血)의 외과의사(surgeon)로.
"오픈(open)합니다."
메스가 복벽을 갈랐다.
동맥에서 터져나온 피가 그녀의 하얀 얼굴을 적셨고, 그렇게 전쟁이 시작되었다.
***
"...!!!!"
그녀, 지현은 번뜩 눈을 떴다.
"또 꿈이구나..."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이전 삶들.
제국의 악녀 엘리제와, 외과의사 송지현의 꿈이었다.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이지?"
그녀는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난 분명 죽었는데..."
그런데 살아있었다.
그것도 굉장히 익숙한 몸으로!
그녀는 한숨을 내쉬고, 거울을 바라봤다.
백금발의, 인형같이 아름다운 얼굴.
엘리제 드 클로랜스.
첫 번째 삶의 자신으로 돌아온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분명 자신, ‘외과의사 송지현’은 죽었다. 원인불명의 비행기 사고로.
하지만 눈을 떠보니 이 첫 번째 삶의 몸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것도 16살의 어린 시절로.
‘모르겠다.’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어쨌든 살아있으니까.’
그녀가 의식을 차린 지, 벌써 10일의 시간이 지났다.
처음 눈을 떴을 때는 혼란스러움이 극에 달했었지만, 지금은 많이 안정된 상태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인지는 모르지만,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그때였다.
“아가씨, 아가씨. 들어갈게요.”
“아, 응. 들어와.”
곧 메이드 복을 입은 어린 하녀가 먹을 것을 들고 들어왔다.
“여기 식사에요, 아가씨.”
“응, 고마워.”
어린 하녀는 식탁에 조심이 음식을 내려놓은 후,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저... 아가씨.”
“응?”
“혹시 몸이 안 좋으신 것은 아니시죠?”
“괜찮아. 왜?”
지현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그... 조금 다르신 것 같아서요. 평소와 다르게 기운도 없으시고...”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가, 하녀의 말뜻을 깨달았다.
‘아, 내 원래 성격이...’
첫 번째 삶.
엘리제 드 클로렌스는 인형 같은 외모와 다르게 성격이 아주 뭐 같았다.
툭하면 성질에 짜증이었고, 주변의 물건을 집어 던지는 것도 예사였다. 그녀의 기분에 잘못 걸려 다친 아랫사람이 한, 둘이 아니었다.
‘그나마 지금이 얌전한 편이지. 아직은 성질만 더럽고, 특별히 큰 죄를 저지른 것은 없으니까. 하지만 나중에 나이가 더 들고 나면...’
그녀는 자신이 저지른 죄악을 떠올리고 치를 떨었다.
이 제국 최고의 명문, 클로래스 후작가는 바로 자신 때문에 멸문하게 된다. 소중했던 이들이 죽어가던 모습은 두 번째 삶에서도 그녀의 가슴에 한으로 남아있었다.
‘이번엔 결코 그런 일이 일어나게 하지 않겠어.’
엘리제 드 클로렌스의 몸으로 돌아왔으니, 그녀의 삶을 살긴 살아야 할 것이다.
지구에서 서젼, 외과의사(surgeon)의 삶을 살았던 그녀이기에, 이번 삶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있다.
과거와 같이 후회가 가득한 삶은 절대로 사절이었다.
“마리.”
“네? 네!”
부드러운 그녀의 음색에 어린 하녀, 마리는 화들짝 놀라 답했다.
‘왜 이러시는 거지? 저러다 또 무슨 트집을 잡고 때리는 것은 아닐까?’
이 어린 주인의 악랄함을 익히 잘 알고 있는 어린 하녀는 눈동자에 두려움을 담았다.
“오늘까지지? 내가 벌 받는 날이?”
“네, 아가씨.”
지금 그녀, 엘리제는 잘못을 저지른 후, 아버지인 엘 후작의 노여움을 사 저택의 외진 방에 감금되는 벌을 받는 중이었다.
‘감금 중이어서 차라리 나았지.’
덕분에 아무도 그녀를 찾아오지 않아 다행이었다. 만약 혼란스러워하는 그녀를 누군가 봤다면 분명 이상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저, 아가씨. 그렇지 않아도 후작님이 점심에 아가씨를 뵙자고 하셨어요?”
“아버지가?”
“네, 가족들 만찬에 참석하라 하셨어요.”
“...!”
그녀는 흠칫 놀랐다.
가족 만찬이면?
“모두 모이시는 거야? 아버지도, 새어머니도, 큰 오라버니, 작은 오라버니까지?”
“네, 당연하죠. 총기사단(Rifle Knightage)의 부단장인 큰 공자님 빼고는 다들 특별한 일 없으시니, 모두 오실 거예요.”
두근.
지현의 가슴이 떨렸다.
드디어 이전 삶의 가족들과 만나게 되는 것이다.
길고도 긴.
두 번의 삶과 죽음을 지난 재회였다.
***
그리고 곧 점심.
지현은 드레스를 입은 채 저택의 식당 앞에 서 있었다.
‘들어가야 하는데.’
그녀는 식당 문을 열지 못하고, 한참을 머뭇거렸다.
이미 식사 시작이 지나, 가족들은 모두 모여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대해야지?’
그녀가 머뭇거리는 이유.
30년 만에 만난 가족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서였다.
‘보고 싶었는데.’
지구에서 외과의사의 삶을 살았다 해서 첫 번째 삶의 가족들을 가슴에서 지웠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이 저지른 잘못 때문에 한(恨)처럼 가슴에 맺혀 계속해서 보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자아는 '후작가의 공녀 엘리제'가 아닌, ‘외과의사 송지현’이기 때문에 어떻게 그들을 대해야 할지 어색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곧 고개를 저었다.
‘뭘 고민하는 거야, 송지현. 가족들을 만나는 거야. 그것도 30년이나 그리워했던.'
끼익.
식당 문을 열었고, 그와 동시에 안에서 담소를 나누던 가족들이 대화를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
그리고 그들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그녀의 시간이 멈추었다.
‘아...’
그녀는 입가를 손으로 가렸다. 의도치 않게 손이 파르르 떨렸다.
어떻게 대해야 할지는 애초에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자신을 말없이 사랑하던,
하지만 자신이 저지른 잘못으로 누명을 쓰고 죽은 아버지.
못난 자신임에도 한없는 애정으로 편들어주던,
그러나 자신으로 인해 전장으로 나가 전사한 작은 오라버니.
질병으로 죽어갈 때도 친자식처럼 자신을 걱정하던,
하지만 자신은 미워만 했던 새어머니.
그들이 ‘살아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실이 그녀의 가슴을 뒤흔들었다.
“엘리제? 왜 그러느냐?”
아버지가 의아한 물음을 뱉는 순간, 또륵 그녀의 눈동자에서 한방울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 아...”
그녀는 급히 눈물을 닦았으나, 눈물은 주책 맞게도 멎지 않고 끝없이 흘러나왔다.
“... 리제?! 왜 그래?”
항상 자신을 아끼던 작은 오라버니가 놀라 다가왔다.
“벌 받는 것 많이 힘들었어? 그러게 아버지. 애가 잘못하긴 했어도, 방에 10일 감금은 너무 심했다니까요. 울지 말고. 우리 예쁜 동생. 이리와.”
작은 오라버니, 크리스가 조그만 그녀를 품에 끌어당겨 안아주었다.
“...!!”
그 따뜻한 품에, 30년 만에 느끼는 그 익숙한 따뜻함에 그녀는 끝없이 눈물을 흘렸다.
'작은 오라버니. 미안했어요. 정말. 정말로... 이번 삶에선 절대 그런 일이 반복되지 않게 할게요.'
자신의 잘못으로 크림 반도의 전쟁에 참전했던 작은 오라버니.
이전 저택에서 그의 전사 소식을 통보받았던 것이 떠올랐다. 그때의 참담함을 절대로 반복하지 않을 것이다.
크리스가 품 안에 암긴 그녀의 어깨를 다독였다.
“리제? 리제?! 많이 힘들었구나. 울지마. 이제 곧 약혼까지 할 다 큰 숙녀가 이렇게 울면 안 되지.”
아버지와 새어머니도 그녀에게 다가왔다.
“여보, 그러니까 너무 심했다고 했잖아요. 애가 아무리 잘못했어도.”
“크흠, 미, 미안하다. 내가 너무 심했던 것 같구나. 내, 내가 잘못했으니 울지 말고.”
근엄한 얼굴의 아버지가 안절부절못해 사과했다.
하지만 지현은 그들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살아있어. 모두 살아있어. 꿈이 아니야.’
그녀는 크리스의 품에서 벗어났다.
"저... 저 괜찮아요."
그리고 그녀는 가족들을 바라봤다.
눈물이 멈추지 않았지만, 그래도 미소를 지었다.
지난 삶.
회환과 고통, 아련함이 담긴 미소였다.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작은 오라버니.”
"왜 그러느냐, 엘리제?"
그녀는 오랜 시간... 무려 30년의 세월 동안 가슴에 묻어두었던 말을 꺼내었다.
"사랑해요."
그리고 눈을 감았다. 감긴 그녀의 눈동자에서 한 방울의 눈물이 다시 흘러내렸다.
“그리고... 죄송했어요. 정말로.”
그렇게 그녀는 첫 번째 삶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