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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오빠는 동생을 노려보고, 엘리제는 별말이 없고.
그날의 식사는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흐지부지 끝났다.
"저, 잠시 생각할 게 있어서 방에 먼저 올라가 볼게요."
그러고 그녀는 방으로 돌아갔다.
"... ... ."
작은 오빠, 크리스가 형을 흘겨봤다.
"형, 오랜만에 와서 왜 리제한테 그래?"
"난 내 생각을 말했을 뿐이다."
"요즘 우리 동생이 얼마나 착하게 지내는데!"
"착해? 엘리제, 그 아이가?"
렌은 코웃음을 쳤다.
크리스는 발끈해 말했다.
"형은 옆에서 제대로 보지도 않고! 요즘 리제가...!"
"봤다. 지난 15년 동안. 그 아이가 착해졌다고? 차라리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 믿겠군."
"형!"
크리스가 목소리를 높이려 했으나, 렌은 고개를 저었다.
"쓸데없는 이야기는 그만. 난 이만 기사단으로 돌아가 보마."
"... ... ."
크리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 고집불통의 완고한 형은 엘리제의 변화를 직접 보지 않는 한, 절대 믿지 않을 것이다.
'봐도 과연 믿을지. 무조건 의심부터 하는 성격이니까.'
"요즘 계속 바쁘네. 언제 다시 들어와?"
"글쎄. 당분간은 어려울 것 같은데."
"총기사단은 이번 크림 원정에서 빠진 거지?"
렌 남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크림 원정은 일단 2군단에서 전담하기로 했다. 하지만 만약 프랑소엔 공화국이 참전하기로 결정되면 로열 나이츠인 우리 총기사단도 출전하겠지."
"그러면 출전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네."
"그렇지. 공화국도 흑해(黑海)로 향하는 재해권을 그냥 포기하지는 않을 테니까."
아직 날씨가 쌀쌀해 렌은 얇은 코트를 걸쳤다.
"크리스, 잘해라."
"뭘?"
"다. 집에서는 가족들 잘 챙기고. 행정부에서는 아버지 이름에 먹칠하지 말고."
크리스는 입술을 삐죽거렸다.
"쓸데없는 잔소리. 형이야말로, 총알엔 눈이 없으니 조심하고."
렌은 피식 웃었다.
"그래, 다음에 보자."
***
한편 방으로 돌아간 엘리제는 침대에 엎드려 고민에 잠겼다.
‘어떻게 하지? 탄신연회까지는 2달도 안 남았어.’
엘리제는 황태자를 떠올렸다.
그와의 결혼은 자신의 가장 큰 과오였다. 그와 결혼하지만 않았어도 첫 번째 삶이 그렇게 막을 내리진 않았을 것이다.
'그를 위해서도, 나를 위해서도 이 결혼은 막아야 해.'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태자와의 약혼은 그녀, 본인이 강하게 주장해서 이루어진 것이란 점이다.
1년 전, 그러니까 15살 때 그녀는 태자에게 홀딱 반했었다. 잠시 스쳐 가는 설렘이라 하기엔 그녀는 너무 크게 열병을 앓았고, 원하는 것은 뭐든지 손에 넣어야 하는 성격상 아버지에게 태자와의 결혼을 강력히 졸랐다.
‘문제는 그게 이루어졌다는 것이지.’
그녀의 아버지인 엘 드 클로렌스 후작이 제국의 명재상이자, 현 황제의 가장 절친한 친우인 탓이었다.
황제는 자신의 가장 신임하는 신하인 클로렌스 후작의 딸이 태자와 혈연관계 맺는 것을 기꺼워했고, 그렇게 비극이 시작되었다.
‘하아, 인제 와서 마음이 변했다고 할 수도 없고. 무려 태자와 약혼이야. 일단 약혼이 공표되면, 황실의 체면상 뒤집을 수도 없을 텐데. 어떻게 하지?’
그렇게 그녀는 한참을 고민했다.
하지만 날이 지나도록 생각을 해봐도 뚜렷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황제가 마음속으로 결정한 일을 무슨 묘수로 뒤집겠는가?!
그런데 그녀가 근심 어린 얼굴로 고민하고 있을 때, 어린 하녀, 마리가 들어왔다.
“아가씨, 티에요.”
마리는 따뜻한 향이 나는 홍차를 내려놓았다.
“아, 매번 고마워. 마리.”
“... ... .”
그런데 마리는 바로 나가지 않고, 잠시 머뭇거렸다.
"응? 왜 그러니, 마리?"
"저, 아가씨."
"??"
마리는 한참을 주저하다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신지는 모르지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다 잘 될 거예요."
어린 하녀는 얼굴이 빨개져 고개를 숙였다.
"어제부터 너무 표정이 안 좋으셔서. 주제넘었다면 죄송해요."
그 말에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던, 엘리제는 잔잔히 웃으며 말했다.
"마리, 잠시 이쪽으로 와볼래?"
"네."
마리가 가까이 오자, 엘리제는 기특하다는 듯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고마워. 이제 다 컸네, 우리 마리."
'우리 마리'.
그 말에 마리의 가슴이 뛰었다. 지금까지 저택 누구에게도 듣지 못한 말이다.
변한 아가씨는 참 이상했다.
고작 16살밖에 안 되는 어린 소녀임에도, 마치 자상한 큰언니를 보는 것 같았으니까.
'계속 이 모습 그대로, 변하지 않았으면.'
그렇게 소원한 마리가 나간 후, 엘리제는 홍차를 마시며 생각했다.
"그래, 이렇게 아무리 고민해봤자 나올 답은 없어."
그녀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방법은 단 하나야."
찻잔을 내려놓고, 말했다.
"정면돌파. 황제 폐하께 직접 고해야 해. 그것 외에 다른 방법은 없어."
지금의 엘리제의 자아는 '송지현'이다.
부드러워 보이지만, 뼛속까지 골수 '외과의사'인 송지현.
지구에서 지난 삶을 살면서, 잔머리를 굴렸던 적은 없다. 모든 문제에 정면으로 부닥쳤다.
쾌도난마(快刀亂麻).
Cutting the Gordian knot.
헝클어진 매듭을 칼로 자른다는 뜻으로, 외과의사가 가장 좋아하는 문제 해결 방식이었다.
‘큰 벌을 받을지도 모르지만.’
약혼을 청할 때는 언제이고, 이제 와 물러달라니?
아무리 자신이 황제가 조카처럼 여기는 친우의 딸이라지만, 크게 분노할 것이 분명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어. 벌을 받아도 내가 감당할 몫. 이 약혼은 취소해야 해.’
그리고 그녀는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헝클어진 매듭을 칼로 자르더라도, 효율적인 계획이 필요한 법.
그렇게 그녀는 황제가 최대한 덜 분노하면서, 자신의 의견을 받아들일 방법을 고민했다.
***
황제 폐하를 알현할 기회는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황제가 엘 후작, 엘리제 부녀를 초대한 것이다.
'황태자비가 될 나를 한 번 더 보려는 것이겠지?'
현 황제와의 만남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엘 후작이 황제와 각별한 사이였기에 어린 시절부터 자주 안면이 있었고, 황제는 그녀를 조카처럼 귀여워했다.
"아가씨, 에비앙 디자이너께 드레스를 어떤 스타일로 주문할까요?"
"아니야, 그냥 있는 드레스로 입을게."
"네, 하지만...? 괜찮으시겠어요?"
"응, 어차피 지금도 드레스는 많잖아."
"하지만..."
엘리제는 고개를 저으며 생각했다.
'쓸데없는 사치야.'
과거 그녀는 무도회나, 황궁에 갈 때마다 매번 새로운 드레스를 제작해 입었었다.
최고급으로 주문함은 당연한 일.
그녀가 한번 입고 버린 드레스를 갖다 팔기만 해도 어마어마한 돈이 나올 것이다.
'그런 허영은 중요하지 않아.'
외과의사 송지현으로 살며 그녀는 자신을 꾸며본 적이 거의 없었다.
꾸밀 시간도, 여유도 없었고, 무엇보다 첫 번째 삶 때 사치와 허영의 극을 경험하며 덧없음을 뼈저리게 느꼈다.
'중요한 것은 사람의 내면이니까.'
그렇게 생각한 그녀는 드레스 룸으로 향했다.
상당수를 버렸음에도 드레스 룸에는 화려한 옷들이 눈이 번쩍 뜨일 정도로 많았다.
"어떤 옷으로 할까요, 아가씨? 이건 어떠세요?"
마리는 붉은빛 드레스를 꺼내었다. 마치 장미처럼 화려한 옷이었다. 하얀 피부의 엘리제가 입으면 꽃처럼 아름다우리라.
"아니야, 그거 말고 조금 더 단정한 옷은 없을까?"
"이거는요?"
"아니, 너무 화려한데..."
마리가 이것저것 주인의 취향을 고려해 권유했지만, 엘리제는 고개를 저었다.
엘리제는 드레스 룸을 보며 고민했다.
'막상 입을 게 없네.'
첫 번째 삶과 다르게 지구에서 외과의사로 산 그녀인지라, 화려한 옷은 딱 질색이었다.
'수술복에 흰 의사 가운이 제일 편한데. 그렇다고 수술복을 입고 폐하를 뵐 수는 없으니. 좀 단정한 스타일의 옷은 없나? 그렇다고 수수하기만 해서는 안 돼. 단정하면서도 기품 있어 보이는...'
폐하를 뵙는데, 아무 옷이나 입을 수는 없는 노릇.
그녀는 단정하면서도 기품이 있어 보이는 옷을 찾았고, 한참을 뒤진 끝에 원하는 스타일을 찾을 수 있었다.
"이걸로 할게."
"정말 그걸로 하시게요? 괜찮으시겠어요?"
"응, 이게 마음에 들어."
엘리제는 하얀 색상의 깔끔한 드레스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가씨는 워낙 예쁘셔서, 화려한 드레스가 어울리시는데."
마리가 입술을 삐죽했지만, 엘리제는 담담히 웃을 뿐이었다.
"그나저나 마리."
"네?"
"내가 이전에 집사께 부탁한 것, 도착했니?"
"네, 아가씨. 이제 곧 저택에 도착할 거예요."
"그래, 고맙고. 늦지 않게 도착하도록 다시 한 번 집사께 확인해주렴."
"네."
엘리제는 어느새 황혼이 다가오고 있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앞으로 삼일 뒤.'
앞으로 그녀의 삶은 이번 황제와의 만남에 달려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반드시.'
그녀는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