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06 1-2 불공평한 내기 =========================================================================
그리고 드디어 운명의 날이 도래했다.
엘리제는 드레스를 입고, 몸을 단장했다.
지나치게 화려한 복장을 피하고 단정하게 입었지만, 그렇다고 치장을 소홀히 한 것은 아니었다.
이런 자리에서 여자의 꾸밈은 검이자, 방패. 중요한 이야기를 해야 하는 만큼, 소홀함 없이 최선을 다했다.
“이건 이렇게 해줄래?”
“평소보다 조금 화장이 옅은데 괜찮으세요?”
“응, 이게 더 나은 것 같아.”
이전 엘리제는 무조건 화려한 옷에, 짙은 화장을 선호했다.
하지만 그녀는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쓸데없는 허영을 떠나, 어울리지 않아. 요란하게 꾸민다고 어울리는 게 아니니까.’
21세기, 고도로 발달한 지구의 화장술을 경험한 그녀다.
외과의사로 살며 치장을 즐기진 않았지만, 어떤 방식이 자신의 외모에 어울리는지 정도는 잘 알고 있었다.
“이 브로치와 저 목걸이, 그리고 진주 귀걸이를 해줄래?”
“네, 아가씨!”
그리고 치장을 마친 그녀는 거울을 바라봤다.
‘좋아. 나쁘지 않아.’
옆의 마리가 말했다.
“와... 너무 예뻐요, 아가씨.”
“괜찮니?”
“네, 평소처럼 화려하진 않지만... 그래도... 너무 예뻐요. 기품있어 보이고... 이전보다... 이게 더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엘리제는 살짝 미소를 띠었다.
“고마워.”
그리고 그녀는 미리 준비한 물건을 들고 저택 문으로 나왔다.
먼저 기다리고 있던 엘 후작이 그녀를 맞았다.
"다 준비됐느..."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딸의 모습을 본, 엘 후작의 눈이 크게 떠졌다.
“엘리제...?”
“네? 왜 그러세요, 아버지?”
엘리제는 푸른 눈을 깜빡였다.
엘 후작뿐이 아니었다. 마중하기 위해 나온 새어머니도, 작은 오빠도 모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녀를 바라봤다.
“왜 그러세요?”
하지만 다들 답을 못했다.
“너...”
아름다웠다.
평소에도 예뻤지만, 오늘은 마치 그림에 나올 것처럼 아름다웠다.
엘리제가 특별히 아름다운 치장을 한 것은 아니었다.
공들인 화장에 진주 목걸이, 수공예 브로치, 단정한 하얀 드레스. 그게 전부였다.
하지만 그런, 단정하면서도 기품있는 차림이 역설적으로 그녀의 외모를 극대화시켰다.
이전의 화려한 드레스를 입었을 때는 지나친 요란함에 외모가 먹히며 오히려 매력을 반감되었다면, 지금의 기품있는 차림은 그녀의 인형 같은 얼굴에 시선을 집중시키며, 아름다움을 돋보이게 했다.
엘리제는 얼굴을 갸웃했다.
“뭐 이상해요?”
“아, 아니다.”
엘리제가 옆으로 다가가 아버지의 손을 잡았다.
“가요, 아버지.”
후작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끄덕였다.
“크흠, 그, 그래. 가자.”
그렇게 둘은 마차에 오른 후, 황궁으로 향했다.
***
따각, 따각.
마차가 바퀴 소리를 내며 황궁에 들어갔다.
브리티아 제국은 브리티아 섬과 서 대륙 본토를 넘어 5개의 대양, 6개의 대륙 전체에 영향력을 떨치고 있는 세계 최강의 열강이었다. 가히 해가 지지 않는 대국(大國).
그런 만큼 황궁은 크고 화려했다.
엘리제는 잠시 회한이 서린 눈으로 황궁을 바라봤다.
‘오랜만이구나.’
과거 유폐되기 전, 황후로서 6년의 세월을 이곳에서 보냈다.
물론 좋은 기억은 아니었다.
‘그때는 이곳이 세상의 모든 것인지 알았는데.’
그녀는 씁쓸히 시선을 돌렸다.
과거의 안 좋은 기억 때문인지, 괜히 기분이 좋지 않았다.
‘폐하와 이야기가 잘 풀려야 할 텐데.’
그녀는 마음을 가다듬기 위해 눈을 감았다.
그런 그녀를 보며, 엘 후작이 입을 열었다.
“어디 몸이 안 좋으냐, 엘리제?”
“아니에요, 아버지.”
“혹시 안 좋으면 말하거라. 참지 말고.”
아버지의 걱정 담긴 말에 그녀는 미소 지었다.
“아버지.”
“응?”
“혹시 제가 잘못하면 어떻게 하실 거예요?”
“그게 갑자기 무슨 말이냐?”
“그러니까... 만약에... 제가 사고라도 치면...”
엘 후작은 눈썹을 찌푸렸다.
“왜? 또 무슨 잘못이라도 저질렀느냐?”
요즘은 잠잠하지만, 엘리제는 하루가 멀다고 잘못을 저지르는 사고뭉치였다.
후작은 단호히 말했다.
“잘못했으면 벌을 받아야지.”
“그렇죠?”
“그래, 혹시 숨기고 있는 것 있으면 지금 말하거라. 솔직히 말하면 용서해주마.”
“그냥 물어본 거예요. 특별히 잘못한 것은 없어요.”
아직은.
엘리제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곧 사고를 칠 거라서요. 죄송해요. 정말로.’
나름 준비해오긴 했지만, 황제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걱정이었다.
‘폐하의 분노를 사더라도, 그래도 부닥쳐야 해. 이번 삶에서 태자 전하와의 인연은 오늘로 끝내자.’
그렇게 다시 한 번 다짐한 그녀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문득 외과의사로 살던 지구에서의 삶이 떠올랐다.
차가운 수술장의 공기.
흔들리는 바이탈(vital). 붉은 피.
숨 막힐 듯한 생사의 기로!
고달픈 삶이었지만, 수술장에서만큼은 행복했다. 그 긴박한 긴장감이, 사람을 살리는 보람이 그리웠다.
‘이번 일이 끝나면...’
이 제국에서도 의사로 사는 삶을 살 것이다.
이번 일이 끝나고, 황제가 내린 벌을 받고 난 후에 말이다.
***
“폐하께서는 지금 장미 정원에 계십니다.”
황궁의 시종장이 그들을 맞았다.
장미 정원은 황궁 내에서도 아름답기로 손꼽히는 곳이다. 엘리제와 엘 후작은 여러 색상의 장미들이 활짝 만개한 정원으로 들어갔다.
잠깐 걸으니 중정, 조그만 연못 옆에 대리석으로 만든 정자가 나타났다.
그리고 그 단아한 느낌의 정자에서, 한 중년 남성이 서류를 읽고 있었다.
"...!!"
엘리제는 숨을 들이마셨다.
인자한 표정, 그러면서도 모든 것을 꿰뚫어보는 깊은 눈빛.
브리티아 제국의 11대 황제이자, 제국의 산업화를 이끈 희대의 명군, 민체스터 드 로마노프였다!
후작과 그녀는 예를 올렸다.
"제국의 태양, 황제 폐하께 엘리제 드 클로랜스가 인사 올립니다."
황제가 서류를 내려놓으며 시선을 돌렸다.
"어서 오게, 후작. 클로랜스 영애도 오랜만이구나. 잘 지냈느냐?"
"네, 폐하."
"거기 그렇게 서 있지 말고 앉거라. 너희는 차를 좀 더 내오고."
황제는 부드러운 음색으로 말했다.
엘리제는 최대한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정원의 의자에 앉았다.
"짐이 오랜만에 영애를 보고 싶어서 이렇게 불렀네. 거의 반년 만에 보는 것 같은데, 반갑구나."
"황공하옵니다, 폐하."
"특별히 다른 일은 없었지? 잘 지냈는가?"
"네, 폐하 덕분에 잘 지냈습니다."
황제는 잔잔히 웃었다.
그 온화한 미소를 보니, 엘리제는 순간 마음이 뭉클했다.
'여전하시구나.'
이전 삶, 모자란 자신임에도 황제는 한결같이 자신에게 잘해주었었다.
'마음 둘 곳 없는 황궁에서 폐하의 따스함에 위로를 많이 받았었는데.'
그래서인지, 지병이 갑작스레 악화 돼 그가 사망할 때, 가슴이 참 많이 아팠었다.
'좋은 황후가 되어달라 부탁하셨는데. 전혀 그 유언을 들어주지 못했어. 더구나 오늘도 몹쓸 부탁을 하러 왔으니. 얼마나 화내실까?'
속으로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요즘 몸은 괜찮으신 걸까? 지금도 지병을 앓고 계실 텐데.'
그녀는 황제의 안색을 살폈다. 황제는 그녀와 인사를 나눈 후, 아버지와 담소를 나누는 중이었다.
황제의 온화한 눈가 뒤로 짙은 피로가 느껴졌다. 물론 겉으론 전혀 티를 안 내고 있지만, 의사인 그녀가 봤을 때 몸 상태가 좋아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지병이시지? 당시 황궁 어의는 혈액 순환이 안 좋다고 할 뿐, 정확한 진단을 내리지 못했었는데.'
그녀의 눈빛이 깊어졌다.
'정확히 진단만 내릴 수 있으면, 당시의 일을 막을 수 있을 텐데.'
그녀는 황제가 갑작스레 혼수 상태에 빠졌던 일을 떠올렸다.
당시 태자의 정치 기반은 완벽하지 못했고, 정권을 노린 3 황자와의 다툼으로 정국은 극심한 혼란에 빠졌었다.
황제의 병을 치료할 수 있다면, 당시의 혼란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당시 혼수 상태에 빠졌을 때 폐하의 몸에서 케톤 냄새가 나섰었어. 호흡은 깊고 빠르고. 분명 산혈증(Acidosis)에 의한 혼수야. 평소 기력이 없으면서, 산혈증을 일으킬만한 질환.'
그녀는 '외과의사 송지현'으로서 단서를 추적했다.
‘분명 내가 아는 질환일 거야. 뭘까?’
어렴풋이 답이 잡힐 듯, 말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