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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과의사 엘리제-7화 (7/194)

00007  1-2 불공평한 내기  =========================================================================

그런데 그때였다.

한참 아버지와 대화를 나누던 황제가 빙긋 웃더니, 그녀를 바라봤다.

"오늘따라 영애가 이상하군. 분위기가 조금 바뀐 것 같아. 이전보다 조신해진 느낌인데?"

"...!"

엘리제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이전 삶 때 그녀는 철없는 행동을 많이 했었다. 황제야 조카 재롱 보듯 귀엽다고 넘어가 주셨었지만.

엘 후작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폐하. 갑자기 철이 들었는지, 이 아이가 요즘 참 많이 변했습니다."

"아, 아버지."

"최근 어떤 일이 있었냐면..."

그러면서 후작은 근엄한 얼굴에 어울리지 않게, 팔불출처럼 최근 변한 딸의 모습을 자랑하였다.

가족들에게 효도하는 일, 사려 깊게 아랫사람들을 챙기는 일 등.

"그래서 요즘 저택 내에서 이 아이에 대한 칭찬이 참 자자합니다."

"허허, 그래?"

황제가 엘리제를 바라봤다.

어릴 때부터 봐왔던 만큼, 황제도 그녀의 평소 모습을 잘 알고 있었다. 나이가 들며 차차 나아질 거로 생각하긴 했지만, 이렇게 갑자기 변했다고?

"매번 자네에게 차를 달여준다고?"

"네, 그렇습니다. 그 맛이 얼마나 깊은지, 깜짝 놀랄 정도입니다."

"그래? 궁금하군. 클로랜스 영애, 나한테도 영애의 차를 맛볼 수 있는 영광을 줄 수 있겠는가?"

그 장난스러운 말에 엘리제는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황공하옵니다. 제 미천한 솜씨가 폐하의 입맛을 어지럽힐까 걱정됩니다."

"무슨 말인가? 조카나 다름없는 영애가 끓여주는 차이면, 그 어떤 차라도 좋게 느껴질 터. 걱정하지 말고 솜씨를 발휘해 보게."

그 말에 어쩔 수 없이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그러면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혹시나 부족하더라도 많이 탓하지 말아 주십시오."

그리고 그녀는 시종들에게 다가갔다.

"제가 지금 이야기하는 것들을 준비해주실 수 있을까요?"

"네, 영애."

"일단 동방 청(淸, Qing)의 흑차(黑茶)와 백차(白茶)를 준비해주세요. 그리고 물은 오늘 뜬 약수로 받아주시고..."

똑같은 찻잎을 사용해도 배합, 물의 상태, 끓이는 온도 등에 따라 차의 맛은 천차만별로 달라진다.

'폐하께서 선호하시던 차가...'

그녀는 기억을 더듬어 민체스터 황제가 좋아하던 방식으로 차를 달였다. 이전 삶에서도 시아버지인 그에게 가끔 차를 끓여드린 적이 있기에, 그의 취향은 잘 알고 있었다.

"여기 차를 내왔습니다."

그녀는 절도 있는 동작으로 차를 드렸고, 향을 맡은 황제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향이 참 그윽하군. 내가 이전 동방 청(淸, Qing)나라의 대신이 직접 끓인 차를 마신 적이 있는데, 그때와 흡사한 향이야."

"과찬이십니다."

한동안 향을 음미하던 그는 차의 맛을 보고, 더욱 감탄한 표정을 지었다.

"훌륭해. 언제 이렇게 다도를 배운 건가, 영애? 이거 황궁 시종들보고 영애한테 가서 차를 끓이는 법을 다시 배우라 해야겠군."

황제가 기특한 얼굴로 엘리제를 바라봤다.

동방의 대국, 청(淸)에서 차가 전파된 후, 차 마시기는 귀족들의 고아한 취미가 되었다.

어떤 차를, 얼마나 훌륭하게 달여 마시느냐가 귀족가의 품격을 나타내는 중요한 지표가 되어, 제국의 귀부인들은 모두 다도에 열중이었다.

따라서 교양 깊은 귀부인일수록 훌륭한 차 맛을 내곤 했는데, 엘리제가 달인 차는 제국의 어떤 귀부인과 비교해도 못하지 않은 솜씨였다.

"자기 혼자 몰래 공부했다고 합니다. 저도 매일 엘리제가 끓여준 차를 마시는데, 마실 때마다 머리가 맑아지고 피로가 싹 가시는 느낌입니다."

엘 후작이 또 딸 자랑을 하였다.

"그래, 정말 그대 말대로 머리가 맑아지고, 피로가 가시는 느낌이야. 훌륭해. 이런 차를 매일 마실 수 있다니. 부럽군, 후작."

거듭된 칭찬에 그녀는 당황해 고개를 저었다.

"부족한 솜씨인데, 지나친 과찬이신 것 같습니다."

"아니야. 그나저나, 영애."

"네?"

황제가 흡족한 눈빛으로 물었다.

"앞으로 황궁에 들어오면, 짐에게도 종종 차를 끓여줄 수 있겠나?"

"...!!!"

엘리제의 얼굴이 굳어졌다.

지금 황제는 황태자와 그녀의 결혼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

"어쨌든, 훌륭한 차를 맛보게 해줬으니 영애에게 상을 줘야겠어. 혹시 원하는 것이 있나? 부담 없이 말해보게. 어차피 곧 한가족이 될 텐데, 내가 영애를 위해 뭐든지 못 해주겠나?"

마치 친가족을 바라보듯, 인자한 눈빛.

"... ... ."

그녀는 침을 꿀꺽 삼켰다.

'늦기 전에 말해야 해.'

그녀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그리고 말했다.

"폐하, 사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무언가? 말해보게."

"사실은..."

그런데 그때였다!

서늘한 음색의 목소리가 그녀의 심장을 갈랐다.

"늦었습니다, 아바마마."

"...!!!"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엘리제의 안색이 딱딱히 굳었다.

'설마...? 이 목소리는...?'

무감정한, 그래서 영혼 깊숙이 파고드는 차가움.

절대 잊을 수 없는 그 목소리에 그녀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오, 그래. 어서 오거라."

황제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

"태자."

린덴 드 로마노프.

이전 삶에서 그녀의 남편이었던, 엇갈림 끝에 파국으로 치달았던 이. 그녀에게 단두대의 칼날을 내린 자.

황태자가 무심한 금색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

황족 특유의 초상(超上)능력이 담긴 금색 눈동자. 그 투명한 금안은 북풍같이 시린 빛을 띠고 있었다.

신이 빚은 듯한 얼굴은 탄성이 나올듯한 아름다움과 차가움을 동시에 품고 있었다.

시릴 정도로 차가운, 그러나 지극히 아름다운 남자.

그가 바로 브리티아 제국의 현 황태자이자 차후 희대의 명군이라 불리게 될 린덴 드 로마노프였다.

“엘리제 드 클로랜스가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재회에 엘리제는 당황했으나, 동요를 감추고 예를 올렸다.

황태자는 그저 무심히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예전에는 저 눈빛을 참 좋아했었는데.’

단두대에 목이 떨어지는 그 순간까지, 그녀는 황태자를 깊숙이 사랑했다.

저 차가운 눈빛도, 아름다운 얼굴도, 무뚝뚝한 말투도.

그의 모든 것을 사랑했다.

‘하지만 엇갈린 사랑이었지.’

불행히도 그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다.

그와 엇갈리면 엇갈릴수록, 그녀의 마음은 일그러졌다.

‘애초에 이어지지 않았어야 했어.’

이전 삶, 원체 천성이 못되긴 했던 그녀였지만, 그렇다고 처음부터 그런 죄악들을 저지를 정도로 악독했던 것도 아니었다.

그녀가 그렇게 일그러져갔던 이유는 단 하나.

그와의 엇갈림. 정확히는 보답 받지 못하는 사랑과 냉대 때문이었다.

그렇게 그와 엇갈릴수록 그녀는 점차 일그러져 갔고, 사치와 탐욕에 매달렸다. 그리고 집착으로 변한 사랑은 금단의 선을 넘어버렸고, 그 결과 그녀는 가족을 잃고, 자신은 단두대에 처형당했다.

‘뭐, 다 내 잘못이지. 어리석었어. 정말로.’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정말 어리석었다. 바보 같은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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